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그날의 진실 (1)
- 미안해··· 엄마가 미안해···
“헉━”
깊은 물 속에 잠겨 있다 수면 위로 고개를 쳐들은 것처럼 앨런 오닐은 깊은숨을 토해냈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그는 어둠 속에서 손을 더듬어 탁상시계를 집어 들었다.
꿈속에서 잠수를 하다가 현실로 돌아온 그의 몸은 물이 아닌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새벽 3시 반.
갑작스럽게 눈을 뜨기에는 영 좋은 시간이 아니다.
‘빌어먹을···’
한동안 끔찍한 악몽에서 자유로웠던 그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한국에 돌아오기가 무섭게 매일 밤 똑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
앨런 오닐은 일생 무언가를 증명 하기 위해 살아왔다.
가족들과 피부색이 달랐기에, 입양아였기에,
그리고 버림받은 아이였기에···
그래서 학창 시절에는 성적으로, 직장에서는 실적으로 자신을 증명하려 했다.
나는 쓸모 있는 사람이다!
그는 세상에 이렇게 외치고 싶었다.
사실, 이번에 한국에 들어오는 것이 염려된 것은 앨런 오닐의 양부모님뿐만이 아니었다.
그 역시도 자신의 고국에 가고 싶지 않았다.
물론 투자은행 시절에도 한국과는 연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동아시아 지역을 담당하면서 수많은 한국 기업들을 자본시장과 연결해주었던 그였다.
한국어를 구사할 줄 알면서도 일부러 그들을 만나면 영어를 사용했고, ‘한국 기업’이 아니라 ‘글로벌 기업’이라는 생각으로 대했다.
하지만, 지금 회사에서 아예 한국 지사를 맡아보라는 오더가 내려왔고, 이에 심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 마음에 거리끼는 것이 있다면 부수고 앞으로 나아가면 될 일이다. 한번 정면으로 부딪쳐보자.’
몇 날 며칠을 고민한 끝에 이런 심정으로 앨런 오닐은 한국행을 결정했다.
- 미안해···
불길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미안하다고 말하는 여자의 얼굴은 꿈에서 깨면 언제나 휘발되어 날아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앨런 오닐은 두 손을 모아 자신이 믿는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제발 이제는 이 고통에서 해방시켜달라고···
*
“미스터 한. 여기가 어딥니까?”
앨런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나에게 물었다.
“여긴 국회 도서관이에요.”
“library? 여기를 왜···”
“기사를 좀 찾아보려고요. 여기에 가면 연도별로 모아놓은 기사들을 확인할 수 있어요. 키워드로 검색도 할 수 있고요. 거기서부터 시작합시다.”
“하지만 연간 벌어지는 화재의 수만 해도 정말 장난이 아닐 텐데요. 둘이서 그걸 다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미 대륙이라면 그렇겠죠. 여기는 미국의 한 개 주 정도의 크기밖에 안 되는 걸요. 하지만 그렇다고 무시는 하지 마세요. 우리는 전 세계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정보검색에 자신이 있는 민족이니.”
하하하━
내 말이 재밌었는지 앨런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건 앨런에게 차마 대놓고 말할 순 없었지만, 나는 분명히 과거 기사에서 무언가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정말로 집에 불을 질러 모자가 동반자살을 하려 했다면?
기사화가 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사회면은 물론이요, 이 모자를 극단적인 상황으로 몰고 간 정부에 대한 비판을 논조로 하는 칼럼이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어쩌면 황색 신문에서는 저주받은 집 따위의 근거 없는 소문을 부풀려 그럴듯하게 선정적인 기사를 썼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말 앨런 오닐이 말하는 그 기억이 정확할까?
사실 나는 그의 말에 근본적인 의문을 품고 있었다.
정말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고 했다면 다른 방법들이 있음에도 그렇게 굳이 그렇게 고통스러운 길을 선택할 이유가 없다.
어쨌든, 여기서도 아무런 실마리를 얻지 못한다면 나로서는 더 이상 이렇다 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혹시 예전 신문 자료를 보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9년도 이후 간행물은 5층 정기간행물실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그보다 훨씬 오래전 기사인데요. 앨런, 정확히 언제죠?”
“아··· 한국 나이로 5살 때니까··· 89년도, 예. 1989년도입니다.”
“그러시면 온라인 열람을 신청하시거나, 마이크로폼 자료를 이용하셔야 해요. 마이크로폼 자료는 정기간행물실 직원에게 문의하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데스크 직원의 안내대로 열람 허가를 받고 본격적인 작업을 위해 자리를 잡았다.
화재라는 키워드로 검색된 89년도의 기사는 총 328개.
눈은 좀 뻐근하겠지만, 빠르게 훑어본다면 한두 시간이면 충분히 볼 수 있는 양이었다.
“미스터 한. 죄송합니다. 저는 말은 할 수 있지만, 한글을 읽지는 못합니다. 저는 도움이 되지 못하겠군요.”
앨런은 나에게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사실 지금 당장은 아무런 대가 없이 그의 일을 돕고 있다.
물론 앨런이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나의 호의에 대해 금전적으로 감사를 표시하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단호하게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겨우 돈 몇 푼을 받자고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끝까지 도와줄 수 없다면 애초에 시작도 하지 않는 게 낫다.
기왕에 빚을 지게 할 생각이라면 확실하게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
그래야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
“괜찮아요. 지루하겠지만 앨런 씨는 잠깐만 옆에서 기다려주세요.”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 지난 11일 오후 6시경. 경기도 수원시의 한 아파트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불은 발생 20분만인 오후 6시 30분쯤 진화되었으며, 주민들의 신속한 대피로 인명피해는 없었다.
- 23일 대구 북구의 한 야산에서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불이 났다. 소방 당국은 헬기 4대와 인력 100여 명을 투입해 한 시간 만에 큰 불길을 잡았다.
- 6일 저녁 ···
기사 대부분은 다섯 줄을 넘지 않는 단신이었다.
벌써 한 시간 째.
슬슬 조금씩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고작 이 몇 줄짜리 정보들의 홍수 속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건져낼 수 있을까?
그때였다.
내 눈에 들어오는 기사가 있었다.
“··· 어?”
- 지난 11일 오후 두 시, 경기도 A 시에서 주택에서 불이 나 이 주택에 거주하던 여성 박 모 씨 (39세) 가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소방 당국에 따르면 주민 신고를 받고 출동한 119 구급대가 현장에 진입하였을 때 박 모 씨는 작은 방에서 발견이 되었으며, 박 모 씨의 아들인 김 모 군(5세)이 함께 있었다고 밝혔다.
모자는 병원으로 급히 옮겨졌으며 김 모 군은 오른손에 2도 화상을 입는 데 그쳤으나, 박 모 씨는 병원 후송 중 사망했다.
찾았다.
정말 있었다. 앨런의 기억과 정확히 일치하는 기사였다.
아마도 가난한 환경이었을 것이라는 앨런의 추측도 어느 정도 맞아떨어졌다.
기사는 구촌(舊村)이 화재에 얼마나 취약한지 경고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있었으니까.
아━
··· 나도 모르게 장탄식이 흘러나왔다.
이것을 어떻게 앨런에게 전해야 할 것인가.
“미스터 한. 왜 그럽니까? 뭔가 찾았습니까?”
내 반응이 심상치 않자 앨런이 눈이 동그래져 쳐다보았다.
“저··· 찾은 것 같습니다.”
“무슨 내용입니까. 미스터 한, 말씀해주세요.”
앨런은 읽지도 못하는 한글을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앨런의 기억이 맞았습니다. 화재가 있었고, 집 안에서 어머니와 아들이 발견되었습니다. 다섯 살 아들은 오른손에 화상을 크게 입었다네요. 그리고···”
“그리고?”
“··· 미안합니다. 여자분은 병원으로 이송되던 중 사망했다고 하네요.”
내 말을 듣자 앨런의 볼이 씰룩거렸다.
“그렇군요···”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처연하게 계속 말했다.
“꿈속에서 저의 어머니는 계속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왜 미안하다고 하는 건지, 왜 그런 짓을 한 건지 이제 영영 알 수 없게 된 거군요.”
앨런은 영혼이라도 빠져나간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비척비척 자료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의 등은 땅으로 꺼질 듯이 굽어 있었다.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켜 그의 뒤를 쫓았다.
“앨런, 저랑 같이 A 시에 가봅시다. 아직 우리는 아무런 진실을 알지 못하잖아요. 그곳에 가면 뭔가 들을 수 있는 것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
“글쎄요, 선생님. 무려 33년 전 신고를 이제 와 확인하기는 좀 어려울 것 같은데요.”
여기는 A 시 소방서.
기사에는 정확한 주소가 나와 있지 않았다.
그래서 소방서에 도움을 요청하려고 온 것이다.
“혹시 모르니까 정보공개 청구를 해보시던지요.”
젊은 소방관은 난감하다는 얼굴을 하곤 우리에게 막연하게 행정 절차만 알려주었다.
그의 입장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아직 서른셋도 안되어 보이는 그에게 자기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곳에서 있었던 신고를 확인해달라고 하는 셈이었으니까.
나는 일단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명수야. 무슨 일인데 그래?”
연륜이 있어 보이는 다른 소방관 한 명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주황색 유니폼을 입고 있는 그의 왼쪽 어깨에는 육각수 모양의 커다란 문양이 하나 달려 있었다.
“아, 센터장님 오셨어요? 이분들이 33년 전에 여기서 있었던 신고에 대해서 여쭤보셔서요. 정보공개 청구 절차 안내해드리고 있었어요.”
“33년 전? 89년도잖아. 나 그때도 여기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센터장의 말을 듣기가 무섭게 앨런이 끼고 있던 장갑을 벗고 주임 앞에 손을 내밀었다.
“저, 소방관님. 그때 저 다섯 살이었습니다. 화재로 오른손이 이렇게 되었고요. 제 어머니라고 생각되는 사람은··· 그날 화재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혹시 기억나시는 것이 있습니까?”
어···
센터장의 입에서 신음처럼 짧은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
“허허허···”
그의 입에서 나오던 바람 소리는 곧이어 알 수 없는 웃음으로 바뀌었다.
“혹시 어수동 화재 말하는 거예요? 모자가 불난 집 안에 갇혀있던···? 맞아. 그래. 그때가 89년도쯤이었지. 그럼 그쪽이 그때 그 아이?”
“장소는 정확히 모릅니다. 하지만 맞습니다. 제가 그 아이가.”
“허··· 일단 이쪽으로 와서 좀 앉으세요.”
센터장은 우리를 한쪽 구석에 있는 민원인용 테이블로 안내했다.
“그날 일은 대강은 기억해요. 아직 초임 때였고, 현장에서··· 미안합니다. 사망자가 나온 신고는 처음이었으니까요.”
“그럼, 그 현장에 계셨던 겁니까?”
“있다마다. 저쪽 분, 성함이···”
센터장의 시선이 앨런을 향했다.
“오닐, 앨런 오닐이라고 합니다. 앨런이라고 불러주세요.”
“허허, 외국으로 입양이라도 되신 건가? 사연이 참 많으시겠구만.”
“예. 맞습니다.”
“그래요. 불구덩이 속에서 앨런 씨를 안고 밖으로 나온 게 바로 접니다. 그때 손이 화상으로 다 오그라들었었는데··· 내가 어찌나 마음이 아프던지. 지금은 좀 어때요?”
“예. 수술했습니다. 좀 흉하긴 해도 신경은 다 살아있습니다. 움직이는 데 지장은 없어요. 그럼··· 소방관님이 저를 살려주신 거네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앨런은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센터장을 향해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센터장은 두 손을 흔들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나야 할 일은 한 것뿐이고. 오히려 미안하지. 어머니도 살렸어야 했는데···”
센터장은 앨런의 감사 인사에 오히려 미안하다며 송구스러워했다.
“혹시 그때 자초지종에 대해서는 좀 기억나시는 것이 있습니까? 혹시 유서가 발견되었다든지···”
센터장은 나의 물음에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렇게까지는 자세하게 기억이 안 나요. 다만 경찰 조사 결과 단순 사고사로 결론 내렸다는 이야기는 들었던 것 같은데. 유서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만약에 있었다고 해도 그때 집이 거의 전소가 된 상황이었으니 남아있을 턱이 없죠. 그래도 내가 주소는 기억이 나. 아직 그쪽은 뭐 개발도 안 되고 해서 그때랑 거의 그대로예요. 어떻게, 주소라도 알려드릴까?”
나와 앨런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의 진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