소설리스트

500억을 상속받았다-94화 (94/200)

94. 이종현 전무 (3)

이종현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세월이 어디 허투루 지나갔겠는가.

삶은 그동안 이종현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었다.

너무 큰 기대는 되려 실망만을 불러온다는 것 역시 인생을 통해 배운 교훈 중 하나였다.

아직 그는 한영수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어쩌면 한영수는 일개 기업사냥꾼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만약 적대적 인수합병을 노리고 있다면 나는 그저 구색 맞추기용 카드에 불과할 테지.’

믿었던 회사의 배신에 상처를 입은 마음을 또 이 젊은이의 혀에 놀아나 걸레짝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이종현은 허리를 세우고 자세를 바르게 고쳐 앉았다.

상대방에게 조금이라도 커 보이기 위함이었다.

내 앞에 앉아있는 남자의 속내부터 캐내야 한다.

눈을 흐리게 만드는 것들을 쳐내고 나면 분명히 보이는 것이 있으리라.

무릎이 튀어나온 추리닝 바지를 입고 몸을 쭈그리고 소파 위에서 잠을 자던 남자.

아내의 한숨과 타박을 뒤로한 채 어깨가 축 처져 집 밖을 나왔던 남자.

거대한 거인의 머리 위까지 올랐었으나, 날개도 없이 땅으로 추락해버린 남자.

그 남자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문득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족들과 미팅을 할 때가 떠올랐다.

비록 그 당시에는 실무자의 한 명으로 뒷선에 물러 앉아있었을 뿐이지만, 혹여라도 급한 실례로 중간에 자리를 비우는 일이 없도록 이종현은 전날부터 물을 비롯한 모든 음식을 금식했었다.

그는 그런 남자였다.

“잘 아시겠지만, 고왕 건설은 지금 침몰 직전의 배입니다. 지금 저보고 그 배에 올라타라고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협상의 첫 번째 단추는 거절이다.

마음이 동하는 제안이 들어왔다고 주인 만난 강아지처럼 꼬리를 흔들 수는 없다.

이 자는 지금 50대 백수 이종현을 보는 것이 아니라, 태상 건설의 핵심 임원이었던 그를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거기에 맞는 체통을 보여줘야 한다.

그래서 이종현은 고왕 건설이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크다고 예측하면서도 ‘침몰 직전의 배’라는 과한 표현을 사용했다.

“그래서 전무님을 모시려고 하는 겁니다. 배에 물이 새면 뜯어고쳐야지요. 그리고 다시 항로를 바로잡기 위해 능력이 있는 선원도 필요할 테고요. 무엇보다 저에겐 이 거친 파도를 이겨낼 수 있는 ‘함장’이 필요합니다.”

한영수는 재치 있게 이종현의 말을 받아넘겼다.

무엇보다도 그는 함장이라는 낱말을 강하게 악센트를 주며 말을 했다.

그 단어의 울림은 이종현에게 아주 크게 다가왔다.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이종현의 심장이 주책맞게도 또다시 쿵쿵 크게 뛰었다.

하지만 한영수의 말에는 맹점이 있었다.

그리고 노련한 이종현이 그것을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다.

“미안한 이야기 하나 하겠습니다. 대표님, 아니 BH 인베스트먼트가 가지고 있는 고왕 건설의 지분이 이렇게 큰소리를 칠 정도로 충분합니까? 저한테 보여준 것처럼 5% 남짓이 고작입니다. 그걸로 목소리나 제대로 낼 수 있겠습니까?”

“...”

한영수는 이종현의 말을 묵묵히 듣기만 했다.

“더욱이 윤일중 회장. 마냥 허허, 하는 사람처럼 보일지 몰라도 속은 승냥이처럼 까맣습니다. 아무리 회사가 휘청인다고 해도 쉽게 경영권을 남에게 넘기지 않을 거라고 장담합니다.”

그뿐이 아니었다.

이종현이 차마 대놓고 말을 못 할 뿐이지 오너로서 윤일중은 무능한 쪽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고왕 건설이 매년 도급순위 상위권을 놓친 적이 없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회장이 세월아 네월아 하며 재벌 놀이에 심취해 있는 동안에도 건설맨이라는 자부심 하나로 똘똘 뭉쳐 회사를 지탱해온 베테랑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고왕 건설이 쉽게 무너질 리 없다고 짐작하는 근거 중 하나기도 했다.

한영수는 여전히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이종현마저 입을 다물자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만이 맴돌았다.

크흠━

이종현은 괜히 헛기침을 해보았다.

그는 지금 넥타이를 맨 것도 아닌데 괜히 목이 갑갑했다.

그리고 그때, 다소 놀랍다는 말투로 한영수가 입을 열었다.

“글쎄요. 앞으로 고왕 건설에서 어떻게 목소리를 낼지는 저, 그리고 저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역량에 달렸겠지요. 돈 문제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책상 밑에 떨어진 동전까지 긁어모아야 할 정도로 어렵지 않습니다. 방법의 문제라면···”

한영수의 말은 다소 싸늘해져 있었다.

아니, 공손함으로 포장된 말투 하나하나에 날카로운 비수들이 숨겨져 있었다.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은 비즈니스 자리를 가져보았던 이종현이다.

테이블의 반대편에 앉아있는 상대들과 힘겨루기라면 너무나 익숙한 그는 바로 알 수 있었다.

한영수는 허언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저 넘치는 자신감에는 틀림없는 이유가 있다고.

“전무님과 이 자리에서 논의하는 것은 적절치 않을 것 같습니다. 이제 겨우 주춧돌을 올린 일을 순진하게 떠들고 다닐 정도로 저는 어리석지 않습니다. 그리고···”

한영수는 잠시 말을 쉬었다.

“저는 오늘 전무님에게 평가를 받기 위해 이 자리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처지를 생각하라.

교양있게 돌려 말하는 저 말 속에 숨겨져 있는 의미를 단박에 알아챈 이종현이었다.

그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해 입을 다물었다.

순간 이종현은 기시감이 자신을 지배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분명히 한영수와는 초면이고 그와의 대화 역시 처음임에도, 이전에 경험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는 곧 그 기시감의 원인을 찾아냈다.

장영복 회장.

장영복 회장이 엄중하게 자신을 질책하던 그때와 꼭 같았다.

단순히 한영수의 외모가 자기가 모셨던 보스를 닮았다느니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이 자리가 장영복 회장과 독대라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말 한마디로 순식간에 분위기를 바꾸어버리는 위압감.

이종현은 장영복 회장 특유의 캐릭터라고도 할 수 있는 그 카리스마를 지금 한영수에게 느끼고 있었다.

‘도대체 저 친구는 정체가 뭐냔 말이야.’

고작 말 몇 마디 섞고 유난을 떤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 말 몇 마디에 이런 감정을 느꼈으니 더 무섭고 놀라운 것이었다.

더욱이 한영수는 기껏해야 자신의 조카뻘 정도 아닌가.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머리가 몸에게 신호를 보냈다.

이종현의 등허리에서 땀이 송골송골 돋아났다.

‘괜히 어쭙잖게 떠보는 건 의미가 없겠어.’

한영수의 그릇을 어림짐작한 이종현은 더 이상 말을 돌리지 않았다.

“그래서, 한 대표님이 저에게 맡기고 싶은 일이 대관절 뭡니까.”

이종현은 가장 먼저 ‘일’이라는 말을 입에 담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돈도 직급도 아니었다.

그의 속 마음을 짐작한 한영수의 얼굴이 풀어지더니 슬쩍 미소가 올라왔다.

“전무님. 에메랄드 시티라고 들어보셨을 겁니다.”

에메랄드 시티.

당연히 그 계획에 대해 알고 있는 이종현이었다.

그가 회사에 사표를 내던 그때 즈음의 일이었다.

태상 건설은 카타르에 사람을 보내는 등, 에메랄드 시티 사업을 선점하기 위해 물밑 작업을 막 시작한 참이었다.

이종현은 그 사업과 관련해서 착각을 하나 했었다.

분명히 자기에게도 한자리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태상 건설에 재직하고 있는 그 누구보다도 중독 쪽에 대해서는 박사였으니까.

만약 에메랄드 시티 건설에 조금이라도 이바지를 하게 된다면 퇴직 전 자신의 이력에 아름다운 마침표를 찍을 수 있으리라 내심 생각했던 그였다.

하지만 인제 와서 돌이켜보니 그게 얼마나 바보 같은 희망이었는지 잘 알고 있는 이종현이었다.

떡 줄 놈은 생각도 안 했는데 혼자 장구 치고 북 친 꼴이었다.

“저는 고왕 건설을 에메랄드 시티 수주에 참여시킬 생각입니다.”

한영수의 선언에 이종현의 동공이 크게 열렸다.

“··· 하지만, 그 사업은 태상 건설이 이미 침을 다 발라놓은 상태인데.”

“그게 어쨌단 말입니까.”

한영수는 태상이라는 이름 앞에서도 움츠러드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지금 제 눈앞에 대한민국 건설업계에서 중동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분이 계시는데요. 그분이 함께 해주신다면 못 할 것도 없지요.”

아아···

이종현의 입에서 탄식 비슷한 것이 흘러나왔다.

‘이제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구나. 못 당하겠네.’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도 바친다고 하던가.

핍박을 받으며 초라하게 회사에서 쫓겨난 자신.

그의 앞에 한영수라는 자가 나타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까지 드는 이종현이었다.

어쩌면 아주 예전부터 정해져 있던 운명일지도 모른다.

이런 유치한 감상에까지 젖게 되는 그였다.

이미 땅속 깊은 곳으로 매장되어버렸다고 생각한 꿈이 몽실몽실 살아나기 시작했다.

이종현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 그래. 정상화된 고왕 건설이라면 못할 것도 없지.’

설계 능력은 조금 부족하지만, 시공 기술만으로는 국내에서 일등으로 평가받는 고왕 건설이다.

특히 자동화 생산라인을 통해 구조물을 공장에서 미리 제작해 건축 현장으로 옮기는 PC 공법은 고왕 건설만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할 정도.

경쟁사에서 오랫동안 몸담았기에 고왕의 내부자들을 제외한다면 누구보다도 그 저력을 잘 알고 있는 이종현이었다.

“만약··· 대표님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제 위치는 어디입니까.”

“태상에서 누리시던 것 이상을 보장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카타르 전담팀을 꾸릴 생각입니다. 그 팀의 리더를 맡아주십쇼. 몸을 움직이는 데 불편함이 없게 최대한의 자율을 부여해 드리겠습니다.”

한영수는 마치 벌써 자신이 고왕 건설의 꼭대기에 있는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이종현의 귀에는 그것이 결코 허황되게 들리지 않았다.

꿀꺽━

이종현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렇다면 저도 한가지 요구사항이 있습니다.”

“예. 편하게 말씀하시지요.”

“··· 사람을 더 써주셨으면 합니다. 유능한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대표님이 저에게 말했던 것처럼 그냥 놀고 있기에는 아까운 사람들입니다.”

한영수는 이종현의 말에 단 1초도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전무님. 몸 잘 추스르고 계시길 바랍니다. 모든 것이 확실해지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이종현은 한영수와 악수를 나누었다.

악수를 마친 한영수는 이종현에게 허리를 숙여 보이곤 어디론가 살졌지만, 이종현은 자리를 뜨지 못하고 계속 서 있었다.

뜨겁게 달궈진 가슴 속의 열기가 쉬이 식지 않았다.

자신의 존재 의미를 증명할 두 번째 기회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경쟁사 재취업 금지’ 따위의 확약서를 태상 건설과 맺은 적이 없으니 고왕 건설로 자리를 옮긴다고 해도 법적으로 시비 될 것은 없을 것이다.

‘그래. 난 아직 끝나지 않았어.’

만약 한영수의 말대로 모든 것이 잘 풀리면 태상 건설에도 분명히 보여주리라.

자신은 결코 이빨 빠진 늙은 개가 아니라는 걸.

가족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 소식을 마누라가 듣게 되면 얼마나 좋아할지.

이종현은 휴대전화를 꺼내 들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 어. 그래. 딸, 아빠야.”

자기 딸에게 전화를 건 이종현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게 얼마 만에 지어보는 미소인지.

“어디라고? 학교? 그래. 아빠랑 오랜만에 데이트나 할까? 그래··· 좋지. 알았다.”

딸과의 전화를 끊고 이종현은 발을 바쁘게 움직였다.

이종현은 더 이상 어깨가 축 처진 힘없는 남자가 아니었다.

그의 뒷모습은 날아갈 듯이 가벼워 보였다.

추운 겨울날, 훈훈한 저녁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