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0억을 상속받았다-84화 (84/200)

84. 첫 삽을 뜨다

“미스터 한. 고왕 건설의 주식에 투자하는 것은 추천하지 않습니다. 현명하지 못해요. 전에도 말했지만, 조만간 유증 이슈도 있습니다. 주가는 하락을 면치 못할 겁니다.”

앨런은 내 말을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다.

나는 일개 개인 투자자로 고왕 건설을 찍어 먹어보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앨런, 나는 지금 단순히 주식 투자를 하겠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정말로 고왕 건설을 사버린다고 말하는 거예요. 뭐 내 깜냥에 직접 경영은 어렵겠지만 최소한 회사를 좌지우지 할 수 있을 정도의 대주주는 되어야겠죠.”

“what the···”

앨런의 반응은 솔직했다.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불과 32살의, 듣도 보도 못한 젊은이가 비록 자금난에 빠져있다곤 하나 국지의 건설 대기업을 먹어버리겠다고 이리 간단하게 선언하다니!

만약 앨런이 나와 인연이 없었다면 미친 소리 하지 말고 당장 꺼지라고 소리를 질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지금 그건 한국식 농담입니까?”

“아니요. 대단히 진지합니다.”

“오··· 미스터 한을 무시하는 건 절대 아닙니다. 오해하지 말고 들으세요. 며칠 같이 다녀보고 바로 알았어요. 굉장히 똑똑한 사람이란 걸. 하지만 기업이라는 건 마트에서 물건 사는 것처럼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고왕 건설의 시가 총액이 얼마입니까.”

불문곡직.

단호한 내 어투에 앨런은 못 말리겠다는 듯 두 어깨를 으쓱 들어 보였다.

“주당 가격이 56달러. 시총은 21억 8천만 달러입니다. 원화로 2조 8천억 정도 되겠군요.”

“그렇군요.”

“미스터 한의 말처럼 최소한 고왕 건설의 경영에 목소리를 낼 정도가 되려면 5천억은 필요합니다. 방금 말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minimum입니다.”

“··· maximum까지도 가능합니다.”

단순한 허풍이 아님을 직감했을까?

앨런의 오른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말없이 손을 들어 안경을 올려 썼다.

우리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의 기류가 흘렀다.

정적을 깨고 앨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사무실을 한 바퀴 돌면서 창가에 달린 블라인드를 모두 내렸다.

마치 우리 둘 만을 위한 암실을 만들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그럼··· 미스터 한이 조 단위의 재산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까.”

“생각하는 것 이상일 겁니다.”

“지금부터 이 자리에서 나온 말은 철저하게 기밀로 유지하겠습니다. 원하신다면 비밀 유지각서도 써드리겠습니다. 이쯤되니 저도 궁금해지네요. 계획이 뭡니까. 그 회사로 뭘 하겠다는 겁니까.”

계획.

머릿속으로 이미 얼개는 모두 짜진 뒤였다.

우선 팀을 만드는 것이 우선이겠지.

투자 회사의 형태로 움직일 수 있는 팀을.

그리고 고왕 건설을 더 잡아 흔들 것이다.

내가 들어갈 수 있는 최적의 포지션을 만들기 위해서.

고왕 건설에는 안 된 일이지만 나는 그들의 숨통을 죄게 할 수 있는 히든카드를 하나 가지고 있다.

그리고?

때가 오면 구원투수의 모양새를 하고 나의 존재를 드러내야겠지.

상황을 그렇게 만들 것이다.

고왕 건설이 도저히 내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도록.

위기는 곧 기회다.

IMF 시절 오히려 회사의 세를 불렸던 장영복 회장같이, 나 역시 고왕 건설의 위기를 발판 삼아 크게 삽을 뜰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고왕 건설을 에메랄드 시티 수주전에 참가시킬 겁니다.”

1조 달러.

이 막대한 거금의 물길이 고왕 건설에까지 닿는다고 가정해보자.

주가가 바닥까지 곤두박질친다고 해도 원상복구, 아니 그 이상까지 치솟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아니, 최악의 경우 설령 수주에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저 거대한 사업에 참여 의사를 밝혔다는 것만으로도 주가는 한동안 힘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에메랄드 시티 건설에 큰 야심을 가지고 있을 장은수 회장에게는 충분한 응답이 되리라.

그의 선전포고에 대한.

역시 그 답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앨런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 좋습니다. 미스터 한이 제 예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재력가라고 믿어보겠습니다. 하지만 윤일중 회장은 겉보기에는 마냥 good people로 보이지만, 결코 경영권을 쉽게 포기할 사람이 아닙니다. 고왕 건설은 지주회사에요. 자회사를 매각해서라도 경영권을 방어하려고 할 겁니다. 미스터 한이 그 돈의 전쟁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앨런. 나는 트로이의 목마가 될 겁니다.”

꿀꺽━

앨런 오닐의 목울대가 꿈틀거렸다.

“물론 아직 밑그림도 제대로 그려지지 않았어요. 그저 이 자리에서 나온 이야기 아닙니까. 기술적인 문제는 차차 고민해봐야겠지요. 하지만 나는 칼날을 앞으로 내밀고 들어가지 않을 겁니다. 고왕 건설의 환대를 받으며 들어갈 겁니다.”

하하하━

앨런은 내 말이 끝나자 크게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가 벽에 반사되어 퍼지며 공간 안에 여운을 남겼다.

“미스터 한은 참 이상한 사람입니다.”

“왜요? 터무니없는 몽상으로 들립니까?”

“yes. 어려운 일을 너무나 쉽게 이야기하니까요. 하지만···”

앨런은 혼자서 고개를 연신 끄덕거렸다.

“왠지 미스터 한이라면 그걸 해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참 이상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일단 이쪽으로 오시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에 앉더니 컴퓨터 자판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고왕 건설의 지분 현황입니다.”

앨런은 모니터 하나를 내게 돌려주었다.

최대 주주는 역시 윤일중 회장 일가.

사실상 윤일중 회장 개인 자산이라고 봐도 무방할 지분이 32%였다.

“국민 연금공단이 9%로 뒤를 잇고 있습니다만, 저 32%를 어떻게 나눠 먹는지가 승부처겠죠.”

이 말을 시작으로 앨런은 나에게 다양한 전략적인 방법론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복희 할머니가 나에게 총과 총알을 주고 과녁에 방아쇠를 당겨보게 했다면, 앨런은 총의 제원부터 알려주는 격이었다.

그는 이참에 나에 대한 신세를 갚겠다는 듯 열띤 강연을 펼쳤다.

어느새 블라인드 틈새로 들어오던 태양의 빛이 흐려지고 어둠이 그 자리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결코 쉽지도, 짧지 않은 싸움이 될 겁니다. 당연히 미스터 한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고요. 러닝메이트들은 있습니까?”

“이제 찾아야죠. 그리고 첫걸음으로 투자 회사를 차릴 생각입니다.”

“이왕 하시려면 최고의 전문가를 고용하셔야 할 겁니다. 참고할 수 있게 제가 리스트를 뽑아 드리겠습니다.”

“앨런.”

나의 부름에 앨런이 모니터에서 얼굴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이 일을 앨런이 함께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

또다시 정적.

그의 영입은 처음부터 계획했던 일이다.

하지만 담백한 나의 말에 허를 찔린 듯 앨런은 말을 잇지 못했다.

“투자금은 내가 마련할 겁니다. 하지만 훌륭한 간판이 필요합니다. 이력이 전혀 없는 내가 나서기 어려운 일이에요. 나는 대표이사를 맡겠습니다. 회사를 차리게 되면 앨런에게 COO 자리를 부탁하고 싶습니다.”

“···”

앨런은 말없이 컴퓨터 의자에서 일어나 집무실 구석에 있는 찬장으로 다가갔다.

찬장을 열고 위스키와 잔 두 개를 꺼낸 그는 처음 우리가 앉았던 응접용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미스터 한··· 이쪽으로 오시죠.”

앨런은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위스키 병뚜껑을 따고 유리잔 바닥에 갈색의 내용물을 깔았다.

중요한 순간이다.

지금 나에게는 일을 도와줄 인재가 간절히 필요했다.

제갈공명을 얻기 위해 삼고초려를 하는 유비의 심정이었다.

“미스터 한에게는 내가 큰 빚이 있지요. 그런 만큼 속마음을 숨기지 않고 말하겠습니다. 그래요. 사실 미스터 한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오랜만에 심장이 두근거린 것도 사실입니다. 정말 동화처럼 멋진 이야기죠. 벼랑 끝의 회사로 big shot을 터트린다. 그런 훌륭한 반전이 어디 있겠습니까.”

앨런의 안경 너머 눈이 가늘어졌다.

“하지만 저는 프로입니다. 결코 이상만으로 어떤 일에 접근하지 않습니다. M&A의 80%는 실패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저는 gambler가 아닙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당연하다.

나의 제안은 그에게 있어 도박과도 같은 것.

굳이 안락한 환경을 걷어차고 맨바닥과 다름없는 필드로 나올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 그의 말속에는 아직 협상의 여지가 열려 있었다.

앨런이 내 말을 귀담아 들어주는 이유는 오직 하나.

그가 내게 지고 있는 그 빚 때문에.

“앨런. 당신이 말하길 삶을 바라보는 자세가 달라졌다고 했었죠?”

“물론입니다.”

앨런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냉정하게 말해서 그동안 앨런은 이 일을 하면서 이기기 위한 싸움만을 해왔을 겁니다. 거기에는 피해자의 사정 따위는 고려되지 않았겠죠.”

“...”

“그게 잘못되었다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고객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일 테니까요. 하지만 지금 내가 하려는 건 누군가를 죽여서 내가 살고자 하는 게임이 아닙니다. 진통은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고왕 건설이라는 회사를 살려낼 겁니다.”

앨런은 나의 말에 아무런 반박을 하지 못했다.

“나와 함께 합시다. 교훈을 얻었다면 변해야죠. 당신에게도 의미가 있을 거예요. 모두가 이기는 방법을 찾아봅시다.”

묵묵히 내 말을 듣던 앨런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참··· 미스터 한에게는 정말 못 당하겠습니다. 설령 미스터 한이 어떤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더라도 그럴듯하게 들릴 것 같습니다. 그게 당신이 가진 힘이겠죠.”

앨런의 표정이 다시 진지해졌다.

“좋습니다. 돌려서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지금 management fee로 투자금의 1%를, perfomance fee로 수익금의 13%를 받고 있습니다. 제가 IO에서 받는 만큼을 보전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투자 회사를 차리게 되면 스톡옵션을 행사할 수 있는 지분을 원합니다. 총지분에서 1%.”

앨런은 결코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지 않았다.

자기가 지금 받는 수준을 크게 넘어서지 않는 정도였다.

그가 솔직하게 마음을 터놓고 말하는 만큼 나도 시원스러운 대답을 해줄 필요가 있었다.

앨런 정도의 인물에게 손해를 감수하면서 이쪽으로 넘어오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좋습니다.”

“조건이 하나 더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이왕 할 거라면 최고들과 같이 일하고 싶습니다. 제 인맥을 모두 동원해 3명 정도 실무자를 뽑을 권한을 주세요. 한 사람당 연간 50만 달러는 필요할 겁니다. 가능하십니까.”

어차피 일할 사람은 필요하다.

이건 오히려 내가 앨런에게 먼저 부탁하고 싶었던 일이었다.

흔쾌히 이 조건 역시도 승낙했다.

앨런이 실무자를 꾸린다면, 나는 그를 적절하게 견제할 수 있는 이사진을 꾸릴 것이다.

마음속으로 이미 구상해둔 인물들은 몇 있었다.

“cheers. 좋습니다. 미스터 한의 야망을 믿어보겠습니다.”

앨런이 나를 향해 잔을 들었다.

목구멍으로 강한 도수의 알코올이 넘어가자 금세 속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앞으로 정신없이 바빠지겠군요.”

“예. 일단 저는 신변 정리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앨런의 얼굴이 다소 상기되어 있었다.

그것이 한 잔의 술 때문인지 새로운 도전에 대한 기대감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하나 묻고 싶습니다.”

“뭡니까.”

“미스터 한··· 도대체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

“글쎄요. 이제부터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증명하는 첫걸음이 되겠죠.”

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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