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이종현 전무 (2)
서울 강남의 어느 설렁탕집.
여기는 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곳으로 구 회장은 매일같이 이곳에 출근 도장을 찍었다.
벌써 십 년은 훌쩍 넘은 단골인 구 회장.
그는 습관처럼 늘 같은 테이블에서 첫 끼니를 해결하곤 했다.
대부분의 경우 그는 혼자였다.
하지만, 요즈음 구 회장의 옆에는 그에게 있어 세상 누구보다 든든한 동반자가 하나 있었다.
구동일.
부자간의 극적인 화해 이후, 특별한 일이 없으면 구동일은 구 회장과 바로 이 설렁탕집에서 아침 식사를 함께하고 있었다.
오늘도 여느 때와 같은 그런 날.
사실 슴슴한 설렁탕의 맛에 구동일은 매력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이걸 질리지도 않고 먹어온 아버지가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래도 음식 맛을 떠나 아버지와 함께하는 이 시간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부자간의 대화가 단절되었던 것이 벌써 오래전 일이다.
그 끊겼던 시간의 골이 깊었던 만큼 구 회장은 이제라도 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들이 많았다.
천둥벌거숭이에 불과했던 구동일이 이제야 뭔가를 가르쳐볼 만한 태가 나기 시작한 것이다.
구 회장은 이 아침 식사 시간을 이용해 그가 체득한 삶의 지혜를 구동일에게 넌지시 전하곤 했다.
구동일은 그것이 좋았다.
“아버지, 그런데요.”
설렁탕 국물을 뜨다 말고 구동일이 말했다.
“한영수 말이에요. 그 큰 회사를 인수해서 어쩔 생각일까요?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해봐야 이제 겨우 저랑 동갑인걸요. 경영이라는 게 주먹구구로 되는 것도 아니고. 특히나 건설업계가 진짜 만만치 않은 곳인데.“
가장 밑바닥에서 몸을 굴린 경험을 통해 구동일은 건설업계의 생리를 저도 모르게 깨우치고 있었다.
구 회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들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제 머리로 무언가를 생각하는 모습이 그렇게 기특해 보일 수 없었다.
“아버지가 하나 물어보자. 네 생각에 경영이 뭔 것 같은데?”
“음···”
구동일은 수저를 내려놓고 한참을 고민했다
단어가 본디 가진 뜻이야 어찌 모르겠냐만, 길게 풀어보려니 너무나 추상적이었다.
이제 막 덧셈, 뺄셈을 배운 아이가 손가락을 동원해 셈을 하듯 열심히 짱구를 굴려보았지만, 마땅히 이거다 싶은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결국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에 사람을 부리는 일이야. 경영은.”
아들의 대답을 참을성 있게 기다려주던 구 회장이 슬쩍 힌트를 흘렸다.
“그럼, 사람을 어떻게 해야 잘 부릴 수 있을까?”
“··· 아무래도 돈 아닐까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만큼 동기부여가 되는 게 없잖아요.”
구동일은 재빠르게 입을 놀렸다.
하지만 그 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구 회장은 고개를 천천히 좌우로 저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돈. 당연히 중요하지. 하지만 그것보다도 사람을 잘 쓰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마음속에 숨겨져 있는 욕망을 잘 잡아내야 해.”
“욕망이요?”
“그래. 누군가가 간절히 원하고 갈구하는 것. 사람의 생김새만큼이나 각자 소원하는 욕망은 다양하겠지. 그걸 이뤄주면 속된 말로 머슴 짓도 신이 나서 하게 되는 거다.“
‘··· 그리고 한영수, 그놈은 사람의 욕망을 쥐고 흔드는데 무서울 정도로 천재적이고 말이야.’
구 회장은 뒷말은 입에 담지 않고 마음속에만 묻어두었다.
혹여라도 이제야 세상에 대한 눈을 뜨기 시작한 아들의 사기를 꺾을까 염려되었던 탓이었다.
한영수.
구 회장의 생각에 정말 대단한 걸물이었다.
자신마저도 한영수에게 속절없이 끌려다니지 않았는가.
물론 알면서도 당해주는, 기분 좋은 종류의 것이었지만.
구 회장의 눈이 아들을 다시 향했다.
그가 보기에 나이만 똑같이 먹었을 뿐이지 구동일은 아직 한영수에게 비교하면 한참 멀었다.
어느 분야에나 천재가 있기 마련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압도적인 재능을 가진 자를 만나게 되면 절대 섣부르게 대적해서는 안 된다.
그의 우산 아래서 비를 피하며 함께 일을 도모하거나, 도저히 같은 길을 걸을 수 없다면 피해 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처세술이다.
“아무튼, 동일이 너는 앞으로 한영수 옆에 딱 붙어있어. 그놈 바짓가랑이를 꽉 붙잡고 있으란 말이야.”
*“안녕하세요. 전무님. 처음 뵙겠습니다. 제가 한영수입니다.”
이종현은 자신을 향해 공손하게 인사를 해오는 한영수를 향해 어설프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 전화로 드리기에 적절하지 않습니다. 꼭 얼굴을 뵙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전무님이 편하신 곳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제가 약속드리건대 결코 전무님에게 나쁜 이야기가 아닐 것입니다.
자기를 꼭 만나고 싶다는 한영수의 간청에 얼떨결에 불려 나온 그였다.
한영수는 빼어난 외모의 청년이었다.
곧은 자세와 목소리에서 청춘의 힘과 자신감이 절로 느껴졌다.
그의 젊음을 보고 있자니 자신의 과거가 떠오르지 않을 수가 없는 이종현이었다.
한때, 그 역시도 저처럼 흘러넘치는 생기를 무기로 모두에게 박수받던 시절이 있었으니.
하지만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지금, 어깨가 축 처진 중년이 된 자기 모습에 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종현은 저도 모르게 한영수의 젊음을 슬쩍 질투해버리고 말았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아직 정신만은 젊은 날들에 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데.
아니. 육체는 정점을 한참 전에 지났지만, 수많은 시행착오에서 얻은 경험으로 더 깊은 지혜로 아직 많은 일을 할 수 있는데.
아아··· 미처 준비할 새도 없이 출구 밖으로 내쫓겨버린 삶이여.
‘그런데 가만···’
한영수의 얼굴을 곰곰이 뜯어보다 보니 생각나는 사람이 있는 이종현이었다.
‘얼굴이 낯이 익어··· 그래. 저 친구 회장님을 많이 닮았는걸. 눈매부터 해서.’
이종현이 장영복 회장과 한영수 사이에 끊을 수 없는 찐득한 연결고리를 알 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저 신기한 일이라고 치부하고 말았다.
“전무님에게 갑작스럽게 무례를 범했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나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부끄럽지만 작은 회사를 하나 운영하고 있습니다.”
한영수는 공손하게 이종현에게 명함을 건넸다.
BH 인베스트먼트
대표이사 한영수
“아··· 그렇습니까?”
한영수의 잘생긴 얼굴에 감탄하던 것도 잠깐.
이 젊은이의 정체를 알게 되자 기분이 다소 불쾌해지는 이종현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퇴직 후에 이곳저곳에서 연락을 받곤 했었다.
그들은 이종현이 목돈이 생긴 걸 귀신같이 알곤 큰 수익을 약속하며 투자를 읍소했었다.
그런 사탕발림들은 가뜩이나 심란한 이종현의 심기만 더 어지럽힐 뿐이었다.
눈앞의 남자 역시 그들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짜게 식기 시작했다.
어쨌든 직장인의 습성이 아직도 몸에 배어있는 이종현은 명함을 한 장 받았으니, 자신도 답을 줘야 한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래서 외투의 가슴팍 쪽으로 손이 가다가 문득 더 이상 줄 명함 같은 것이 없다는 사실이 떠올라 이종현은 씁쓸하게 웃었다.
멋쩍게 손을 회수한 그는 애먼 커피잔만 매만졌다.
“어떻게 저에 대해 아셨는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돈 들어갈 곳들을 생각하면 빠듯하기만 합니다. 투자니, 뭐니, 그런 생각할 여유가 없어요. 공연히 헛걸음하신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명색이 대표라는 친구가 직접 찾아온 성의를 봐서라도 이종현은 불쾌함을 억누르고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 말했다.
‘이왕 나온 거, 박 상무에게 전화라도 한번 해볼까.’
그로서는 간만의 외출이다.
그냥 털래털래 집으로 돌아가기도 무안한 일이다.
이종현은 다음 일정을 머릿속으로 궁리하기 시작했다.
한영수는 이종현의 말을 듣더니 조금 놀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 그렇게 오해하실 수 있겠군요. 제가 전무님 뵙고자 한 건 그런 의도는 아닙니다. 사실 우리 회사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개인 투자를 받지 않고 있습니다.”
이종현은 한영수의 말에 경계의 촉이 더 날카로워졌다.
‘그래. 이제 나는 특별하다고 꼬시겠지. 너무 뻔한 사기꾼들의 수법 아니야?’
그런 그의 속도 모르는지 한영수는 빙그레 웃었다.
“외람되지만, 이 전무님의 화려한 이력에 대해서는 넘치도록 전해 들었습니다. 태상 건설에서 굵직한 프로젝트들은 다 전무님을 거쳐 갔더군요.”
“다 지난 일입니다. 지금은 일개 야인에 불과하고요··· 그나저나 내 뒷조사라도 한 겁니까.”
“예. 맞습니다. 뒷조사 좀 했습니다.”
허!
대놓고 당당하게 말하니 오히려 할 말을 잃어버린 이종현이었다.
“전무님은 저희가 모시고 싶은 분인데, 프로필 정도는 당연히 확인해두어야지 않겠습니다.”
‘잠깐··· 모시고 싶다고? 나를?’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전개이다.
이종현의 머리 위에 큰 물음표가 떠올랐다.
물론 대기업 임원들의 인적 네트워크를 빼먹기 위해 퇴직 후에도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온다는 건 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건설 통인 자신에게 투자회사가 무슨 자리를 만들어주겠다는 건지?
‘부동산 투자 회사라도 되는 건가?’
이종현은 손에 쥔 명함을 한 번 더 들여보았다.
하지만 활자라곤 고작 몇 개만 새겨진 명함 속에서 BH인베스트먼트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아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혹시 고왕 건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영수는 이종현에게 다른 생각을 할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뜬금없는 화두를 하나 던졌다.
고왕 건설이라.
최근 경제면에서 가장 큰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고왕 건설이었다.
시작은 월스트리트 저널이었다.
이 세계적인 경제 일간지는 크게 지면을 할애해 한국경제의 위기에 대해서 신랄하게 기사를 썼다.
특히 부동산 거품을 심각하게 경고했는데, 무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 비유하기까지 했다.
당연히 국내 유수의 건설사들도 날카로운 펜을 피하지 못했다.
그리고 가장 많은 채찍을 맞은 곳이 바로 고왕 건설.
이윽고 국내 언론사들도 고왕 건설을 코너에 몰아넣고 때리기 시작했다.
눈덩이처럼 불어난 위기론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금세 확산이 되었다.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하루가 멀다 하고 ‘고왕 건설 부도’가 오르내렸다.
이런 시절일수록 가장 고통을 받는 것이 누구겠는가?
바로 고왕 건설의 주주들이었다.
고왕 건설은 언론 보도자료를 내고 윤일중 회장이 나서서 기자 회견까지 했지만, 민심을 가라앉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불안심리를 이겨내지 못한 개미 투자자들의 이탈은 날이 갈수록 가속화되었고 자연히 주가는 연일 시퍼런 색이었다.
“글쎄요. 건설경기가 워낙 찬 바람이 부니 당분간은 잔뜩 수그리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종현은 뜨뜻미지근하게 대답했다.
물론 그가 누군가?
작금의 사태에 대해 사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종현은 결코 고왕 건설이 부도까지 가는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일단 정부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1군 건설사인 고왕 건설이 무너지면 그 밑에 딸린 수많은 하청업체들과 건설 노동자들을 어쩔 것인가.
어디 그뿐이랴.
고왕 건설이 전국에 지어놓은 아파트에는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가구들이 살고 있다.
만약 고왕 건설이 무너진다면 그건 단순히 한 기업이 망하는 문제에서 끝나지 않는다.
현 정권 자체의 존폐가 걸려있는 심각한 위기였다.
아마도 고왕 건설이 자체적으로 이 사태를 진화를 못 한다면 정부는 소방수를 자처하며 지불보증까지 각오하리라.
한때는 태상 건설보다 우위에 올라섰던 시절도 있었고, 경쟁사 자리는 꿋꿋하게 지켜냈었던 고왕 건설이 저 모양이 되다니.
뭐, 이제 그에게 있어선 남의 일일 뿐이었다.
만약 태상 건설에 남아있었다면 눈에 핏발을 세우고 상황을 주시했겠지만, 이젠 무슨 상관이겠는가.
내 집이 없으니 집에 불이 날 걱정은 안 해도 되는 격이다.
어찌 되었건 아직 이종현은 한영수의 의도를 조금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튼, 저는 직장생활만 해왔지 재테크도 하나도 모르는 깡통이에요. 그런 제가 귀사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아니요.”
한영수는 찬란하도록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이종현을 바라보았다.
“전무님이 아니면 절대 안 되는 일입니다.”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가 한영수의 입을 넘어 이종현의 귀에 꽂히자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놀랍게도 당신이 아니면 안 된다는 소리에 이종현의 가슴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고작 자기 인생의 반토막보다 조금 더 살아왔을 것 같은 남자의 말에서 놀라울 정도로 강한 힘이 느껴졌다.
“이걸 좀 봐주시겠습니까.”
한영수는 이종현에게 자신의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휴대전화 액정화면에는 인터넷 창이 하나 떠 있었다.
“어···”
이종현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BH인베스트먼트가 고왕 건설의 지분 5.4%를 보유하게 되었다는 주식 대량 보유 보고 공시.
비로소 한영수가 무엇을 하려는지, 그리고 자신을 왜 찾아왔는지 감이 오기 시작하는 이종현이었다.
“이건 시작에 불과합니다. 전무님, 아직 집에서 쉬시기에는 이른 나이 아니십니까. 저는 전무님의 식견과 연륜을 사고 싶습니다.”
이종현은 휴대전화에 박고 있던 고개를 들어 한영수를 바라보았다.
그에 눈에 더 이상 한영수는 시시껄렁한 사기꾼이 아니었다.
한영수의 말속에 고작 모래알만 한 진심이 들어있다고 해도 좋다.
이 불가사의한 청년의 말을 한번 믿어보고 싶어지는 이종현이었다.
이종현 전무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