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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억을 상속받았다-89화 (89/200)

89. 강남 구 회장 (2)

구동일을 이사진에 합류시키겠다.

명백한 목적이 있는 나의 한 수였다.

입으로는 구동일을 담았지만, 총구의 방향은 따로 있었다.

나의 가늠쇠는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겨누고 있었다.

구 회장을 옆에 세우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큰 굿판을 벌여 푸닥거리를 한다고 한들, 구 회장 같은 거물이 애송이에 지나지 않는 나에게 머리를 숙이고 들어올 리가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제 자식을 부둥켜안고 눈시울을 붉히던 그의 부정(父情)에 기대해보기로 했다.

그 부정을 건드리면 구 회장을 내 편으로 만들 수도 있다는 계산이 있었다.

“오늘 회장님을 뵈러 와서 알게 된 거지만, 아드님은 이제 정신적으로 완전히 각성한 것 같더군요. 그럼 이제 세상 돌아가는 법을 배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큰 판이 벌어질 건데 아드님을 위해 제일 좋은 자리를 비워놓겠습니다.”

하하하━

구 회장은 거실이 떠나가라 크게 웃었다.

“자네, 정말 영리하군. 위험할 정도로 영리해. 그런 방법으로 나를 움직이겠다는 건가?”

나는 굳이 그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구 회장 정도 되는 사람이 내 잔머리를 눈치채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다만 이 비장의 한 수는 예쁘게 포장된 선물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구 회장이 열어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내 아들을 볼모로 자네가 만든 판에서 날 발을 빼지 못하게 하겠다?”

“나중을 대비해서 아드님을 위한 후계자 수업의 일환이라고 생각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입이 풀리기 시작하니 말이 거침없이 나왔다.

나의 당돌함에도 구 회장의 얼굴에 불쾌한 기색은 없었다.

“··· 정말 자신 있는가? 과욕을 부리다가 배가 터질 수도 있어. 영수 군, 우리 아들이랑 동갑내기지? 내가 자식 같아서 해주는 충고야.”

“딱 한 번입니다.”

“··· 응?”

“회장님 정도 되는 분께 제가 무언가를 당당히 요구할 수 있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일 거란 말씀입니다. 자신이 없었다면 애초에 이 한번을 허무하게 쓰지 않았을 겁니다.”

당신은 나와 약속했다.

나의 부탁을 꼭 들어주기로.

나는 그 약속을 상기시키는 차원에서 에둘러서 말했다.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던 구 회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 하지만 문제가 있어.”

“어떤 문제 말씀이십니까.”

“이 사람아! 동일이 그놈이 하겠다고 승낙을 해야지.”

옳지. 됐구나.

“부자간에 극적인 화해가 불과 얼마 전 아닙니까. 아드님은 회장님의 말씀이라면 아마 귀담아들을 겁니다.”

“그래, 자본금은 어떻게 끌어 쓸 생각인가.”

“나중에야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90% 이상 제 지분으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만약 일이 잘못되어도 아드님께 피해가 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허! 자네라면 일이 잘못되기 전에 나를 탈탈 털고도 남을 사람 같은데?”

나는 말없이 빙그레 웃었다.

구 회장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입을 열었다.

“명색이 아비가 되어서 아들을 빈손으로 보낼 수야 없고. 자네가 90 가져가. 나머지 10은 내가 채우도록 하지.”

“청자를 선물로 드리려고 했는데, 제가 너무 비싼 값을 받아 가는 것 같습니다.”

"이 사람, 말재주하고는. 천하의 구기욱이가 새파란 젊은이에게 속절없이 강매를 당해버렸구먼."

구 회장의 참전 선언이었다.

이로써 나는 천군만마를 얻은 셈이다.

그뿐인가, 아까 더 생각해보겠다고 말을 했지만, 이걸로 구 회장과 윤일중 회장의 관계는 마침표를 찍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아드님의 합류 시점은 제가 고왕 건설 경영진과 접촉한 이후로 하겠습니다.”

“비장의 카드는 숨겨놓겠다는 거로군.”

대화가 물 흐르듯이 술술 통한다.

“그럼 이제 세 가지 중의 하나가 남은 건가? 마지막으로 나에게 할 말은 뭔가?”

“이건 최 사장이 할 일입니다. 회장님은 알고만 계시면 됩니다.”

“자네, 최 사장도 끌어들인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고민을 조금 했습니다. 하지만 이익이 있는 곳이라면 등을 돌릴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최 사장이 보통이 아닌데. 잘 다룰 수 있겠나?”

“만약 문제가 있다면 회장님께서 중재해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허허! 아주 이중 삼중으로 안전장치를 만들어놓는구먼.”

“신중함은 아무리 지나쳐도 넘치지 않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구 회장은 좋군. 아주 좋아. 라며 혼잣말을 뱉었다.

지루했던 랠리가 계속되던 핑퐁 게임에서 마침내 내가 승기를 잡았다.

“그래. 그럼 내가 알고 있어야 할 것이 뭔지 이제는 이야기해 주겠나?”

“회사채 인수 거절에 몸이 달 대로 달은 윤일중 회장은 반드시 최화란 사장을 찾아갈 겁니다. 그리고···”

나의 이야기가 얼마간 이어졌다.

모든 것을 털어놓고 입을 다물자 구 회장의 동공이 크게 벌어졌다.

“자네. 도대체 몇 수 앞까지 내다보고 있는 건가!”

“지켜보는 재미가 있으실 겁니다. 과연 설계한 대로 시나리오가 진행될지.”

그리고, 그때였다.

길었던 대화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아버지! 저 다녀왔습니다.”

현관문을 열고 구동일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녀석은 나와 있던 시절보다 훨씬 얼굴이 좋아져 있었다.

건설 현장에 매여 등짐을 지느라 까무잡잡하게 탔던 피부도 원래 제 색깔을 찾았고.

하지만 건강한 생활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지 체격은 오히려 더 좋아져 있었다.

“어··· 한영수, 너!”

“구동일. 오랜만이다.”

구동일은 반가움과 놀람, 그리고 약간의 경계가 섞인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아버지, 이 친구가 여기를 무슨 일로···”

“응. 그게 말이지···”

구 회장은 팔을 뻗어 그를 마주 보고 앉아있는 내 어깨에 손을 턱 올렸다.

“영수 군이 이 애비와 너에게 제안을 하나 하더구나. 너와 같이 일을 하나 해보고 싶다고. 애비는 네가 영수 군의 제안을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예에?”

구동일의 입이 떡 벌어졌다.

“야, 나 이제 정말 열심히 살고 있다고! 아버지, 뭐라고 말 좀 해주세요.”

안절부절못하며 나와 구 회장을 번갈아 바라보는 구동일.

그 모습을 도저히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었던 우리 둘은 껄껄 큰 웃음을 터트렸다.

*밖이 시끄럽다.

‘올 것이 왔구나.’

최화란은 책상 위에 놓여있는 거울을 보며 입술에 붉은 립스틱을 한 번 덧발랐다.

그것은 그녀에게 중요한 일이 있기 전 의식처럼 행하는 일이었다.

마치 전쟁터로 나가는 무사가 갑옷을 챙겨입듯.

“이봐, 최 사장!”

“어머. 회장님 오셨어요?”

문을 박차듯 열고 들어온 것은 윤일중 회장이었다.

그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구 회장님 말이야. 갑자기 이러시는 것이 어디 있나. 마음이 바뀌셨다니!”

“회장님. 일단 진정하시고 여기 앉으세요.”

최화란은 눈웃음과 함께 교태 넘치는 목소리로 윤 회장을 응접용 소파로 안내했다.

하지만 그녀의 애교 따위는 관심도 없다는 듯 소파에 궁둥이 붙이고 앉아서도 윤일중은 계속 씩씩대기 바빴다.

“지금 당장 전화를 드리게. 내가 뵈러 가겠다고.”

“회장님. 아시잖아요. 미리 정해지지 않은 약속에는 절대 응하시지 않는 거.”

“이봐 최 사장! 자네는 일개 심부름꾼이야. 내가 지금 최 사장이랑 입씨름이나 하고 있어야겠어?”

윤 회장은 평정심을 완전히 잃은 상태였다.

이것은 그가 평소에 보여주던 호인의 모습이 얼마나 얄팍한 것이었는지 보여주는 방증이기도 했다.

그에 비해 최화란은 여유만만이었다.

자신을 비하하는 그의 말에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어차피 이제부터 그녀의 모습은 모두 연기.

배우가 최화란이라면 감독은 한영수였다.

그녀는 그저 한영수가 준 대본대로 따르기만 하면 된다.

“저라고 왜 윤 회장님을 돕고 싶지 않겠어요. 마음이야 굴뚝 같아도 구 회장님에겐 규칙이란 게 있어요. 그 규칙을 회장님의 말마따나 일개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는 이 년이 어떻게 어기겠어요.”

“하이고··· 이것 참.”

최화란은 윤 회장 앞에서 몸을 납작 엎드리는 시늉을 했다.

그녀의 약한 모습을 보자 더 이상 주먹을 휘두를 곳이 없어진 윤 회장은 한숨만 픽픽 내쉬었다.

“저도 몇 번이나 말씀드렸어요. 하지만 구 회장님의 의지가 확고하시던걸요. 그래도 저 섭섭하네요. 제가 회장님을 위해서 큰일 하나 한 것은 모르시죠?”

“무슨 큰일?”

윤일중 회장은 고개를 들어 최화란을 바라보았다.

“추가 자금이 뭐예요. 회장님 고왕 건설에 묻어두었던 돈들까지 전부 회수하실 생각이셨어요.”

“뭐···?”

구 회장이 쥐고 있는 고왕 건설의 채권이 물경 2,800억.

만약 그 돈을 회수한다면 가뜩이나 극심한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는 고왕 건설로서는 비수가 제대로 날아와 꽂히는 격이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윤 회장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 그··· 그래서.”

윤일중 회장은 말까지 더듬기 시작했다.

불안하게 떨리는 그의 눈은 자신의 나약한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이건 게임이 안 된다.

가뜩이나 불리한 상황에 부닥쳐있는 윤일중 회장은 멘탈까지 제대로 건사 못하고 있었다.

가면을 쓰는데 능한 최화란이 요리를 못 할 이유가 없었다.

“전환권을 행사하시기로 했어요. 주주의 신분으로 당분간 고왕 건설을 지켜보기로 결단을 내리셨어요.”

전환권 행사!

채권의 상환을 고왕 건설의 주식으로 대신하겠다는 소리.

윤 회장은 빠르게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돌려보기 시작했다.

고 회장과 약정을 맺던 시점에 전환권을 행사할 시 1주당 액면가를 12,000원으로 계산해주기로 했었다.

현재 고왕 건설의 주당 가격에 대비하여 어림잡아 계산해보자면 고 회장이 가져갈 지분은 대략 14% 아래.

얼추 계산이 끝나자 윤일중 회장의 희망 회로가 야심 차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래. 어차피 유상증자하려고 했지. 전환권 행사도 신주를 발행해야 하니, 유증이랑 다를 게 없어. 당장 현찰을 내놓으라는 건 아니니까 나쁠 것 없지.’

“최 사장, 이 사람아 나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조금 전까지만 해도 돈을 안 빌려준다고 씩씩대던 그였다.

조삼모사와 다를 것 없는 소리임에도, 당장 돈을 안 갚아도 된다는 생각에 표정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고왕 건설의 저력을 높게 평가하시는 구 회장님의 판단이셨습니다.”

“암. 회장님과 내가 인연을 맺은 세월이 얼마인데. 전환권을 행사하면 이제 구 회장님도 우리 식구나 다름없지 않나. 어떻게 보면 반갑기까지 한 소식이구만!”

속 편한 소리를 하는 윤 회장.

‘저렇게 태평한 양반이 다 있을까. 오야가 저 모양이니, 밑에 직원들만 고생하고 있겠어.’

최화란은 속으로 조소를 금할 수 없었다.

윤일중 회장은 지금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었다.

구 회장이 당연히 자신의 편에 설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

그 믿음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알게 되었을 때 윤일중 회장의 표정이 어떨까?

최화란은 그걸 직접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아랫배가 근질거리기 시작했다.

“회장님, 진정하시고 오늘은 이만 들어가셔요. 구 회장님으로부터 따로 추가로 언질을 받으면 비서실을 통해 연락을 드릴 테니까요.”

으흠━

헛기침을 한번 한 윤 회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하하! 그래. 최 사장, 이거 내가 아까는 미안했어. 말이 좀 섭섭했지?”

“어머, 회장님. 별말씀을요. 괘념치 마세요. 틀린 말씀 하신 것도 아닌데요.”

“내가 요즘 마음이 조급해서 그래. 못난 모습 보여서 미안해. 자네가 이해 좀 해줘.”

“아무렴요.”

뒤늦은 대인배 흉내를 내며 윤일중 회장은 손을 흔들고 최화란의 방을 나섰다.

그가 나가기 무섭게 최화란의 얼굴에서 내내 떠나지 않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한영수··· 이 괴물 같은 놈.”

모든 것은 미리 내다보기라도 한 듯 한영수가 예상한 그대로였다.

- 이제 열차가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도 궤도에 올라선 이 열차를 멈추지 못할 겁니다.

최화란은 한영수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짜릿함과 함께 등줄기에서 소름이 오소소 돋아나는 그녀였다.

장은호와 한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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