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할머니, 나의 할머니 (2)
지금으로부터 3년 전이다.
그러니까 아직은 장영복 회장과 복희 할머니가 자신들의 운명을 모르던 때.
그리고 한영수 역시도 자신의 미래에 어떤 일이 있을지 감히 꿈도 꾸지 못하고 있던 때.
“영복아. 식혜 가져왔다.”
여느 때와 같이 장영복 회장의 방문에 제일 먼저 식혜부터 내어준 복희 할머니였다.
꿀꺽━ 꿀꺽━
이제는 인생의 끝자락을 향해가는 노회한 장영복 회장.
돈으로는 무엇이든 살 수 있는 그가 이 세상 어느 진미인 듯 맛보지 못했겠는가.
하지만 그의 입에 여전히 복희 할머니의 식혜는 무엇과 비교해도 가장 달고 맛났다.
“벌써 수십 년을 먹는데 질리지도 않니?”
복희 할머니는 평상에 쭈그리고 장영복 회장 옆에 앉아 물었다.
“누님은 모르는 소리 하지 마시오. 내가 이걸 먹어야 오장육부가 깨끗해지는 느낌이라니까.”
“넉살도. 그래, 오늘은 어쩐 일이니. 이 늦은 시간에.”
흠━
장영복 회장은 회한에 젖은 눈으로 남산 위에 높게 떠 있는 달을 바라보았다.
“우수에 젖었구나. 아주 말론 브랜도가 살아 돌아오기라도 한 것 같아.”
“누님.”
“왜?”
“나 태상건설 회장 자리에서 내려오려고.”
“그러냐.”
오늘 저녁은 삼계탕을 먹었다. 따위의 소리를 들은 것처럼 무덤덤하게 대꾸했지만, 복희 할머니는 새삼 세월의 무상함에 진저리가 났다.
‘너도 많이 늙었구나. 가만 보니 허리가 다 굽었어. 그래··· 우리의 시대는 진작에 끝났지···’
“그 자리는 누가? 큰 놈? 아니면 작은놈.”
“큰 놈.”
“총수 자리까지 같이 넘기려는 것이야?”
장영복 회장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니지. 그래서는 안 되지. 큰 놈은 머리는 좋은데 그릇이 작아. 작은놈은 담대한 구석이 있어 큰일을 해볼 만한데 자기 라인이 없어서 외로워. 보스 기질이 부족한 거지. 은우 고것은 그저 내 욕심만 빼다 박았고.”
“그럼 자식들을 싸움이라도 붙이겠다는 거야.”
“어차피 자식놈들에게 따듯한 정 한번 제대로 줘본 적 없는 못난 아비야. 그 애들도 나를 아비가 아니라 태상 그룹의 총수로 여기고 있고. 어쩌겠어, 내가 더 늙어서 기력을 모두 다 하기 전에 가장 강한 놈이 누군지 뒤에 물러나서 지켜봐야지.”
“영복이, 너 피붙이를 그렇게 대하면 천벌 받아. 이 사람아.”
“누님은 날 알잖아. 내가 어떤 사람인지. 땅속에 묻히고 나서 좋은 곳에 갈 거라는 기대는 조금도 하지 않고 있어.”
장영복 회장의 눈이 달빛 아래서 시퍼렇게 빛났다.
“있잖아, 누님. 내가 누님의 장학 재단에 기부를 좀 하려고 해.”
“기부를? 태상 아래에도 장학 재단이 많은데 왜 굳이”
“태상 건설의 주식 중 4.8%를 기부할 거야. 회사와 상관없이 내 개인 자산의 일부니까 이상하게 생각할 것 없어.”
왜냐고 묻는 복희 할머니의 말에는 대답을 하지 않고 장 회장은 그저 자기 할 말만 했다.
태상 건설 주식의 4.8%.
그건 현금으로 따지자면 물경 5천억에 이르는 엄청나게 큰돈이었다.
아무리 장 회장과 복희 할머니가 평생의 지기라고 할지라도 통 크게 턱 내놓을만한 금액이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 영복이 자네 미쳤는가?”
복희 할머니의 입이 떡 벌어졌다.
어지간한 돈의 액수라면 무덤덤한 그녀에게도 절대 작지 않은 것이었으니.
“왜? 공익재단에 단일 회사 주식 5%까지는 증여해도 세금이 안 붙으니 따로 문제는 없을 것이고.”
“그런 소리가 아니잖아.”
“왜? 명동의 큰 손 차 여사님에게는 너무 작은 액수인가?”
장영복 회장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의 그런 웃음은 아무나 보여주지 않는 보기 힘든 것이었다.
“누님. 할 말이 있어. 우리는 피를 통한 오누이보다 더 가까운 사이가 맞지.”
“아무렴. 근데 네가 뜬금없이 그것 때문에 기부를 하겠다는 것은 아닐 테고. 불지옥이 겁나서 말년에 좋은 일을 하겠다는 건 더더욱 아닐 테고 말이야.”
“내가 이유 없이 행동하는 것을 본 적이 있소? 누님에게 부탁이 있어.”
기부도 지나치면 세금이 붙는다.
4.8이라는 숫자는 그냥 나온 것이 아니었다.
과세의 마지노선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가는 숫자.
복희 할머니의 머릿속에 무언가 번뜩이며 지나갔다.
“영복이, 너 설마···”
“누님을 믿기 때문에 하는 부탁이야. 어느 날 내가 제대로 후계자를 정하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나기라도 한다면 말이야.”
장영복 회장은 마치 자신의 앞날을 예견이라도 하는 듯 말했다.
“내 자식들은 분명히 누님을 찾아올 거야. 돈이 필요해서라도.”
“...”
“그때가 되면 누님이 내 아이들을 한번 잘 살펴봐 줘. 그리고 개중에 제일 나은 녀석이 있다면···”
“네가 기부한 주식을 그 녀석의 우호 지분으로 쓰라는 거지. 뒷배가 되어주라고.”
장영복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아! 만약에 내가 자네보다 먼저 가면 그때는 어쩌려고.”
“거, 달이 참 좋네.”
“말 돌리지 말고.”
“누님. 내 예감이란 게 얼마나 잘 들어맞는지 알고 있지? 왠지 그런 예감이 들어. 누님에게 내 다음을 부탁하게 될 것 같은···”
*
허공의 밀도를 빽빽하게 채우며 땅으로 곤두박질치던 흰 눈.
새벽까지 쏟아지던 눈은 아침 해가 뜨고 나서야 비로소 그치기 시작했다.
지상에 내려앉아 저들끼리 몸을 단단하게 뭉쳤던 눈들은 차도에선 자동차의 바퀴에 깔렸고, 거리를 걷는 사람들에게 무자비하게 밟혔다.
이렇게 밤사이 내린 하얗게 깔렸던 눈은 날이 밟아올수록 거무튀튀한 진흙탕으로 변해갔다.
왜 아름다운 것들은 지고 나면 이렇게 더럽혀지는 걸까.
언젠간 올 날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할머니와의 이별에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경험해본 죽음이라고 해봐야 생부와 생모의 부고뿐이었다.
물론 나는 어느 순간부터 나를 낳은 사람들이 원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랬기에, 그 부고를 접했을 땐 슬픔에 어느 정도 완충지대가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내 손을 잡아주고 두 눈으로 날 따듯하게 바라봐주던 사람과의 최초의 별리(別離)이다.
나는 그 공허함에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것만 같았다.
내가 넋을 잃고 맥을 못 추는 동안 고맙게도 유태성 변호사는 제 할 일을 충실하게 해냈다.
사망진단서를 제출했고, 빈소를 마련했으며, 장례지도사를 고용했다.
그리고 할머니가 미리 만들어놨을 명단을 토대로 부고를 전했다.
그는 상복만 입었다 뿐이지 아무런 구실도 못 하는 나의 오른팔에 검은 줄 2개가 들어가 있는 완장을 달아주었다.
“영수 씨가 상주입니다.”
나는 유태성 변호사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영정사진 속 할머니는 한복을 곱게 입은 채 너무나 자애롭게 웃고 있었다.
개호주, 이놈아!
사진 속 당신은 당장이라도 나에게 그렇게 말을 걸 것만 같았다.
나는 복희 할머니가 좋았다.
당신은 너무나 훌륭한 스승이었기에 나를 알에서 깨고 나올 수 있게 만들어주었지만, 그것이 당신을 좋아한 이유의 전부가 아니었다.
복희 할머니는 내게 어둠 속의 등불 같은 존재였다.
복희 할머니의 말은 항상 버릴 것이 없었다.
허튼소리 하나 없는 당신과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 불확실하고 혼란스러운 세상이 명료하고 또렷하게 보였다.
할머니. 이제 나는 누구에게 의지하나요.
영정사진을 바라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할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개호주! 너 자신에게 의지해야지. 네가 가진 가장 강한 무기가 그것 아니더냐.
아마도, 할머니였다면 이렇게 말씀하셨겠지.
오후가 되자 문상객들이 드문드문 찾아오기 시작했다.
많은 수는 아니었다.
은둔 생활을 오래 한 당신이니 이상할 것도 없었다.
아마도 지금 찾아오는 이들은 할머니와 깊은 인연을 맺어온 사람들일테지.
그들 중에는 놀랍게도 누구나 이름을 대면 아는, 그런 힘과 돈이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구태여 그들을 아는 척하지 않았고, 그들 역시도 나와 할머니에 관계에 대해 캐묻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서로를 마주 보며 절을 하고 유감과 애도, 할머니의 안녕만을 빌었을 뿐이다.
“··· 자기야.”
그렇게 몇 번의 맞절이 지나갔을 때 최화란이 모습을 드러냈다.
당연한 말이었겠지만 그녀의 복장은 평소답지 않게 몹시나 차분했다.
심지어 밝은색의 머리까지 검게 염색한 채 빈소에 나타났다.
만약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그녀를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
“나 선생님께 인사부터 드리고.”
최화란은 나를 향해 고개를 작게 숙이곤 할머니의 영정사진 앞에 섰다.
오른손으로 향을 잡고 초로 불을 붙여 향로에 꽂은 그녀는 몇 발짝 뒤로 물러서 절을 올렸다.
한번.
그리고 두 번.
이제는 일어나야 하는데 어쩐 일인지 그녀는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최화란의 가는 두 어깨가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선생님···”
그녀의 입에서 울음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화란이가 너무 늦게 왔어요. 진작에 선생님을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얼굴 볼 낯이 없어서 이제야 인사를 드려요.”
그녀 역시 할머니의 제자.
아니, 나보다 훨씬 긴 기간 동안 수발을 들었다고 했다.
그녀에게도 할머니와의 사연이 어찌 없겠는가.
“이제 이 년은 살아서는 선생님께 용서받을 도리가 없네요. 명동에서 무릎을 꿇고 안에 들여보내달라고 빌던 것이 이제 이렇게 나이를 먹었는데··· 왜 선생님이 늙어가시는 줄은 몰랐을까요.”
한참 동안 몸을 들썩거리던 최화란은 몸을 일으켜 자기 복장을 정돈했다.
마지막 반절.
복희 할머니에게 인사를 끝낸 최화란은 나에게 다가왔다.
최화란의 눈에는 눈물이 포도 방울처럼 매달려 있었다.
오늘 그녀는 평소처럼 화려한 눈화장을 하지 않고 있었다.
마치 자기가 오늘 펑펑 울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나와 최화란은 다른 문상객들과 그랬던 것처럼 서로를 마주 보고 절을 했다.
“··· 선생님의 마지막은 어땠어?”
“주무시듯 돌아가셨어요.”
최화란은 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있잖아. 자기가 날 찾아와서 내심 좋았던 게 하나 있어. 선생님이 아직 날 잊지 않았구나. 나 있지. 퍽 감동 받았다.”
할머니가 자기 제자인 최화란과 갈라서게 된 계기는 그녀가 할머니의 뜻을 어겼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할머니가 마냥 그녀를 미워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애초에 나를 최화란에게 보내지도 않으셨겠지.
할머니는 최화란을 더러 똑똑하고, 쓸만한 사람이라고 했다.
“기회만 기다리고 있었어. 자기를 통해 다시 선생님을 뵙게 될. 하지만 너무 늦어버렸네.”
최화란의 눈에 고여있던 눈물이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렇게 최 사장님이 왔으니까요. 아마 분명히 할머니도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으실 겁니다.”
“그래. 그럴 거야, 그렇지? 그런데 괜찮아? 눈이 완전히 죽었어.”
최화란의 동공에 내 얼굴이 비쳤다.
그래, 죽은 눈.
그녀의 눈에 비친 나는 말 그대로 영혼이 빠져나간 몰골이었다.
“자기 우리 선생님한테 정말 애틋했구나···”
“당신께 받은 정이 너무 컸나 봅니다.”
“이제 자기랑 나랑 앞으로 못 보겠네.”
최화란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무슨 소리예요.”
“그냥, ··· 그런 느낌이 들어.”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붉은 입술을 다물었다.
그때, 또 다른 문상객이 들어와 최화란 뒤에서 차례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럼···”
최화란은 살짝 나에게 손을 들어 올리고 문상객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할머니, 나의 할머니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