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경계
“1인 법인을 세우신다면 특별한 절차는 없겠지만, 지금 영수 님이 생각하시는 건 보다 전문적이 투자회사이니까···”
나는 앞에서 아기새처럼 종알종알 떠드는 고윤아의 얼굴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고윤아는 전문 투자회사의 설립요건과 등록 절차를 열심히 설명하는 중이었다.
언제나처럼 고윤아의 말은 직관적이어서 이해하기가 편했다.
여기는 고윤아가 사는 오피스텔 인근의 카페.
원해서든, 원치 않든 반백수 상태인 우리 둘에게는 많은 시간이 있었다.
오늘은 극장에서 최신영화를 보고 나온 참이었다.
모두가 직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 시간.
영화관은 마치 나와 고윤아를 위해서만 열어놓은 듯 텅텅 비어 있었다.
영화는 아이를 잃은 한 부부의 일상이 무너지고, 다시 회복하는 과정을 그린 내용이었다.
줄거리가 줄거리인 만치 잔잔한 시퀀스의 연속이었지만, 배우들의 연기가 훌륭해 제법 몰입해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좋은 연기보다 인상 깊은 것은 따로 있었다.
영화 중간에 극적인 장면이 한차례 지나가고, 나는 무심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고윤아의 눈에는 눈물이 잔뜩 어려있었다.
스크린에서 나오는 빛이 반사되어 눈물 어린 눈이 투명하게 빛났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의자 너머로 팔을 뻗어 고윤아의 어깨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
“그나저나 이사진은 어떻게 꾸리실 생각입니까? 투자회사는 합자회사의 형태를 가집니다. 합자회사는 1인 이상의 무한책임사원이 필수입니다. 영수 님이 그 역할을 맡게 될 텐데, 그런 만큼 이사진은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구성하셔야 합니다.”
“일단 2명은 생각해놨어. 한 명은 최화란이야. 전에 윤아도 본 적 있지? 일전에 강남에서.”
“아···”
고윤아의 표정이 복잡미묘해졌다.
“그 화려한 여성분···”
“뭐야··· 혹시 윤아, 너 질투라도 하는 거야?”
나는 고윤아에게 장난스럽게 말했다.
“아닙니다! 아니··· 사실 맞는 거 같습니다. ··· 감정이라는 건 참 이상합니다.”
고윤아의 모습에 양쪽 입꼬리가 절로 올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걱정하지 마. 그저 사업 동반자일 뿐이니까. 인간적으로는 모르겠지만, 돈 문제라면 믿을 수 있는 사람이야. 그만큼 철저하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최화란이 종로에서 쌓아온 인맥이 나에겐 필요해.”
나는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고윤아의 손등 위에 내 손을 올렸다.
“그럼 나머지 한 명은 누구입니까.”
나머지 한 명.
그가 이번 일의 성패를 손에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그를 간접적인 방법으로 투자회사에 끌어들일 생각이었다.
나는 고윤아를 향해 고개를 좌우로 저어보았다.
“우리 일 이야기는 그만할까? 이왕에 같이 시간을 보내는 거니까.”
“저···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뭔데?”
고윤아는 잠시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저도 영수 님의 팀에 합류하겠습니다.”
“글쎄··· 그건···”
사실 고윤아만큼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어차피 회사를 꾸리는 데 변호사는 필요한 법이고, 나와의 관계를 떠나서라도 고윤아만큼 실력 있는 프로를 구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고윤아에게 합류하라는 말을 하지 않은 것은 이유가 있었다.
내가 앞으로 걸을 길이 결코 만만할 리가 없다.
그녀에게 그 가시밭길을 함께 걷자는 말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M&A 전문 변호사는 아니지만, 광월에 있으면서 기업 간의 분쟁에 경험이 있습니다. 모자란 부분은 더 공부하겠습니다. 저도 영수 님과 같이 일하고 싶습니다.”
“··· 하지만 말이야. 윤아 너도 알겠지만, 결코 정도(正道)만 걸을 수가 없는 일이야. 벌써 이런 이야기는 좀 그렇지만, 자칫 잘못하면 법적으로 연대 책임을 물을 수도 있고.”
내 말이 끝나자 고윤아는 입술을 일자로 꾹 다문 채 두 손을 들어 보였다.
그녀는 검지만을 편 두 주먹을 반원을 그리며 돌려 맞댔다.
수어였다.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우리는 앞으로 항상 모든 걸 같이 하기로 했습니다. 저도 함께 하겠습니다.”
그녀의 눈에서 꺾을 수 없는 단호함이 보였다.
··· 한영수. 너는 참 복도 많지.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 옆에서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하면 윤아가 바로 세워줘.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
“오후에는 나 송림프라자에 좀 가봐야 할 것 같아. 간 김에 오랜만에 운동도 하고 오려고. 나 살 많이 찌지 않았어?”
“영수 님은.”
고윤아의 얼굴이 붉어졌다.
“항상 멋있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우리 고 변호사님도 그래요. 처음 봤을 때도, 지금도.”
고윤아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떠올랐다.
“가자, 오피스텔 근처까지 데려다줄게.”
“아닙니다.”
고윤아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어차피 저는 걸어서 얼마 안 걸립니다. 건물 지하에 차 대어놓으셨으니 거기까지 제가 데려다주고 싶습니다.”
고윤아는 내 손을 잡고 앞장서 걸었다.
이런 작은 순간들까지도 즐겁다.
연애라는 게 사람을 이렇게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이었던가?
삑━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와 차를 찾고, 나는 고윤아에게 손을 흔들었다.
“윤아야. 이제 올라가. 내가 운전하면서 전화 할 테니까.”
그런데 왜일까?
고윤아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고윤아는 잡고 있던 내 손을 놓지 않고서 빠르게 나를 차 쪽으로 끌었다.
“영수 님. 차에 타시겠습니까?”
그녀에게 떠밀리듯이 차에 올라탔다.
고윤아는 자리를 떠나지 않고 조수석 문을 열고 차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어 일단 시동부터 걸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저 차 보이십니까.”
고윤아는 손가락을 들어 차창 밖에 어딘가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흔하게 볼 수 있는 검정 중형 승용차가 한 대 서 있었다.
“저 차가 왜?”
“번호판을 기억합니다. 6596. 분명히 저희가 아까 극장을 갈 때 뒤를 따라오던 차입니다.”
“그래서?”
“극장에서부터 이 건물 지하 주차장까지 따라왔다는 건 우연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이상합니다.”
··· 꼬리가 붙었다?
“누가 감시라도 한다는 소리야?”
“영수 님, 일단 출발하시겠습니까. 저는 주차장 밖에서 내려주시면 됩니다.”
엑셀에 발을 올렸다.
그리고 차가 주차되어 있던 공간을 막 빠져나가려는 때 사이드미러로 분명히 보였다.
6596차량의 전조등에 불이 들어오는 것을.
오르막 경사를 타고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와 갓길에 차를 대었다.
귀신같이 6596도 우리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차를 멈췄다.
“윤아야. 일단 내려. 저 차는 어떻게 하는지 내가 운전하면서 지켜볼 테니까.”
“··· 영수 님.”
고윤아는 운전석 쪽으로 몸을 숙여 나를 껴안았다.
그녀는 나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항상 조심하셔야 합니다. 우리의 상대는 절대 만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고윤아가 내리고 운전을 시작했다.
여전히 6596은 내 시선 안에서 얼쩡거렸다.
일부러 외곽도로에서 갑자기 출구로 나가보기도 하고, 한적한 길을 달려보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나 그 검은색 차는 다른 차 뒤에 숨어, 혹은 당당히 내 옆을 따르며 나를 쫓고 있었다.
의심이 확신이 되는 순간이었다.
장은수겠지. 이런 짓을 지시한 것은.
만약 그렇다면 이렇게 내 뒤를 밟은 것이 도대체 언제부터였을까?
마음속에 분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숨은 적도, 도망친 적도 없다.
내가 알고 싶다면 당당하게 내 앞에 나타나면 될 일이다.
그래, 좋다.
어차피 차도 바꾸려고 했으니 이참에 그러면 되겠네.
나는 차의 속도를 늦추거나, 혹은 빨리 달려 나와 6596의 위치를 재배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내가 원하던 구도가 나왔다.
빨간색 신호.
내 앞에는 신호대기 선에 걸려있는 6596이 서 있었다.
잠시의 기다림 뒤, 신호가 막 적색에서 초록색으로 바뀌려는 찰나···
웅━
나는 액셀에 발을 올렸다.
차의 엔진은 동작을 온순하게 따랐고, 엔진의 힘을 받아 내 차의 범퍼가 미처 출발하지 못한 6596의 뒤 꽁무니를 그대로 들이박았다.
쾅━
비상 깜빡이를 켜고 차에서 내렸다.
우선 수신호로 뒤차들이 통행에 지장을 받지 않도록 교통정리를 했다.
차들이 다 빠지고 난 뒤에 아직도 그대로 멈춰선 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6596의 앞좌석으로 다가갔다.
똑똑━
진하게 선팅이 되어있는 차 창문을 몇 번을 두드리고 나서야 창이 서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운전석과 조수석에는 40, 50대쯤으로 보이는 남자 두 명이 앉아있었다.
영 좋지 않은 표정의 그들.
당연한 소리겠지만, 내가 모르는 얼굴들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딴생각하다가 그만··· 바로 보험접수 해드리겠습니다. 다치진 않으셨어요?”
“··· 됐습니다. 그냥 가세요.”
운전석에 앉아있는 남자는 내게 손을 휘휘 내저어 보였다.
“아닙니다. 순전히 제 과실인데요. 그렇게 할 수는 없죠.”
“괜찮다니까요.”
“내려서 사고 확인도 안 하세요?”
“됐습니다.”
그만 귀찮게 하라는 듯 운전석의 창문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 창문에 손바닥을 턱 올려놓았다.
“아 참, 지금 녹음하고 있어요. 나중에라도 저한테 뺑소니라고 하시면 안 됩니다.”
나는 녹음기 어플이 켜져 있는 휴대전화를 운전석의 남자에게 들어 보였다.
“거, 젊은 양반이. 알았어요. 그냥 가시라니까.”
“그럼 말씀 좀 물어볼게요. 이왕 녹음기 켠 김에. 왜 아까부터 나를 따라다니는 겁니까.”
허를 찔린 6596 속 두 남자는 모두 어깨를 움찔거렸다.
“이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우리가 왜···”
“극장, 지하 주차장, 그리고 지금 한 시간 가깝게 운전하는 동안.”
나는 날카로운 눈으로 그들을 쏘아보았다.
남자들은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나는 운전석에서 몸을 떼고 입을 열었다.
“아무튼 뭐, 연락처라도 드릴까요? 나중에라도 보험 접수하세요.”
6596은 내가 차에서 몸을 떼기가 무섭게 대답도 없이 창문을 올리곤 도망치듯 사라져 버렸다.
*
“이미 눈치를 챘다면서요. 뭘 계속 따라다닙니까. 당분간 제가 다시 연락드릴 때까지 별도 행동하지 마세요.”
황 실장은 전화를 끊고 목에 맨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 헤쳤다.
황민우.
43살의 그는 태양 건설 그룹의 비서실장이자 장은수 회장의 핵심 수행원이기도 했다.
그는 지금 막 한영수의 미행이 덜미가 잡혔다는 보고를 들은 참이었다.
‘회장님이 알게 되면 또 난리가 나겠군.’
장은수의 가신으로서 그는 출세 가도를 달렸다.
수많은 엘리트가 치열하게 경쟁하는 태상 안에서 별 볼 일 없는 출신에 불과한 그가 이 자리까지 온 것은 몹시 이례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장은수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장은수가 태상 본사의 기획 운영팀장을 맡고 있을 때였다.
장은수도 황민우도 아직 30대였고, 황민우는 장은수 밑의 말단 팀원 중 한 사람이었다.
그 시절 어느 날 장은수가 음주운전으로 사고를 낸 뒤에 차를 버리고 도주를 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장은수 회장은 그 죄를 황민우가 대신해주기를 바랐다.
황 실장도 당연히 그것이 잘못된 일인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마침내 성공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고 생각했다.
배경도 줄도 없는 자신이 몇 살까지 이 태상에 붙어있을 수 있겠는가.
벌금 몇백으로 언젠가 태상의 주인이 될 사람에게 줄을 댈 수 있다면 차라리 그게 이득이다!
결국 황 실장은 장은수 회장의 죄를 모두 덮어쓰는 선택을 했고, 그렇게 충성심을 보여준 그는 지금 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
그 이후로 황민우는 대소사를 가리지 않고 장은수의 일이라면 제 일처럼 처리해야 했다.
회사 업무뿐만 아니라 사적인 일까지.
거기에는 심지어 장은수의 이혼소송 문제도 있었다.
하지만 최근 장은수의 광폭한 행보에 황 실장조차도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선대 장영복 회장의 사후를 기점으로 장은수는 지나치게 폭주하고 있었다.
황 실장의 생각에 장은수가 한영수를 이렇게 적으로 돌리는 것은 현명하지 못했다.
한영수가 선재 장학회에 이사장으로 취임하면서 거머쥐게 된 태상 건설의 지분 5.6%.
단언컨대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한영수를 어르고 달래 자기 편으로 만들어도 모자랄 판국에 적으로 돌린다?
언젠가 장은수 회장의 감정적인 결정이 큰 화를 불러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황 실장이었다.
‘앞으로 한영수에 관해서는 취사선택해서 보고해야겠어.’
자기가 살 구덩이 하나쯤은 몰래 파놔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하는 황 실장이었다.
같이 일 하나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