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같이 일 하나 합시다
종로.
여기는 최화란의 사채 왕국.
한동안 뻔질나게 드나들던 곳이지만,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처음이다.
“형님. 오셨습니까.”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검은 정장들이 나에게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박았다.
최화란의 참모 역할을 하던 시절 나의 명성과 일화는 이미 이들에게 알음알음 퍼져있는 상태.
사장이나 회장도 아니고 그렇다고 동료도 고객도 아닌 나에게 그들은 형님이라는 다소 어색한 호칭을 붙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건물의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자기, 왔어?”
“대낮부터 뭔 술입니까.”
최화란은 고급 살롱과 다를 바 없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혼자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한 잔 줄까?”
“그래요. 한 잔 줘요.”
“··· 웬일? 맨날 차 가져왔다고 안 마신다고 빼더니.”
“차 사고 났습니다. 지금 공업사 들어가 있어요.”
“뭐야, 많이 다치진 않았고?”
나는 대답 대신 최화란의 앞으로 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테이블 밑에서 와인잔을 하나 더 꺼냈다. 그리곤 탐스러운 붉은 빛이 도는 와인을 따라 나에게 건네주었다.
와인은 혀끝을 적시고 건조한 날씨 탓에 바짝 말라 있던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곧이어 장기를 한 바퀴 훑은 와인에서 시작된 쌉싸름한 알코올 향이 올라왔다.
묵직한 바디감이 가히 일품이라고 할 수 있었다.
“좋네요.”
“올드 빈티지야. 아끼면 뭐 해. 살아있을 때 이런 거 다 즐겨놔야지. 안 그래?”
뼈가 있는 말이었다.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한들, 죽은 뒤에는 그것이 무슨 소용이랴.
“선생님이 그렇게 가시고 나니까 뭔가 인생이 허무해진 거 있지?”
거인의 죽음은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최화란의 심경에도 영향을 미친 것이다.
나와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침묵에는 복희 할머니를 추모하는 두 사람의 예(禮)가 담겨있었다.
나는 최화란을 향해 와인잔을 슬쩍 들어 보였다.
“당신은 가셨지만, 분명히 그분이 뿌린 씨앗은 분명히 꽃을 피울 겁니다. 살아있는 우리는 우리의 몫을 다해야죠.”
최화란은 동의의 표시로 작게 고개를 한번 끄덕이곤, 와인잔을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그나저나, 최 사장님은 차에 대해서 좀 알죠?”
“차? 갑자기 차는 왜?”
나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에 놓여있는 슈퍼카들의 키를 가리켰다.
“바꿀 때가 돼서요.”
“폐차를 해야 할 정도로 사고가 크게 난 거야?”
“아뇨. 20만 넘긴 오래된 차에요.”
“알뜰하기라도 하셔라. 뭐, 생각해 둔 모델이라도 있어?”
“글쎄요. 최 사장님같이 슈퍼카는 제 취향은 아니고, 한번 외제차 끌어볼까 하는데. G*겐이 끌리더라고요.”
“걔라면 확실히 헤리티지가 있긴 있지. 하긴 자기랑은 잘 어울리긴 하겠다.”
최화란은 아래위로 나를 훑어보았다.
“이거 받아.”
그녀는 지갑을 꺼내더니 명함 한 장을 나에게 건넸다.
“신차로 살 거야? 그러면 1년은 기다려야 할걸? 이 딜러한테 연락해봐. 내 지인이라고 하면 편의를 많이 봐줄 테니까.”
“역시 최 사장님을 통하면 안 되는 게 없군요.”
명함을 받아 챙기며 너스레를 부렸다.
최화란의 눈이 실룩하게 가늘어졌다.
“오늘 이상하네. 천하의 한영수가 웬일로 나에게 이리 듣기 좋은 소리를 할까?”
“듣기 좋은 소리는 무슨요. 그냥 사실을 말하는 거지.”
“뭐? 나한테 아쉬운 소리라도 할 거 있어?”
“아쉬운 소리 하면 들어주실 겁니까?”
“계산기는 두들겨봐야지. 나에게 얼마나 득이 되는지.”
“그럼 잘 온 게 맞네요. 돈 냄새 나는 이야기 좀 하려고 왔습니다.”
최화란은 입을 가리고 깔깔 웃었다.
그녀의 웃음은 한동안 이어졌다.
“자기, 오늘따라 너무 귀엽네. 이렇게 크게 웃는 게 얼마 만이야. 이 화란이 앞에서 돈 냄새 나는 이야기를 하겠다고?”
“아마 최 사장님이 여태껏 들어본 적이 없는 큰 건일 겁니다.”
“글쎄다. 말했잖아. 나 요즘 슬럼프야. 매사에 의욕이 없어.”
“가을 전어 구우면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온다면서요? 그것보다 더 구미가 당길걸요.”
“못 당하겠네. 정말. 그래, 자기가 허튼 소리하는 사람도 아니니 어디 한번 말해봐.”
최화란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순식간에 가면을 바꿔쓰는 변검(變?)을 보여주는 것처럼 그녀의 표정이 순식간에 진지하게 변했다.
“투자회사를 차릴 거에요. 그리고 기업을 하나 사버리려고 합니다.”
“뭐야, 기업사냥꾼이라도 되겠다는 거야? ··· 실망인데. 난 자기를 그거보다는 나은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나는 고개를 크게 좌우로 저었다.
“그거랑은 좀 다르죠. 기업사냥꾼들이 빚을 끌어다가 회사를 사서 팔다리 다 자르고 차액 남겨서 팔아먹는 게 목적 아닙니까? 내가 원하는 건 근본적인 체질 개선입니다. 부품을 갈아야 할 곳은 시원하게 갈아버리고, 고칠 수 있는 부분은 약을 치고.”
“그래서 노리고 있는 회사가 어딘데?”
최화란은 서두가 길다는 듯 잘라 물었다.
“고왕 건설입니다.”
나 역시 길게 질질 끌며 간을 볼 생각이 없었다.
“··· 뭐?”
응당 최화란은 어디 구멍가게 같은 회사 하나 인수하겠다고 내가 까분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폭탄 발언에 최화란은 포커페이스는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놀람과 충격, 그리고 경악.
그 감정들을 언어로 말하지 않아도 그녀의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한동안 입을 반쯤 벌린 채로 말을 잇지 못하던 최화란.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쥐어짜듯이 입을 열어 목소리를 내었다.
“내가 아는 그 고왕 건설? 윤일중 회장의?”
“그래요.”
흐음━
최화란이 콧소리를 내었다.
‘쿠세’라고 하던가.
피처 플레이트 위에서 투수가 특정 구종을 던질 때마다 나오는 루틴을 말하는 야구판의 속어.
그 쿠세처럼 나는 그녀의 콧소리가 관심이 생기는 일이 있으면, 무의식중에 나오는 버릇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자기야. 고왕 건설이 지은 아파트가 전국에 몇 채인 줄 알아? 1군 건설사라고. 그런 대기업을 자기가 먹어 치우겠다고?”
“그래봐야 국내에서 100대 기업에 간신히 턱걸이하는 수준입니다. 못할 것도 없죠.”
“그건 고왕 건설이 다른 대기업들처럼 계열사가 많지 않기 때문이지. 건설 분야만 놓고 보면 태상건설에도 밀리지 않아.”
“오히려 그래서 더 좋죠. 계열사가 적다는 건 순환출자가 어렵다는 말이니까요. 총알만 넉넉하면 밖에서 충분히 잡아 흔들 수 있습니다.”
최화란은 더 이상 대꾸를 하지 못하고 애먼 와인잔만 만지작거렸다.
“그래. 다 좋다 이거야. 그런데 전에 윤일중 회장이 동석한 자리에서 자기 입으로 직접 말했잖아. 건설 경기가 최악이라고. 그런데 이 시기에 왜 하필 건설사?”
“최 사장님. 복희 할머니가 크게 잭팟을 터트렸을 때가 언제였는지 알고 계시죠.”
“그럼, 내가 그걸 모를까. 오일쇼크 때 우리 건설 업체들이 해외로 건너가면서 투자하셨던 건설주들이··· 잠깐만, 자기 설마?”
최화란의 눈치와 빠른 셈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몇 마디 대화로도 그녀는 내 의도를 금세 파악했다.
“한동안 건설 경기가 좋았죠. 저금리 덕분에 영끌이니 뭐니, 부동산에 돈이 몰리고. 집값은 나날이 오르기만 하고 말이에요. 하지만 지금 봐요. 강남 불패라는 말이 무색하게 시세에 한참 못 미치는 가격에 강남의 아파트들이 매물로 나오고 있습니다. 강남이 그런데 다른 지역은 어떻겠어요? 그리고 이건 시작에 불과할 거예요.”
최화란은 눈이 동그랗게 되어 나의 입을 바라보았다.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나의 성실한 학생이 된 그녀였다.
“위기에 빠진 건설사를 주워서 재정비하고 해외로 내보낼 겁니다. 할머니가 호기를 잘 타셨다면, 나는 호기를 만들어낼 거에요.”
가만히 듣고 있던 최화란이 입을 열었다.
“··· 그래. 말로만 하면 안 될 게 뭐가 있겠어. 그런데 지금 자기 나한테 돈 빌리러 와서 허무맹랑한 소리 늘어놓는 사람들이랑 다를 거 없다는 거 알지? 뜬구름 잡는 소리로 들려. 구체적인 계획은 있어?”
“판을 짤 겁니다. 상대보다 몇 수 앞까지 준비할 수 있는.”
커튼을 걷고 최화란에게 내가 그리고 있는 그림을 보여주었다.
한낱 공상에 불과하다고 반신반의하던 그녀.
하지만 최화란은 내 그림의 화려한 색채에 매료되었고 치밀한 구성에 점점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인정할게. 돈 냄새 나는 것.”
“어때요. 슬럼프에서 좀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좀 움직이고 싶어져요?”
“자기가 나한테 원하는 게 뭔데?”
최화란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들거리기 시작했다.
“같이 일 해봅시다. 투자회사의 이사 자리를 맡아줘요.”
그녀는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흐응, 뭐야. 나 신뢰받고 있는 거야? 자기는 날 믿어?”
“사람에 대한 믿음만으로 어떻게 큰일을 하겠습니까. 이건 다름 아닌 최 사장님에게 배운 건데요. 돈을 믿겠습니다. 지분을 쥐고 계시면 그만큼 그 지분만큼 비례해서 수익을 갈라드리겠습니다.”
“얼마나 댈까?”
“100억. 100억 어떻습니까.”
최화란은 100억이라는 숫자에 별로 놀라는 기색은 없었다.
그 정도가 그녀에게 전혀 무리나 부담이 아닐 거라는 예상은 이미 하고 있었다.
아니, 이미 최화란이 돈 냄새를 맡은 만큼 500억, 1,000억을 불러도 오케이를 외칠지 모른다.
하지만 최화란은 보통내기가 아닐뿐더러, 길들이기 어려운 야생동물에 가깝다.
그런 그녀에게 지나치게 많은 지분을 쥐여주면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이 흔들리게 될지도 모른다.
사공이 많아서 배가 산으로 가는 일은 막아야 한다.
“자기. 선생님이 남긴 재산 말이야. 자기가 모두 물려받은 거지?”
최화란이 갑작스럽게 돌발질문을 던졌다.
그녀는 나의 이 원대한 야심의 뒷배가 복희 할머니의 유산이라고 빠르게 짐작했으리라.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빙그레 웃기만 했다.
“좋아. 까짓것 배팅 한 번 해보지 뭐. 선생님의 재산에 자기의 배짱이 더해졌으면 한번 올라타 볼 만도 하지.”
반쯤 남은 와인을 단숨에 벌컥 들이마신 뒤 최화란이 결의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앨런인지 뭔지, 바지사장은 이미 구한 거 같고. 나보고 어디 가서 꽃받침이나 하라는 것도 아닐 테고. 앞으로 내가 이사 자리에 올라서 뭘 도맡으면 될까? 자기라면 당연히 그것도 생각하고 여길 왔겠지?”
“사장님이 쌓아온 인맥이요. 정치인이든, 은행장이든, 최 사장님과 돈으로 얽혀있는 힘 있는 사람들이요. 그들을 움직여 주세요.”
“이 화란이한테 지금 수발을 들라는 거지? 뒤에서 지저분한 일은 떠맡으라고.”
“뭘 그렇게 말하십니까. 각자 잘하는 걸 하자는 거죠.”
최화란은 붉은 입술을 잠시 빼쭉 내밀었다.
“명심해. 나를 음지에서 양지로 꺼내서 쓰는 값은 절대 싸지 않을 거라는 걸.”
“··· 이 모든 일이 끝났을 때 사채 시장의 새로운 여왕은 최 사장님이 되실 겁니다.”
최화란의 내밀한 욕심을 알고 있었다.
더 이상 심부름꾼이 아니라 쩐주로 자리를 잡고 싶다는.
내가 희망찬 미래를 담보하자, 그녀의 눈가가 씰룩거렸다.
“역시 자기는 정말 탐나는 남자라니까. 선생님 돌아가시고 다시는 자기 못 볼 것 같은 예감이 들었었는데 오히려 밝은 곳에서 만나려고 그랬던 거구나.”
“일단 첫 번째 작업부터 착수하시죠.”
“뭘까? 그게.”
“구 회장님께 연락해주세요. 내가 뵙고 싶어 한다고. 앞으로의 일에 열쇠가 될 사람은 바로 구 회장님입니다.”
각자의 속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