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0억을 상속받았다-82화 (82/200)

82. 나는 다시 일어나 (2)

뻘밭을 걷는 듯 무거운 발걸음이었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내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 같았다.

쾅━ 쾅━

문을 두들기는 소리는 아파트 복도를 울렸다.

간신히 몸을 움직이면서도 제발 문밖의 손님이 이제라도 돌아가 주기를 바랐다.

만약 내가 모르는 얼굴이 문 뒤에 서 있다면 분한 성정을 주체하지 못할 것 같았다.

덜컹━

힘을 주어 현관문 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그리고,

대문 밖 아파트 복도에는 내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서 있었다.

그이의 보자 화가 얼마간 누그러들 수밖에 없었다.

선량함이 묻어 있는 맑은 눈.

또 한 번 문을 두드리려고 했던 건지 작은 주먹을 모아쥔 채 올리고 있는 이.

고윤아였다.

저 작은 주먹이 어떻게 그런 큰 소리를 냈을까.

완전히 방전되어 도저히 움직이지 못할 것 같던 나를 일으킬 만큼.

반가운 얼굴이었지만 지금 상황이 마냥 반가운 것은 아니었다.

몇 번이나 초인종을 누르고, 문을 수없이 두드리는 그녀의 조급함이 이해되지 않았다.

내가 알고 있는 한, 고윤아는 이렇게 무례한 행동을 할 사람이 아니다.

“··· 영수 님.”

날씨가 춥고 삭막했다.

세상이 모두 얼어버린 것 같은 날, 성대의 울림을 타고 흘러나오는 그녀의 목소리는 유난히 내 귀에 선명하게 들렸다.

고윤아의 입에서 반투명한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변호사님, 이 시간에 어쩐 일로···”

문고리를 잡은 채로 고윤아에게 물었다.

그녀에게 미안하지만, 지금 나는 과히 유쾌한 표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파트 복도의 센서등의 불이 꺼졌다.

어색한 인사 사이에 공백이 생기고 그 빈틈을 어둠이 채웠다.

나와 그녀는 그렇게 잠시 멍하게 서 있었다.

예상치 못한 그녀의 방문에 대해 마땅히 떠오르는 이유가 없었다.

말갛게 화장기없는 고윤아는 부랴부랴 서둘러 준비하고 나온 듯한 복장이었다.

뭐, 세상 형편없는 꼴을 하고 있는 내가 남의 복장이 이렇다, 저렇다고 말하는 것도 사실 우스운 일이긴 하다.

어쨌든 이렇게 그녀를 밖에 세워놓을 수는 없는 셈.

“일단 들어와요. 들어가서 이야기해요. 추운데 서 있지 말고.”

나는 현관에서 몸을 비켜 그녀가 들어올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고윤아는 고개를 살포시 숙여 보이곤 내 품을 지나쳐 집 안으로 들어왔다.

“잠깐 소파에 앉아 있어요. 커피 괜찮아요?”

거실의 불을 켜고 나는 커피포트를 찾았다.

보글보글━

물을 넣고 스위치를 올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커피포트 안에서는 제법 듣기 좋은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커피 두 잔을 들고 그녀가 앉아 있는 소파로 다가갔다.

“감사합니다.”

찻잔을 받아들며 고윤아는 공손하게도 나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급하게 걸친 듯한 스웨터는 고윤아의 몸보다 사이즈가 많이 커 보였다.

커피를 받아드는 손의 절반을 팔이 긴 스웨터가 덮고 있었다.

내 몫의 커피를 한 입 마셨다.

목을 타고 그 뜨거운 액체가 뱃속으로 넘어가기 무섭게 온몸이 싸해졌다.

빈속이었다.

내 몸 안의 장기들은 여태 자신들을 굶긴 날 원망이라도 하듯 찌르르한 통증으로 복수를 했다.

“영수 님. 얼굴이 안 좋습니다.”

“예··· 내가 지금 좀 상태가 안 좋죠?”

고윤아의 차분한 검은 눈동자가 조심히 나를 살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저 눈.

어쩌면 고윤아에게 변호사라는 직업은 천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녀의 눈을 보고 있자면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들을 털어놓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았으니까.

그래. 고백하건대 나는 고윤아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녀의 눈이 좋았다.

“혹시 무슨 일인지 여쭤보아도 되겠습니까?”

그녀의 얼굴에 불안함의 그늘이 드리운다.

물론 별일이야 있다.

그것도 나의 내면에 아주 큰 영향을 끼친.

하지만 그것은 나와 복희 할머니 사이의 일이다.

고윤아와는 무관한 것이다.

하지만 고윤아의 눈은 나에게 계속 대답을 종용했다.

어찌하랴, 나는 그 깊고 다정한 눈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어요. 내가 말씀드렸던 그분이요. 정신 차려야 하는데, 아직 마음 정리가 안 되고 있네요. 참 이상하죠? 당신을 알고 지낸 지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닌데··· 내 일부가 떨어져 나간 것 같은 기분이에요.”

나는 쓸쓸하게 웃었다.

그리고 손바닥을 펼친 채로 두 팔을 가슴께까지 들어 보였다.

그래서 지금 이 모양이라는 무언의 제스처를 고윤아에게 전하고 싶었다.

아아···

고윤아의 입에서 탄식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왜일까?

한숨 소리와 달리 그녀의 얼굴이 펴지며 다소간 안도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영수 님에게는 몹시 귀한 인연이라고 들었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네. 돌이켜보니 제가 느껴본 적 없는 모정이란 걸 처음으로 경험해본 것 같아요. 그래서 이렇게까지 아픈 걸까요?”

또다시 대화가 끊겼다.

우리 둘 사이에는 간헐적으로 호록 커피를 입에 대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대화가 겉돌고 있었다.

고윤아는 무언가 할 말을 내 눈치를 보며 섣불리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고 변호사님. 그런데 오늘은 갑자기 어쩐 일이에요.”

결국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아까 그녀가 나에게 물었던 것과 같은 질문을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

잠시 주저하던 고윤아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저··· 영수 님. 혹시 최근에 신변의 위협이라든지, 누가 지켜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드시진 않았습니까?”

다소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었다.

신변의 위협이라.

최근에는 집구석에만 박혀있었다.

장학회의 이사진들을 만나고, 유 변호사를 만나러 외출했던 것이 전부다.

그다지 둔한 편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이상한 낌새 같은 것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나는 그녀의 앞에 고개를 좌우로 저어 보였다.

“그럼 혹시 태상 쪽에서 접촉이 있었습니까?”

“장은호 회장과는 아주 드물게 연락할 때가 있었습니다. 특별한 건 없었고 정실 전자 투자 건에 대해 간단히 대화한 적은 있어요. 전화상으로.”

이번에는 고윤아가 고개를 저었다.

“장은호 회장님이 아닙니다. 장은수 회장 혹은 그쪽 사람들을 말입니다.”

··· 장은수?

“로펌에서 해고당했습니다.”

머릿속에서 이렇다 할 답을 찾아내기도 전에 고윤아의 말이 이어졌다.

얼마 전까지 로펌 광월의 소속으로 바쁘게 활동하던 그녀를 알고 있기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국 다시 왜? 라는 단어만이 목구멍에서 맴돌았다.

고윤아는 뛰어난 학벌에 승소율도 훌륭한 것으로 알고 있다.

심지어 한때 ‘미녀 변호사’로 매스컴의 주목을 받은 적도 있지 않은가?

인성마저도 올곧은 사람이다.

일반적이지 않은 말투나 예측할 수 없는 행동 탓에 사회성이 아주 조금 부족해 보이는 건 사실이지만 그것이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해고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잠깐만···

조금 전 고윤아는 장은수 회장을 입에 담았다.

태상을 언급하며 나의 신변을 염려하던 고윤아.

몇 마디의 대화가 아귀가 들어맞기 시작했다.

그 말은 그녀가 갑작스럽게 로펌에서 정리된 이유에 태상이 얽혀있음을 예상할 수 있었다.

··· 나 때문이구나.

고윤아는 나 때문에 로펌에서 해고당한 거구나.

머릿속에서 퍼즐이 완성되었다.

태상 건설의 지분을 다량 소유하고 있는 재단의 이사장이 바뀌었다.

태상 건설 입장에서는 당연히 새로운 이사장에 대해 여러 방면으로 조사를 했을 것이다.

응당 내 존재가 노출되었을 것이고, 이 소식은 빠르게 태상 건설의 수장인 장은수 회장의 귀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장은수 회장이겠지.

장은수 회장은 경고를 보낸 것이다.

나의 기댐목을 망가트리는 방법으로.

제기랄.

기승전결이 다 들어맞는 이야기였다.

나는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넘기고 있는 고윤아를 바라보았다.

“석연치 않은 이유였습니다. 사문화된 것과 다름없는 사규까지 들먹였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아직 주니어 변호사에 불과한 저를 쳐내는 것은 일도 아니었겠지요.“

고윤아의 목소리는 겨울바람에 흔들리는 연약한 나뭇가지와 다를 게 없었다.

그녀는 떨고 있었다.

“친한 선배 한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넌지시 말씀해주시더군요. 태상 쪽에서 압력이 들어왔다. 네가 인당수에 몸을 던진 심청이 꼴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광월 정도 되는 로펌이 자기 직원도 지켜주지 못한단 말입니까?”

“태상 그룹이라면 가능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힘이 있습니다.”

하━

깊은 한숨이 나왔다.

“다행입니다.”

뭐라고?

나는 순간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고윤아의 입에서 지금 상황에 전혀 적절하지 않은 말이 나왔다.

“저한테 손을 뻗쳤다면 영수 님께도 해를 끼치지 않았을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전화를 해도 받지 않으시고··· 그런데 다른 사정이 있으셨군요. 이런 말이 지금 영수 님에게는 실례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 차라리 저는 이제 마음이 조금 놓입니다.”

직장을 잃는다는 것이 어디 보통 일인가.

그런데도 고윤아는 다행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오직 내가 무사했기 때문에.

날 걱정해서 한달음에 여기까지 달려 온 것이다.

“뭐가 다행이란 말입니까. 변호사님이 무슨 죄가 있다고. ··· 나랑 얽혀있다는 것 때문에.”

“괜찮습니다. 이 일을 하면서 모아둔 돈이 얼마 정도 있습니다. 공부를 더 할 수도 있습니다. 억울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면 국선변호사를 한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나는 괜찮다.

고윤아의 말을 듣자 부끄러움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한영수. 너 이 새끼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고윤아, 그녀도 저렇게 씩씩한데 왜 그리도 심연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거냐고.

네가 이런 모습으로 있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는 추위 속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몸의 추위가 아니었다.

가슴 안쪽에서 시작된 한기였다.

그런데 지금 내 가슴에 불씨가 일기 시작했다.

불을 댕긴 것은 고윤아였다.

마음의 온도가 비로소 올라가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리자 한영수.

일어나야지.

다시 일어나야지.

할머니가 내 곁을 떠났어도 이렇게 나를 바르게 세워주려고 자기 등을 선뜻 내어주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내가 여기서 더 흔들리면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까지도 흔들리게 될 거다.

나는 뜨거운 눈으로 고윤아를 바라보았다.

화장기없는 그녀의 얼굴이 지금 내 눈에는 세상의 그 어떤 것들보다 아름다워 보였다.

고윤아는 내 눈 속에서 어떤 열정을 발견하기라도 했는지 더 이상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수줍게 고개를 숙였다.

“아쉬운 것은 있습니다. 저는 이제 영수 님에게 큰 힘이 못 되어드릴 것 같습니다. 대형 로펌 소속이라는 영향력이 더는 없으니까요. ···죄송합니다.”

아니야.

당신은 나한테 사과를 하지 않아도 돼.

당신은 존재 자체로 나에게 봄 같은 사람이니까.

“예전에 왜 그렇게까지 날 생각해주냐고 말했을 때 고 변호사는 아무 말도 못 했었죠.”

“··· 아. 그때는.”

“계속 내 옆에 있어 줘요. 이제는 내가 고 변호사를 도울 테니까. 지금처럼 그냥 내 옆에 계속 있어요.”

고개를 숙이고 있는 고윤아의 귀가 붉게 물들었다.

“제가··· 계속 그래도 되겠습니까?”

고윤아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더 이상 내 눈을 피하지 않았다.

나는 두 팔을 벌려 고윤아를 꼭 끌어안았다.

헉━

놀란 듯 고윤아의 입에서 가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나의 품에 안긴 그녀의 몸에서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리고,

스웨터에 감싸진 그녀의 여린 손이 내 허리를 꼭 쥐었다.

우리는 지구와 달과 같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