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각자의 속내
해가 바뀌었다.
시간은 장님과 다름없다.
부자나 빈자를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똑같이 흘러가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시간이 가지고 있는 가치까지 모두에게 똑같다는 소리는 아니다.
세계적인 재벌 빌 게이츠의 1초와 노량진 학원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박 모 군의 1초의 값이 같을 리가 없다.
경기도 용인의 모처.
오늘 이곳에는 대한민국에서 누구보다도 시간에 비싼 돈을 치르며 살고 있는 이들이 모여 있었다.
경제면에 이름을 흔하게 오르내리는 재벌가들의 신년 모임.
주차장에는 최고급 세단들이 줄을 이어 끝없이 도열하고 있었다.
“회장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래. 자네 그룹 작년 영업이익이 대박이 났더구먼. 재미 좀 봤겠어.”
“아이고, 회장님. 코로나 시국 특수로 재미 좀 본 거지, 요즘에는 아주 죽을 맛입니다. 은행 놈들에게 번 돈 다 가져다 바치고 있어요. 그나저나 어디 자금 융통할 만한 곳이 없습니까?”
내로라하는 기업의 정점에 서 있는 이들이 모여 샴페인 잔을 부딪치며 외교적인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일면, 귀족들의 사교 모임처럼 보이는 이 자리였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음모와 정치질이 도사리고 있었다.
고급스럽게 포장을 하고 있었지만, 결국 이들의 대화 주제는 돈이었다.
신년을 축하하는 덕담 속에는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비정한 돈의 세계에서 사냥꾼이 아니라 먹잇감이 되고 말리라는 긴장감이 도사리고 있었다.
당연히 이 자리에는 재계 1위인 태상의 자녀들도 참석해 있었다.
“은호야. 올케는 요즘 뭐해?”
“우리 집사람? 애 보고 있지.”
“그래? 소미 많이 컸겠네.”
“한바탕 비 오고 난 뒤의 꽃처럼 자고 나면 쑥쑥 커 있지.”
딸의 이야기가 나오자 장은호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에 반해 장은우의 얼굴은 찬바람이 돌 듯 차갑기만 했다.
태상의 얼음공주.
그게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장은우의 별명이었다.
그녀는 오프숄더 블라우스를 입고 팔짱을 끼고 있었다.
태상 백화점의 주인인 장은우의 목 아래로 쇄골뼈가 두드러졌다.
그 쇄골뼈는 이미 불혹을 한참 넘어선 그녀가 얼마나 몸 관리를 잘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단면이었다.
“이번에 브랜드 런칭이 있어. 백화점 본점에서. 올케도 한번 와서 얼굴 비추라고 하지?”
“누나도 알잖아. 우리 와이프 그런 거에 관심 없는 거.”
“··· 그런 거?”
동생의 단어 선택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장은우의 얼굴에 불쾌함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싫든 좋든, 재벌가에 시집을 왔으면, 자기가 해야 할 의무가 있는 거야. 우리가 보통 사람들과 같아?”
“글쎄··· 세끼 밥 먹는 건 누구나 다 똑같지 않나?”
“밥을 몇 번 먹는 것보단 어떤 걸 먹느냐가 중요하지. 이거 봐.”
장은우는 팔짱을 풀고 휴대전화를 꺼내더니 장은호의 얼굴 앞에 화면을 들이대었다.
SNS였다.
“뭐야, 누나 인스*그램도 해?”
“설마.”
“그런데 다 이거 누나 사진이잖아.”
“나쁘게 말하면 사칭이고, 좋게 말하면 팬 페이지지.”
기업인이 연예인도 아니고 팬 페이지라니.
장은호는 속으로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의 눈에 SNS의 팔로워 숫자가 들어왔다.
무려 천만 명을 훌쩍 넘는 숫자였다.
“그런데 이거 법적으로 문제 있는 거 아냐?”
“뭐. 게시물 올린 사람이 팬 페이지라고 명시하고 있고, 이미지 좋게 세탁하는데도 도움이 되고. 그것보다 사람들이 남긴 댓글 좀 봐봐.”
- 존경합니다! 장은우 사장님 미모는 오늘도 열 일 하시네요.
- 제 롤모델이에요.
- 사장님. 대한민국 경제를 지켜주세요!
게시글의 수많은 댓글은 모두 장은우를 신적으로 찬양하고 있었다.
무슨 종교집단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누나 계정도 아니고 팬 페이지라는 거 안다면서 다들 왜 이래.”
장은호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손에 쥐고 있던 휴대전화를 장은우에게 돌려주었다.
“자기들이 평생 닿을 수 없는 자리이니 이렇게라도 대리만족을 하는 거지. 알겠어? 우리는 이 사람들에게 환상 속 유니콘 같은 존재라고. 어떻게 우리가 저들과 같을 수가 있겠어.”
‘··· 그래. 그리고 여기 모인 사람들 대부분은 무슨 사고라도 터지면 휠체어에 앉아 링거 맞는 연기로 그 사람들을 기만하고 말이야.’
장은호는 자신의 누나가 가지고 있는 선민의식과 오만함에 한소리를 하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신년 아닌가.
핏줄을 나눈 사이끼리 얼굴 한번 제대로 보기도 힘든데 정초부터 날이 선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나저나 넌 어떻게 할 거야?”
“뭘 어떻게 해?”
“뭐긴 뭐야. 그 대단하신 태상의 총수 자리 말이지.”
장은호는 누나의 대범한 발언에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누나. 말조심하자. 특히 여기서는.”
“둘이 어디 한번 피가 터지게 싸워봐.”
장은우는 코웃음을 치며 샴페인 잔을 입에 대고 기울였다.
“오빠랑 네가 열심히 싸울수록 나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올라갈 테니까 말이야.”
장은우는 입으로는 동생에게 말을 하며, 눈은 저 멀리서 고왕 건설 윤일중 회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장은수를 향했다.
“장 회장. 벌써 선대인(先大人)께서 별세하신 지 반년이라니··· 믿기지 않는구먼.”
“예. 저도 아버지가 남기신 중책을 이어받으려니 어깨가 무겁습니다.”
장은수는 윤일중과 의례적인 인사말을 나누고 있었다.
“선대인은 이 대한민국 경제의 등뼈 같은 분 아닌가? 오늘도 이 모임의 수장 자격으로 자리를 지키고 계셨어야 하는데···”
‘거짓말.’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것 같은 애절한 얼굴을 연기하며 장은수는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했다.
겉으로는 대인배, 호인인척하는 윤일중 회장이었지만, 그가 아버지 생전에 당신을 얼마나 질투했는지 잘 알고 있는 장은수였다.
“장 회장 자네라면, 선대인 못지않게 잘 해낼 거야. 허허. 어서 총수 자리에 오르셔야지. 앞으로 우리 고왕 건설도 잘 부탁함세.”
“제가 많이 부족합니다. 오히려 회장님께 많이 배워야죠.”
회장이라고 어디 다 똑같은 회장인가.
장은수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60, 70년대에야 고왕 건설이 태상과 붙어볼 만했지만, 지금은 그룹 전체 규모로 따지면 비교도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더욱이 고왕 건설의 속사정에 대해서는 이미 태상 경제연구소를 통해 낱낱이 받아본 장은수였다.
채권단의 압박에 건설 현장마다 나타나는 강성노조들까지.
고왕 건설은 지금 이리저리 두들겨 맞으며 KO 직전인 링 위의 복서와 다를 것이 없었다.
“아니야. 진심이라고. 장 회장도 알겠지만, 요즘 건설 경기가 너무 힘들어. 아주 죽을 맛이라니까.”
윤일중 회장은 속 편하게도 지금 경업자에게 우는소리를 하고 있었다.
“저기··· 그래서 말이야. 내가 듣기에 장 회장이 태상 금융 계열사들도 꽉 쥐고 있다고 들었어. 혹시 우리한테도 자금 좀 융통해 줄 수 있겠어?”
“회장님. 그거 다 헛소문입니다. 저는 그냥 태상 건설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있을 카타르 해안 도시 건설.
국내에서 유일하게 태상 건설의 경쟁자가 될만한 기술력을 갖춘 기업은 고왕 건설뿐이었다.
두 기업은 사실 같은 기억을 공유하고 있었다.
과거 태상과 고왕은 중동의 모래바람 속에서 건설 붐을 일으킨 주역이었고, 그걸 바탕으로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는 한편 기업의 규모도 크게 성장 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고왕 건설은 다가올 거대한 먹거리를 소화할 능력이 없었다.
장은수는 속으로 조소를 금치 못했다.
“장 회장, 그렇게 섭섭하게 말하지 말고. 태상과 고왕은 우리나라 경제를 같이 끌어온 쌍두마차 아닌가. 과부 사정 홀아비가 안다고 어려울 때 손 좀 내밀어주시게.”
장은수는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우리 윤 회장님께서 이렇게 약한 소리를 하시는 것 보니 정말 경기가 안 좋기는 한가 봅니다.”
“아무렴. 공구리만 쳐 놓은 사업들이 많아. 다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데···”
‘그렇게 호시절일 때 능력도 안 되는 거 일만 벌여놓고서는···’
“알겠습니다. 다른 분도 아니고 윤 회장님 말씀인데 제가 없는 힘도 다해봐야죠.”
“정말인가? 역시 장 회장이야. 태상 그룹의 우두머리가 될 사람답구만. 하하하!”
속마음은 철저하게 감춘 채 장은수도 윤일중 회장을 따라 웃었다.
*“흡━”
오랜만에 헬스장에서 쇠를 잡았다.
최예리가 운영을 제법 잘하고 있는지 여전히 헬스장은 민소매를 입은 근육맨들이 육체미를 이곳저곳에서 뽐내고 있었다.
오늘은 가슴과 등을 묶은 슈퍼세트.
한동안 운동을 등한시했던 것을 반성하며, 두 부위를 묶어서 밀고, 당겼다.
지금 막 계획했던 운동을 마지막으로 수행한 참.
“예리 씨, 나 갈게.”
간단한 샤워를 마치고 카운터에 있는 최예리에게 손을 흔들었다.
“어, 대표님! 들어가시게요?”
“응. 아··· 참. 예리 씨 소설은 잘 되어가?”
내 말을 들은 최예리의 표정이 한껏 밝아졌다.
대답을 듣지 않아도 그녀의 일이 잘 풀려간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도 모르게 흐뭇한 웃음이 지어졌다.
“말씀드렸었나? 저 저번 달에 런칭했거든요. 그리고 며칠 전에 처음으로 정산금 받았어요!”
최예리에게서 넘치는 에너지가 느껴진다.
무언가를 이룬 사람에게 느껴지는 그 기운이 참으로 반갑다.
“그래? 이런 거 작가님한테 물어봐도 되나? 얼마나 번 거야?”
“··· 음. 액수는 말하기 좀 그렇고. 정식 모터스 다닐 때 받던 월급보다는 훨씬 많아요.”
“와, 정말? 진짜 대단하다. 멋있네! 예리 씨.”
내 칭찬에 최예리는 뿌듯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나저나 예리 씨, 너무 잘나가면 센터도 그만두는 거 아니야? 예리 씨 같은 직원을 또 어디서 구하지?”
“에이, 걱정하지 마세요. 저 여기서 아주 오래오래 월급 루팡 할거거든요?”
그녀의 농담에 잠시 우리는 속 없이 하하 웃었다.
“다음에 김 대리님이랑 같이 저녁 먹어요. 거기 또 가요. 이름이 뭐였더라?”
“동표 포차?”
“맞아! 털보 사장님 있는 곳.”
“그래. 그러자.”
정식 모터스를 다니던 시절이 벌써 까마득하다.
장영복 회장의 부고에 대한 뉴스를 사무실에서 보았던 게 꿈만 같다.
그때는 저 뉴스가 일생일대의 사건이 될 거라곤 상상조차 못 했으니까.
기억을 더듬다 보니 문득 임 차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아저씨, 잘 살아 있으려나?
어디서 또 누군가에게 해악이나 끼치고 사는 건 아닐는지.
뭐, 그러거나 말거나 이젠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예리 씨, 영하랑 연락해보고 정말 일정 한번 잡아봐. 우리끼리 소소하게 신년회라도 하자.”
“알겠어요. 대표님. 들어가세요.”
“그래. 센터 잘 좀 부탁할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간만의 쇠질 좀 했다고 도파민이 솟구친다.
기분 좋은 뻐근함이 근육을 긴장시켰다.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차에 올라탔다.
며칠 전 최화란에게 받은 명함 속 딜러를 찾아가 차를 계약한 참이다.
이제 나의 젊은 시절 두 발이 되어주었던 애마와도 작별할 날이 머지않은 것이다.
“그동안 정말 고생 많았다.”
감상에 젖어 다정하게 핸들을 손으로 쓸었다.
그때, 휴대전화와 블루투스로 연결된 차의 스피커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마치 이 차가 나에게 대답을 하는 것 같아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내비게이션 화면을 보니 발신자는 최화란.
“여보세요.”
“응. 자기야. 아니지, 이제 한 대표라고 불러야 하나?”
“한 대표는 무슨요. 아직 간판도 안 올렸는데.”
스피커 건너편에서 최화란이 깔깔 웃는 소리가 들렸다.
“자기 준비는 다 되었어?”
최화란은 앞뒤 자르고 나에게 준비가 되었냐고 물어왔다.
그 잘린 말속에 들어 있을 내용이 짐작되었다.
구 회장과의 미팅이겠구나.
“약속 잡혔습니까?”
“··· 그래.”
중요한 순간이 다가왔다.
고왕 건설을 요리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재료.
구 회장.
엄청난 돈줄을 쥐고 자신만의 동굴에서 은거하는 그를 내 사업에 끌어들여야 한다.
전쟁의 시작이구나.
“알겠습니다. 일정 말씀해주세요.”
나는 거세게 요동치기 시작하는 심장의 떨림을 숨긴 채 최화란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강남 구 회장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