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이종현 전무 (1)
태상건설의 이종현 전무.
올해로 쉰다섯인 그는 27살에 이 회사에 들어와 28년간 헌신해온 자타공인 태상맨이었다.
출중한 업무능력과 원만한 성품을 가지고 있는 그는 그룹 본사로 자리를 옮길 기회가 많았지만, 끝까지 태상건설과의 의리를 지켰다.
자신의 청춘을 바쳤고, 한 가정을 일구는 발판이 되어주었으며, 동창들을 만나면 성공했다는 말을 듣게 해준.
그는 회사를 사랑했다.
그리고 순진한 소리일지도 모르지만, 회사도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었다.
적어도 그 믿음은 장영복 회장이 살아있을 때까지는 유효했다.
사람들에게 좀체 곁을 내주지 않는 독불장군 스타일.
그게 장영복 회장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도 이종현 전무는 퍽 신뢰했는지, 회사의 중요한 결정들에 대해 종종 의견을 묻곤 했다.
물론 그런 신뢰가 거저 얻어진 것은 아니었다.
2000년대 후반, 이종현 전무는 태상건설의 이름을 세계에 드높이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지금 돌이켜봐도, 그 시절을 회상하면 이 전무의 가슴은 뜨겁게 달아오르곤 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지상 165층짜리 세계 최고층 건물 ‘부르즈 알파이트’
최초 시공 당시에는 미국의 시공사 3곳과 함께였으나, 80층 이후부터는 태상건설의 단독 시공이었다.
안전과 속도, 양쪽 모두를 자신하는 태상건설의 패기가 사우디 왕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차장급 인사였던 이종현은 현지 파견팀의 핵심 실무자로 종횡무진 맹활약했다.
그가 올리는 보고서들은 팀장들이 간과했던 문제들을 달군 칼이 버터를 썰듯 날카롭게 지적했다.
하루에 서너 시간이나 겨우 잤을까 했던 시절이지만 이 전무는 일이 너무 재밌었던 나머지 피곤함조차 느끼지 못했었다.
이후 부르즈 알파이트는 2015년에 성공적으로 개장을 하였고, 미국과 유럽이 독식하고 있던 세계 도급 순위에 태상건설이 이름을 올리게 되는 발판이 되었다.
그걸 계기로 이종현은 회사안에서 승승장구였다.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적이 생기기 마련.
하지만 그는 윗사람들에게는 신뢰할 수 있는 조언자였고 부하직원들에게는 존경하는 상사였다.
누구에게 물어도 이상적이고 모범적인 회사원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상한 기류는 시작된 것은 장영수가 태상건설 회장 자리를 물려 받으면서부터였다
장영수는 회장 취임과 동시에 태상건설의 하도급 업체들에 대해 재조사를 명했으며, 그 결과로 수많은 하청 업체들이 갈려 나갔다.
그 업체 중에는 30년 넘게 일감을 주고 받아왔던 아버지와 자식 같은 관계인 회사들도 있었다.
거기까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명목상 불공정 하도급은 건설업계에서 뿌리가 깊은 잘못된 관행이었으니 그걸 바로잡자는 차원이었으니까.
하지만, 장영복 회장 사후 장은수가 휘두르는 칼은 내부를 향했다.
짐을 싸는 이들이 늘어났다.
그들 대부분은 이종현처럼 장영복 회장이 생전에 아꼈던 이들이었고, 아직 충분히 일할 수 있는 나이였다.
여기는 장은수 회장의 집무실 앞.
이종현 전무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문 앞에 서 있었다.
장은수 밑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직간접적으로 그에게 충성심을 보여줘야 했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자신의 자리를 보전받았다.
이종현 전무는 비록 그들처럼 몸을 낮추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아직은 장은수가 휘두르는 칼춤의 영역 밖에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과 고락을 함께했던 동료들이 힘없이 몇 가지 짐을 넣은 상자를 품에 안고 나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에 돌덩이가 하나씩 내려앉는 것 같았다.
이종현은 자기가 아직 회사에 남아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에게 빚을 지는듯한 기분이었다.
오늘 그는 장은수를 만나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다.
똑똑━
“들어오세요.”
문 안쪽에서 장은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회장님.”
이종현 전무는 문을 열고 들어가 저벅저벅 장은수 앞으로 걸어갔다.
이것은 겨우 몇 발자국에 불과했지만, 회장에게 가는 길이 마치 천릿길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장은수 회장은 황 실장과 함께였다.
장 회장에게 먼저 인사를 하곤 이종현은 황 실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황 실장. 회장님에게 긴히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으니, 자리 좀 비켜주겠나?”
황 실장은 잠시 장은수 회장의 눈치를 보았다.
그리곤 이종현 전무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아냐, 황 실장. 여기 있어.”
의자에 앉은 채로 책상을 손가락으로 톡톡 내리치며 장은수가 말했다.
“이 전무님. 제가 이 자리에 앉아보고 느낀 게 뭔지 아십니까?”
“글쎄요. 말씀하시면 경청하겠습니다.”
“이게, 건설업이라는 사업이 왜 이렇게 비리가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장은수의 날카로운 눈이 마치 자기를 떠보는 것 같아서 이종현 전무는 입을 다물었다.
“우리부터 투명해져야지요. 저는 밀실 행정 같은 것 딱 질색입니다. 듣는 귀가 하나라도 더 있으면 아이디어가 뭐라도 더 나올 수도 있고. 안 그렇습니까.”
“혹시라도 제가 회장님에게 결례가 되는 말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염려되어서 그랬습니다.”
이종현 전무가 다소 얼굴이 붉어진 채 말했다.
“말씀하세요. 가감 없이.”
“최근 임원진의 교체에 대한 건입니다.”
“왜 무슨 문제가 있나요?”
“지난주에 퇴사한 박 상무, 그리고 건축사업본부 문 부장도 회사에 큰 공헌을 한 인재들입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핵심 인력들이 빠져나가는 것이 심히 우려됩니다.”
장은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사람들, 모두 이 전무님 부하직원들이죠?”
꿀꺽━
이 전무의 목울대가 꿈틀거렸다.
“꼭 그래서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장은수의 고개가 황 실장을 향했다.
“황 실장. 그거 줘봐.”
장 회장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황 실장이 미리 준비라도 한 듯이 서류뭉치를 건넸다.
장은수는 무신경하게 그걸 몇 장 넘겨보았다.
“이 전무님. Y 시 아파트 단지 건설 현장 말입니다. 불량 콘크리트 건 아시죠?”
당연히 알고 있다.
이종현이 그 건에 대해 직접 장 회장에게 보고했었으니까.
아파트 하도급 업체 중의 하나가 원자재 단가를 줄이기 위해 콘크리트 반죽 비율로 장난을 쳤다.
다행히 본격적인 시공이 시작되기 전에 그걸 잡아냈고, 바로 계약 해지 및 필요한 조치를 했었다.
“예. 지금은 다른 업체로 교체를 했고, 품질검사를 이전보다 더 철저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거야, 뭐 당연한 거고···”
어이가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한번 짓는 장은수.
그는 매서운 표정으로 이종현 전무를 바라보았다.
장은수의 눈은 마치 냉혈동물처럼 번들거렸다.
“박 상무와 문 부장이라는 작자들이 그 장난질 친 업체 사장이랑 술판을 벌였던 건 알고 계십니까?”
이건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짐작가는 바가 없는 건 아니었다.
술판이라는 장은수의 말은 분명히 과장된 것이리라.
이종현은 박 상무와 문 부장의 성품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단순히 일회성으로 업무상 접대를 받았을 테고, 거기에 음성적인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었다.
애초에 그 업체의 부정을 잡아낸 것이 문 부장 아니던가.
하지만,
이미 장 회장이 저렇게 단정을 지은 이상 어떠한 말을 한다고 해도 핑계에 지나지 않으리라.
그래서 이종현 전무는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형사처벌을 받아도 모자랄 판에 퇴직금까지 넉넉히 쥐어주고 사표를 받았는데, 인사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전무님이 오히려 저는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장은수는 책상을 톡톡 치던 손을 들어 깍지를 쥐고 몸을 앞으로 숙였다.
이 전무를 바라보며, 이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추궁하는 예의 그 날카로운 눈으로.
“그런데··· 전무님은 정말 모르고 있었습니까?”
이종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가 회삿밥이 몇 년이던가.
장 회장의 말속에 숨어있는 진의를 단박에 파악할 수 있었다.
‘아아··· 칼날은 진작부터 나를 향하고 있었구나. 나만 바보같이 모르고 있었구나.’
“몰랐다면 관리책임이고, 알았다면 뭐··· 도대체 이 비리가 어디부터 시작되었을지 궁금해지는군요.”
이 전무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회사를 사랑했고, 모든 걸 바쳐 헌신해왔다고 생각한다.
정말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그것이 아무런 방패막이 되어주지 못한다는 걸, 이 전무는 처음으로 무력하게 실감했다.
이제 더 이상 여기에 내 자리는 없겠구나.
자리를 뺏기지 않겠다고 발버둥을 쳐봐야 내게 돌아오는 것은 모욕뿐이겠구나.
이 전무는 장은수의 눈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다.
“사표···”
그는 떨리는 자신의 손을 뒤로 숨기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저도 사직서 제출하겠습니다.”
*“헉!”
이종현은 거실 소파 위에서 번쩍 눈을 떴다.
소파 밖으로 늘어져 있는 그의 손에는 TV 리모컨이 쥐어져 있었다.
꿈.
태상건설을 나온 것이 벌써 4개월 전인데 아직도 매일 같이 그날의 악몽을 꾼다.
그는 거실에 걸려 있는 시계부터 확인했다.
항상 시간관념이 철저했던 그에게 있어 오래전부터 몸에 배어있는 습관이었다.
오후 2시 42분.
직장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평일 이 시간에 이렇게 나태했던 것은 처음이었다.
퇴직 후 이종현에게 갑자기 너무나 많은 시간이 생겼다.
그것은 그에게 축복보다는 저주에 가까웠다.
퇴사 후 여행도 다녀보고, 새로운 취미생활도 가져보려고 했지만 그때뿐이었다.
패배자가 되었다는 자괴감과 회사에 대한 배신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니, 무엇을 한들 즐거울 리가 없었다.
- 240채가 넘는 빌라를 사들였던 속칭 ‘빌라왕’의 사망으로 전세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피해자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이에 정부는···
텔레비전에서는 아나운서가 건조한 목소리로 뉴스를 전하고 있었다.
“어휴.”
그때, 이종현의 아내가 다가와 리모컨을 빼앗더니 텔레비전 채널을 돌려버렸다.
아내의 조작을 거역하지 못하는 텔레비전 화면은 어느새 깔깔 웃는 예능인들을 비추고 있었다.
아내는 이제 ‘건설’이라는 것과 관련된 소리만 들어도 학을 떼었다.
유례없이 낙담해 있는 남편을 한동안은 진심으로 위로했지만, 그것이 계속되다 보니 그녀도 지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내의 입에서 아직 대학 졸업도 하지 않은 딸에 대한 걱정이 시작된 것도 이맘때쯤이었다.
사실 이종현 정도 되면 그동안 모아둔 돈으로 먹고사는 것쯤이야 무슨 걱정이겠는가.
이종현의 아내는 돈을 떠나 그가 이제 그만 훌훌 털고 새 출발을 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작은 사회생활이라도 하며.
하지만 이종현은 자신이 할 일이 더는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대기업의 임원이었다는 자만 때문이 아니었다.
한 달에 300만 원, 아니 200만 원만 받더라도 다시 가슴 뛰는 일이 기다리고 있다면 얼마든지 달려갈 의사가 있는 그였다.
하지만 수십 년간 지켜오던 가슴 속의 불이 꺼져버린 지금, 그에게 다시 불씨를 댕겨줄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으리라.
25년간 큰 다툼없이 살았으니 금슬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이종현이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둘이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부부의 대화는 점점 줄어들었다.
“크흠.”
아내의 눈을 피하며 이종현이 멋쩍게 헛기침을 할 때, 휴대전화의 전화벨이 울렸다.
그는 이때다 싶어 전화기를 들고 안방으로 들어왔다.
휴대전화 액정을 보니 그가 모르는,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이종현 전무님 되시죠?”
전화기의 상대편은 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태상건설의 부하직원인가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낯설기만 한 목소리다.
“그렇습니다만··· 어디십니까.”
누구냐는 질문에 남자는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이윽고 짧은 침묵의 공백이 채워졌다.
“저는 한영수라고 합니다. 전무님을 한번 뵙고 싶습니다.”
이종현 전무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