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장은호와 한영수
명동의 한옥집.
쓱━ 쓱━
빗자루로 마당에 쌓여있는 눈들을 쓸어냈다.
올해는 전국적으로 유난히 눈이 많이 쏟아졌다.
주인을 잃은 집은 그 강설들을 온몸으로 꿋꿋이 받아내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모습이 아주 어린 시절에 보았던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천 년 동안 한 여자만을 사랑한 남자가 그 여자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장면이었다.
그 남자는 거친 눈발 속에서 무릎을 꿇고 언 채로 앞을 응시하고 있었다.
하루 시간을 통째로 빼내어 마음먹고 한옥의 정리를 시작했다.
어차피 한번은 해야 할 일이었다.
할머니의 평생이 묻어있는 곳을 마냥 방치할 수는 없는 노릇.
걸레를 빨아 바닥을 닦고, 할머니의 유품을 잘 정리해서 모아놓고, 내가 쓸 간단한 짐들을 옮겨놓고···
처음 대문을 따고 들어왔을 때만 해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막막할 뿐이었다.
하지만 일단 일을 시작하자, 두 손이 저 알아서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머릿속에 아무런 잡념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쁘지 않았다.
최근 들어, 이러다가 머리가 '펑' 하고 터져버리는 것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내가 시나리오를 하나 제시하면 앨런은 그 시나리오가 불러일으킬 나비효과들을 예측했다.
가능한 결과들에 대해 모조리 수를 짜다 보니 너무나 많은 변수가 튀어나왔다.
우리는 다시 변수에 대한 대응을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했다.
내 키만큼 쌓여있는 서류들과 그 서류 속 숫자들.
그것들에 시달리며 나는 불면의 밤을 보내야 했다.
이런 상황이니 청소를 하며 머리를 식히는 지금은 나에게 노동이라기보단 휴식에 가까웠다.
겨울 해는 짧다.
점심나절부터 시작한 집 안 청소가 끝나고 마당을 쓸기 시작했을 때는 어느새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 있었다.
어둑어둑해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마당의 비추는 등을 켰다.
사실 살면서 눈을 쓸 일이 많이 없었다.
대한민국의 평범한 남성들이라면 누구나 군대에서 경험하게 되는 극한의 제설작업.
하지만 좋아해야 할지, 부끄러워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이 나라는 나에게 그런 기회를 제공해주지 않았다.
아동양육시설에서 5년 이상 보호된 자는 병역을 면제받게 되니까.
자애 보육원에서 살던 시절에도 밤새 내린 눈이 아침이면 말끔하게 쓸려 있었다.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나중에 머리가 좀 더 굵어지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것은 아이들이 등굣길에 미끄러지기라도 할까 봐 새벽에 혼자 나와 언덕길에 쌓인 눈을 쓸어 내려갔을 신부님의 사랑이라는 걸.
비질에 밀려 눈가루들이 허공으로 퍼진다.
제로의 무게에 가까운 그것들은 비질의 움직임에 저항하지 않았다.
유순한 움직임으로 나의 가슴께까지 날아오른 그것들은 마당의 불빛이 반사되어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그리고,
이 마당에 눈을 다 쓸 때쯤이면 내가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이곳에 도착할 것이다.
“후우━”
허리를 펴고 한숨을 내뱉자 불꽃 같은 입김이 투명하게 퍼져 나왔다.
고왕 건설을 차지하는 일은 이 눈을 치우는 것처럼 걸리는 것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다만, 몸이 조금 수고스러울 뿐이지.
끼익━
코와 귀를 추위에 붉혀가며 얼마간의 시간을 마당에서 더 보내고 있을 때였다.
오래된 대문이 누군가의 방문을 알리며 낮은 신음을 내질렀다.
“영수야.”
큰 덩치에 호방한 얼굴.
고급스러운 광택이 도는 코트에 가죽장갑을 끼고 나를 향해 손을 들어 보인 남자.
그랬다.
오늘 내가 여기서 만나기로 한 사람은 장은호 회장이었다.
“형님.”
장은호는 장갑을 벗고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장갑 속에서 온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던 손을 맞잡자 힘 있는 악력이 느껴졌다.
“가만, 그사이에 키가 좀 큰 것 아니야?”
장은호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이 서른둘. 아니, 이제 서른셋이네요. 키가 컸을 리가요.”
“그래. 그렇지. 그런데 이상하게 내 눈에 그래 보여. 거인과 서 있는 기분이야.”
내가 몸이 더 자라기엔 너무 늦은 나이라는 당연한 사실.
장은호 회장은 그 사실을 처음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몇 번 끄덕거렸다.
“여기가 명동 큰손 차 여사님이 살던 집이란 말이지?”
장은호는 고개를 들어 작은 한옥의 전경을 크게 한번 둘러보았다.
“저 평상입니다.”
“응?”
“할머니가 말씀하시길 장영복 회장님이 찾아오시면 저 평상에 앉아 함께 달을 보곤 하셨다더군요.”
“··· 그렇구나.”
장은호는 저벅저벅 평상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 눈이 옅게 쌓여 살얼음 녹지 않은 평상 위에 그는 거리낌 없이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아주 오래전 장영복 회장이 그랬던 것처럼, 장은호 역시 그 자리에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형님. 날씨가 춥습니다. 들어가서 말씀 나누시죠.”
장은호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들어가자, 영수야.”
*“그 대단했다던 큰손께서 살던 곳이라기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검소하구나.”
“그런 분이셨습니다. 할머니는. ··· 그건 그렇고 형님, 오늘 혼자 오셨습니까?”
“왜? 내가 누구랑 같이 왔어야 해?”
“아니요. 일이 좀 있었습니다. 얼마 전에 저를 미행하던 사람들을 잡았습니다.”
“미행?”
장은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언제부터 저를 따라다닌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고윤아 변호사가 회사에서 석연찮은 이유로 해고를 당했더군요. 태상 쪽의 압력이라는 심증이랍니다.”
“장은수···”
장은호의 이 사이로 자기 형의 이름이 새어 나왔다.
“··· 혹시 형님께서 아시는 것이 있습니까.”
“전혀.”
장은호는 단호하게 말하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적어도 그가 나를 정말 동생으로 생각한 것도, 이런 얄팍한 수작을 부릴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형님이 모르신다면 태상 그룹 차원에서 행한 사찰은 아니겠군요.”
아차.
너무 말을 쉽게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장은호 역시 태상의 사람.
그룹 전체를 공격하는 듯한 나의 말투가 유쾌할 리 없었다.
당연히 이 일과 장은호가 무관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저 확인 차원에서 물었을 뿐.
더 이상 이 문제에 대해 거론을 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사실 내 안전에 대해 하나 부언하자면, 투자 회사를 차리면 곁다리로 적당한 경비 업체를 하나 인수하려고 마음먹은 차였다.
앞으로 내 재산을 지키기 위해선 많은 수의 사병 역시 필요할 테니까.
“형님, 일단 이걸 좀.”
자칫 자리가 불편해질까 나는 장은호에게 선물을 하나 건넸다.
사람 몸 크기만 한 인형이었다.
“이거, 사자 가족 인형이구나!”
자기 딸이 제일 좋아하는 방송의 캐릭터를 장은호는 바로 알아보았다.
“소미에게 전해주세요. 삼촌이···”
삼촌이라는 말을 내가 먼저 입에 담으니 다소 민망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제가 주는 선물이라고요. 사자 가족을 마저 같이 보기로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도요.”
“오늘 집에 가면 소미 입이 찢어지겠는걸?”
장은호는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고 나서야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네가 이 집에 눌러앉아 있다는 건··· 내가 생각하는 것이 맞을까? 네가 차 여사님의 후계자가 되었다고 말이야.”
“예. 형님이 생각하시는 것이 맞습니다.”
구태여 그에게 숨길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것은 다름 아닌 장은호 회장이었으니까.
내 말을 듣더니 장은호 회장의 표정이 묘해졌다.
웃는 것인지, 화가 난 것인지, 혹은 우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얼굴.
어쩌면 나를 자랑스러워하는 기색도 조금은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예전에 제가 형님께 말씀드린 적이 있었죠? 그냥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조용히 살고 싶다고. 하지만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장은호 회장은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눈을 통해 말보다 더 진하게 속삭이고 있었다.
어디 너의 포부를 말해보라고.
“저만의 왕국을 만들 생각입니다. 남은 삶 동안 제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시험해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오늘 형님을 뵙자고 한 것도 그것의 일환입니다.”
“이것 참. 난 네가 먼저 연락했기에 연초라고 나한테 인사라도 하겠다는 줄 알았지.”
“당연히 그 이유도 있지요. 하지만, 한 가지 일에 한가지 의도만 가지는 건 제 스타일이 아닙니다.”
“아주 능구렁이가 다 되었구나! 그래,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형님. 저는 ··· 형님을 사고 싶습니다.”
“나를 사?”
얼토당토않은 소리에 장은호 회장의 눈이 똥그래졌다.
재계 서열 1위 태상 그룹의 후계자이자, 국내 최대 자동차 기업의 회장인 자신을 사겠다니?
장은호 회장의 머릿속에는 단박 이 생각부터 떠올랐을 것이다.
내 짐작이 많이 틀리진 않는지 장은호의 입에서 우레같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는 그가 마음껏 웃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래. 나를 사서 어디에다가 쓰겠다는 거지? 아니, 그 이전에 얼마를 쳐줄 생각이니? 내 몸값으로.”
“저는 형님께서 간절히 원하는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의 제안을 형님이 거절하지 못할 거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내가 농담 따위를 하고 있다는 게 아니란 걸 깨달은 장은호.
그의 웃음이 멈추자 팽팽한 긴장감이 우리 둘 사이에 자리 잡았다.
“할머니의 유산 중에는 태상건설의 지분도 있습니다.”
장은호 회장의 잘생긴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아직 내가 선재 장학회의 이사장 자리에 올랐음을 모르는 것이 틀림없었다.
“5.6%입니다. 대세를 흔들기에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허━
장은호의 입에서 한숨 같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형제의 정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를 확실한 동맹으로 잡아놓기 위해서는 강력한 한방이 있어야 했다.
“언젠가 형님에게 이 지분이 필요할 때 백기사가 되겠습니다. 어떻습니까? 거래해볼 만하지 않습니까?”
“··· 오늘, 네 키가 유난히 커 보였던 이유가 있구나. 내가 환장할 만한 당근을 쥐고 있어서 그랬어.”
장은호 회장이 두 눈을 감았다.
판이 180도 달라졌다.
예전에 장은호 회장이 그의 무대에 나를 올리려고 애를 썼다면, 이젠 내가 그를 나의 전장에 끌어들일 것이다.
“좋다. 그것만큼 나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없지. 싸게 값을 치르진 않겠다. 그럼 너는 내게서 뭘 원하지?”
“저도 이제 돈은 아주 많습니다. 그렇다면 돈보다 더 귀한 걸 요구해야겠죠. 형님의 숙원을 이루는데 바탕이 될 것이니 저도 앞으로 많은 것을 바라게 될 겁니다.”
하하하━
못 당하겠다는 듯 장은호가 호탕하게 웃었다.
“일단 오늘은 작은 부탁 하나만 하고 싶습니다. 형님이 말씀하시길, 장은수 회장이 선친이 별세하시고 사람들을 쳐내는 작업을 제일 먼저 했다고 하셨죠.”
“그랬지.”
“그렇다면 그들 중에는 분명히 태상건설의 중역들도 있겠군요.”
굳이 말해봐야 입만 아프다는 듯 장은호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들의 명단을 좀 구해주세요. 특히 오늘날 태상건설의 끈끈한 중동커넥션을 만드는데 이바지를 했던 사람들 중심으로요.”
“그거야, 어렵지 않은데··· 그걸 어디에 쓰려고?”
고왕 건설을 인수하게 되면 위에서부터 대대적인 물갈이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건설업계가 어디 그렇게 만만한가.
초짜에 불과한 내가 고름을 짜내겠다고 어쭙잖게 칼을 빼 들었다가 오히려 병증을 악화시킬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한때 최고의 자리에 있었던 전문가들을 불러들일 생각이었다.
연륜과 경험을 충분히 갖추고 있는.
거기에 태상건설에 복수의 칼을 갈며 기회만 엿보고 있는 이들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나는 장은호를 향해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며 입을 열었다.
“지금은 말씀드리기 이릅니다. 아마··· 조만간 알게 되실 겁니다.”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