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0억을 상속받았다-88화 (88/200)

88. 강남 구 회장 (1)

구 회장.

최화란에게 들은 이야기이다.

올해로 67세인 그의 본명은 구기욱.

들리는 풍문에는 지금 깔고 있는 재산만 10조는 거뜬히 넘을 거라고 한다.

그는 16살이 되던 72년도에 고향인 경상도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연고 하나 없는 서울에 올라와 그가 처음으로 한 일은 구두닦이와 막노동.

그 시절 구 회장은 하루에 세 시간 남짓 자는 생활을 반복하며 허리띠를 졸라매고 정말 억척스럽게 살았다고 한다.

구 회장은 그 어린 나이에도 반드시 큰돈을 벌겠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기왕지사 서울로 올라온 김에 그는 대한민국에서 제일 돈이 많이 모이는 곳을 거점으로 삼기로 했다.

그렇게 선택한 곳이 다름 아닌 명동.

당시만 해도 증권거래소가 명동에 있었고, 구 회장은 양복쟁이들의 구두를 광이 번쩍번쩍 나게 닦으면서 그들이 하는 말을 단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 노력을 했다.

그리고 구 회장은 주식이라는 생소한 세계에 대해 어깨너머로 듣게 된다.

경제 성장의 격동기였던 70년대.

상장 주식이라고 해야 몇 종목이 채 되지도 않았고, 거래량마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주가가 정신이 나간 것처럼 급등락을 반복하던 때였다.

가진 돈을 10배는 불린다는 그 마법 같은 세계에 구 회장은 온 정신이 매료되었고, 자기 집처럼 증권거래소를 들락날락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구 회장은 복희 할머니가 그랬듯이 70년대 말, 건설주의 광풍을 타고 큰돈을 벌 수 있었다.

하지만 구 회장을 지금 그를 부르는 별칭인 ‘강남 현금왕’으로 만들어준 건 주식이 아니었다.

바로 땅이었다.

그는 주식투자로 번 돈으로 서울과 수도권 일대의 땅을 닥치는 대로 사들이기 시작했다.

앞날을 내다본 혜안일 수도 있고, 찢어지게 가난했던 소작농의 자식이었다는 과거에 대한 보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유가 무엇이었건, 그의 선택은 정말 훌륭했다.

80년대에 강남의 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아파트들이 우후죽순 세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미 서울에 들어오려면 구 회장의 땅을 밟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대지주가 된 그는 주식으로 벌어들인 것이 새 발의 피처럼 느껴질 만큼 돈벼락을 맞게 된다.

IMF 시절 달러 환치기 수법으로 또 한 번 짭짤한 이득을 본 그는 인생 말년이 막 시작된 지금까지 현역으로 활동하며 정재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다만 구 회장은 이제 더 이상 전면에 나서지 않고, 최화란 같은 집사들을 하수인으로 두고 있었다.

어지간한 기업의 회장들도 구 회장을 만나기 위해서는 집사들을 통해야만 했으니, 우연히 구 회장과 인연이 닿은 나로서는 그야말로 행운이 따랐다고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최화란이 잡아준 구 회장과의 독대.

나는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넓은 한옥 마당을 가로질렀다.

머릿속으로 구 회장을 만나 할 말들을 복기하면서.

중요한 자리인 만큼 평소와 달리 최고급 슈트를 한 벌 빼입고 이곳에 왔다.

의복이라는 것은 사람의 인상을 결정하는 데 많은 역할을 한다.

오늘 나는 구 회장에게 골칫덩이 아들을 갱생시켜준 해결사가 아니라 야심과 포부가 넘치는 투자자로 보여야 한다.

“영수 군! 어서 오시게!”

구 회장은 두 팔을 벌려 나를 환대했다.

내가 그에게 억만금보다 값진 것을 베풀었기에 나오는 반응.

“회장님. 오랜만에 인사 올립니다.”

“그래, 어서 들어오게나.”

“회장님을 뵈러 오는데 도저히 빈손으로 올 수가 없어 선물을 하나 가지고 왔습니다.”

나는 미리 준비해두었던 도자기를 하나 그에게 내밀었다.

일전에 구 회장의 집을 최화란과 함께 방문했을 때 집 안 곳곳에 장식된 자기들을 보았었다.

그렇게 그의 취향을 확인했기에 복희 할머니가 내게 남기신 양평의 창고에서 가져온 물건이었다.

“어허! 자네라면 언제든 두 손 들고, 환영이지. 그런데 가만 보자 이거···”

구 회장은 코에 걸쳐져 있던 돋보기안경을 올려 썼다.

도자기를 유심히 보느라 그의 눈썹 사이가 좁혀졌다.

“청자로구먼! 이거 고려시대의 양식을 이어받은 거 보니 아주 오래되고 귀한 물건이야.”

“17세기에 만들어진 진품입니다. 혹여라도 구 회장님에게 실례가 되는 일이 없도록 인사동 화랑들을 돌며 감정을 받은 물건입니다.”

“아니, 자네. 이렇게 귀한 걸 나에게 줘도 되는가?”

말은 그렇게 하면서 구 회장은 영롱하게 푸른빛을 띠는 청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보다는 당연히 가치를 아시는 분에게 있는 것이 맞겠죠.”

“이 사람. 허허!”

구 회장은 청자도 나도 예뻐죽겠다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이리로 오게. 와서 앉지.”

구 회장은 나에게 다정하게 손짓했다.

“그건 그렇고, 아드님은 댁에 안 계신 모양입니다.”

“응. 동일이 고놈 말이지?”

구 회장의 얼굴에서 웃음이 마르지 않는다.

아들 이야기를 하자 뿌듯해하는 표정이 눈에 띄게 도드라졌다.

“놀라지 말게. 지금 그놈 그 곰방이라고 하던가? 등짐지는 거 말이야. 거기 나가 있어.”

“··· 예?”

놀라지 말라고 했지만, 뜻밖의 소식에 입이 벌어졌다.

돈이 아쉬워서는 절대 아닐 것이고 구동일이 왜?

“일주일에 한두 번은 제가 알아서 나가더군. 아들놈이 나에게 뭐라고 했는지 알아?”

“글쎄요. 짐작이 전혀 안 갑니다. 회장님.”

“하하하!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예전의 나태했던 자기로 금방 돌아갈 것 같다고 하는 거야. 힘들었던 시절을 잊지 않으려고 그런다고 하더라고.”

구 회장의 목소리에는 제 아들을 자랑스러워하는 애정이 듬뿍 담겨있었다.

골칫덩이 천둥벌거숭이를 향해 진노를 쏟아내던 그는 더 이상 없었다.

구동일에게 매섭게 회초리를 휘둘렀던 나 역시도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정말 잘되었습니다. 이제야 회장님이 마음을 한시름 놓으시겠군요.”

“다 자네 덕분이지. 우리 부자가 영수 군에게 큰 은혜를 입었어.”

구 회장은 자글자글하게 웃으며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그래. 오늘은 뒷방 노인네한테 말벗이나 해주겠다고 온 건 아닐 테고. 어쩐 일인가?”

“회장님. 제가 복희 할머니를 모셨다는 사실은 알고 계실 겁니다.”

복희 할머니의 이름이 나오자 구 회장의 낯빛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암. 알고 있지. 어르신 부고는 전해 들었어. 못 가봐서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네. 내가 원체 어디다 얼굴을 내미는 걸 싫어해서 말이야. 최 사장을 통해서 부조는 성의껏 했네.”

알고 있다.

구 회장이 무려 천만 원을 조의금으로 냈었다.

“할머니 앞으로 들어온 조의금은 전부 고인을 기리는 뜻에서 어려운 사람들에게 기부했습니다.”

“그래. 훌륭하구만. 아마 어르신께서도 틀림없이 잘했다고 하실 걸세.”

구 회장은 손바닥으로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무릎을 두어 번 탁탁 내려쳤다.

“복희 할머니께서는 당신이 일구신 재산을 모두 저에게 남기고 가셨습니다. 증여의 과정에서 세금으로 일부 손실이 되었지만, 적지 않은 돈입니다.”

“어르신께서 자네를 정말 이뻐하신 모양이군. 뭐, 그래 자네라면···”

“고인 물은 썩는다고 했습니다. 저는 할머니의 유산을 가만 놀리지 않을 생각입니다. 전문 투자 회사를 차리려고 합니다.”

구 회장의 눈빛이 일순 날카로워졌다.

아들 이야기에 사람 좋아 보이던 그의 얼굴은 온데간데없었다.

작은 체구의 그가 거인처럼 보인다.

이런 게 아우라라는 것일까.

그렇다고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나는 오늘 여기에 승패를 나누지 않는 싸움을 하러 온 것이니까.

구 회장과 나에게 모두 득이 되는.

정공법.

나는 구 회장이라는 굳건한 성문을 열어젖히기 위해 돌아가지 않고 당당하게 문을 두들기는 방법을 택했다.

복희 할머니를 이야기한 것은 구 회장에게 두 가지 암시를 주기 위해서였다.

내가 큰일을 벌일만한 깜냥이 되는 돈이 있다는 사실과 복희 할머니가 후계자로 선택할 정도로 가치가 있는 인간이라는 걸.

“그래. 어르신이나 나나 똑같을 걸세. 우리는 돈이 아니라 사람을 먼저 보니까. 자네가 보통내기가 아닐 거란 생각은 진작부터 하고 있었지.”

“예전에 회장님께서 저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 중 해줄 수 있는 것은 모두 해주시겠다고.”

“암, 내 분명히 약속했지. 그래서 얼마인가. 액수를 말해보게나. 자네가 차린다는 회사에 얼마나 보태주면 되겠어.”

“아닙니다. 잘못 아셨습니다. 제가 원하는 건 회장님의 돈이 아닙니다.”

“하면?”

“제가 원하는 것은 세 가지입니다. 그리고 모두 회장님께서 해주실 수 있는 것들입니다.”

하하하━

구 회장의 파안대소.

“이 사람, 욕심도! 내가 한 가지만 들어준다고 하지 않았나?”

“그 세 가지가 결국 하나의 목표를 향하고 있으니, 결국 한 가지라고 보셔도 될 겁니다.”

“그래. 어디 들어나 보자고.”

“단도직입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고왕 건설의 윤일중 회장이 구 회장님께 자금 융통을 요청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걸 반려해주셨으면 합니다.”

구 회장의 콧잔등이 꿈틀거렸다.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자네··· 설마. 그 투자 회사라는 걸로···”

“예. 바로 아셨습니다. 저는 고왕 건설을 사들일 생각입니다.”

“이보게. 내가 고왕 건설과 연을 맺은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야. 그런데 자네의 말 한마디 때문에 그들의 등에 칼을 꽂으라고?”

“건설업에 대한 회장님의 애정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회장님을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이걸 한번 봐주시겠습니까?”

매년 줄어들고 있는 영업이익, 반대로 늘어나고 있는 부채.

나는 앨런이 미리 준비해준 보고서를 펼쳐놓고 숫자가 말하는 고왕 건설의 위기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채권단 중에서는 벌써 발 빠르게 자금 회수에 나선 곳들도 있습니다. 본인들이 뿌려놓은 어음을 반절도 소화하기 힘든 실정입니다.”

구 회장의 입에서 끙하며 앓는 소리가 나왔다.

“윤일중 회장이 얼마를 원했습니까.“

“2천억이야.”

“당연히 일정 금리를 약속하는 회사채 방식이었겠죠?”

구 회장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보다 더 잘 아실 거로 생각합니다. 외환위기의 신호탄이 된 한보그룹 사태 말입니다. 재계 서열 10위권을 다투던 한보그룹이 마지막에 겨우 50억의 어음을 막지 못해 도산했던걸요. 지금 고왕 건설이 회사채를 남발하는 꼴이 딱 그 짝입니다. 이래도 알고 지낸 세월에 연연하시겠습니까?”

나의 말에 구 회장은 아무런 반박을 하지 못했다.

“저도 제 능력의 한계를 알고 있습니다. 고왕 건설을 가지게 되면 소유와 경영을 철저하게 분리할 생각입니다. 이후의 확실한 계획도 있습니다. 회장님께서는 이미 고왕 건설에 묶여있는 돈도 상당하실 텐데요.”

구 회장의 입술이 일자로 굳게 다물어졌다.

“그 돈들도 제가 살려내겠습니다. 회장님의 호의를 방만한 운영으로 헛되게 사용한 지금의 고왕 건설은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네 말이 사실이라면···”

잠시 뜸을 들이는 구 회장.

그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내가 이 자리에서 자네에게 확답을 줘야 하는 건 아니지 않나. 나도 좀 더 알아봄세.”

“물론입니다.”

구 회장은 틀림없이 나의 뜻대로 움직이게 될 것이다.

의혹이라는 놈은 잡초와 같아서 한번 생기면 아무리 뽑아내도 다시 자라나기 마련이니까.

더욱이 나는 구 회장에게 지금 거짓으로 말한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자, 그럼 두 번째는 뭔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이야기가 훨씬 거대하구만. 이거 겁나기 시작하는데?”

“두 번째는 아드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 아들?”

구 회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

나는 양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아드님을 제가 간판을 내걸 투자 회사의 이사로 초빙하고 싶습니다.“

강남 구 회장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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