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검은 머리의 이방인
고왕건설 그룹.
도급순위에서 압도적 1위인 태상건설 바로 아랫자리를 엎치락뒤치락하는 건설사.
60년대에 고속도로 건설에 참여하며 의미 있는 건축, 토목 사업 실적을 쌓았고 70년대와 80년대 해외 수주를 통해 폭발적으로 성장한 기업이었다.
석유화학, 리조트 등 제법 굵직한 계열사를 두고 있는 고왕건설 그룹은 소위 말하는 대한민국 5대 메이저 건설사 중의 하나였다.
여타 다른 건설사들이 모기업의 이름 아래 펼쳐지는 다양한 사업 중 하나라면, 자신들은 우직하게 건설업 분야 한 우물만 파왔다는 걸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 그들이기도 했다.
사실 나는 고왕건설에 대해 씁쓸한 기억이 하나 있다.
대학 졸업 후 패기 있게 입사 원서를 냈지만, 1차 서류조차 통과하지 못하고 물을 먹었기 때문이다.
뭐, 그렇다고 해서 이제와서 사감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덕분에 지금 이 회사에 대해 떠들 거리라도 생긴 셈 아닌가.
“하하하! 최 사장!”
“어머, 회장님. 이게 얼마 만이에요.”
바지런히 회장을 맞을 준비가 끝나기가 무섭게 풍채 좋은 윤일중 회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왕건설 그룹의 2대 회장인 윤일중은 올해 53세로 재계에서는 호인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다만 사람 자체가 좀 경박하고 그런 만큼 경영에는 실속이 없어 선대가 이뤄놓은 회사를 지키기에만 급급하다는 세평이었다.
확실히 실물로 그를 보게 되니 그런 평가가 영 틀린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기업의 총수가 사채업자를 찾는다는 것이 뭐 그리 좋을 일일 것도 없을 텐데, 윤일중 회장은 연신 하하 큰 소리로 웃어젖히기 바빴다.
그에게선 어떤 위기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그는 한 그룹의 총수보다는 중년 희극배우가 어울릴 것 같은 사람이었다.
“응? 그런데 옆에 젊은 양반은 누구 신가?”
“제 두뇌랄까요? 믿을만한 아이니까 여기에 있어도 되죠?”
“그럼! 안될 게 무어야. 난 또 최 사장의 이거인 줄 알았지.”
윤일중 회장은 다른 손가락을 접은 채로 새끼손가락만 슬쩍 들어 올렸다.
“어머··· 그렇지 않아도 어떻게 한번 해보려고 해도 저한테는 아주 철벽을 치더라고요.”
최화란은 윤 회장의 실없는 농을 깔깔거리며 원숙하게 받아넘겼다.
“자기야, 뭐해. 인사 올려. 고왕건설 그룹 윤 회장님.”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처음 뵙겠습니다.”
“어, 젊은 친구가 참 잘생겼네. 가만, 그런데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우리 구면인가?”
아마도 윤 회장은 나에게서 장영복 회장을 본 것이겠지.
장 회장 생전에 그에게 강한 라이벌 의식을 가졌다던 윤일중 회장이다.
나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끈적한 피는 어디서든 그 흔적을 남겼다.
“초면입니다. 저야, 당연히 회장님의 얼굴을 알고 있었지만요. 사실 예전에 고왕건설에 입사지원서를 냈었습니다.”
“그래? 그래서 결과는 어찌 되었는데?”
“아마 그때 합격했으면 지금 여기에 없지 않을까요?”
“하하하! 이거 본의 아니게 내가 미안하게 되었구만. 아, 나도 소개할 사람이 있지. 나랑 같이 온 이쪽 말이야···”
그랬다.
윤일중 회장은 오늘 이곳에 혼자 오지 않았다.
그의 옆에는 깔끔한 차림의 안경을 쓴 남자가 서 있었다.
사실 윤일중 회장보다 더 관심이 가는 그였다.
굳게 일자로 다문 입에서는 단단함이 느껴졌고, 눈은 사리에 밝아 보였다.
무표정한 얼굴 탓에 감정을 읽기 어려웠지만, 전체적으로 이지적인 느낌이 풍기는 남자였다.
다만 이상한 점이 있다면 실내임에도 손에 낀 장갑을 벗지 않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쪽은 미스터 오닐. 세계적인 투자은행 GM 알지? 거기 동아시아 지부에서··· 가만, 자네 직급이 뭐였더라.”
“IBD 부서에서 Senior Vice President까지 있었습니다. 회장님.”
“그래. 맞아 그랬지.”
“반갑습니다. 앨런 오닐입니다. 지금은 오션 인베스트먼트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오션 인베스트먼트라.
이제 막 경제 공부에 재미를 붙인 나에게도 생소한 곳이 아니었다.
속칭 OI라고 불리는 그 사모펀드는 그쪽 분야에서는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회사였다.
운용자산이 무려 9,000억 달러에 달한다는 월스트리트의 공룡.
앨런 오닐은 이름과 달리 누가 봐도 한국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보통 한국계라면 마틴 킴이라든지, 뭐 애덤 박이라든지 국적을 예상할 수 있는 이름을 쓰기 마련인데 조금 특이하달까.
미스터 오닐은 나와 최화란을 향해 목례를 하곤 오른손의 장갑을 슬쩍 벗어 보였다.
저런···
그의 손등에는 커다란 화상 흉터가 있었다.
“예의가 아닌 줄 알지만, 손이 이래서 악수 말고 인사로 대신합니다.”
장갑을 다시 끼며 그가 말했다.
“어머, 한국어가 엄청 유창하시네요? 재미교포신가요?”
“아닙니다.”
앨런 오닐은 고개를 저으며 딱 잘라 말했다.
내가 알기로 오닐이라는 성은 아일랜드 이민자 혈통이 쓰는 것으로 알고 있다.
뭔가 출생에 복잡한 사연이 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하하! 국적이 뭐가 중요한가. 미스터 오닐이 몸에는 한국인 피가 흐르고 있으니까 말이야. 안 그래?”
“맞습니다. 회장님.”
윤 회장의 말에 동의하긴 했지만, 앨런 오닐의 표정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미스터 오닐과는 GM 시절부터 끈끈한 관계를 맺어오고 있어. 그런데 이번에 우리 회사와 OI가 투자적 파트너십을 맺었는데, 이 친구가 담당이 되었지 뭔가?”
최근 건설 경기가 최악이라는 말은 굳이 관심을 가지지 않아도 알 정도로 언론에서 연신 경보를 때리고 있었다.
강원도에 테마파크 건설을 주도했던 개발공사가 부도가 나면서 부동산 경기가 차갑게 경색되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원자잿값은 두 배 가깝게 올랐다.
지금 윤일중 회장은 투자적 파트너십이라고 예쁘게 포장하고 있지만, 결국 자금의 확보를 위해 OI에서 회사 주식을 일정부분 팔아넘겼다는 소리일 것이다.
직접 최화란을 찾아온 이유도 일맥상통일 터.
우선 돈이 필요했을 것이고, 두 번째로 앨런 오닐에게 직접 자신의 자금 동원력이 끄떡없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아마도 지금 같은 시기에 다른 대기업이라면 내부적으로 자금순환을 돌려 그나마 숨구멍은 만들 수 있었겠지만, 오직 건설 분야에만 매진하고 있는 고왕 같은 경우에는 그마저도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최화란은 눈치 빠르게 윤 회장에게 말했다.
“그나저나 회장님, 역시 화란이를 찾아오신 이유라면 그거겠죠?”
최화란은 자기 이름처럼 윤일중 회장을 보며 화사하게 웃었다.
“하하하! 최 사장은 대화가 빨라서 좋아. 그래. 구 회장님과 자리 한 번 만들어줘.”
“예. 말씀 전하겠습니다.”
아무래도 나와 앨런 오닐의 눈도 있고 최화란도 여기서는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을 테니, 둘은 대화는 함축적이고 짧았다.
두 남자와 한 여자.
나를 제외한 이들은 인사치레 같은 실속 없는 이야기만 계속 나누었지만, 이 이면으로 얼마나 큰 돈이 오고 가고 있을지 쉽게 짐작이 되지 않았다.
“그나저나, 한영수라고 했지? 자네는 우리 회사에 지원했다고 하니까 물어보는 건데··· 요즘 건설 경기에 대해서 어떻게 보나?”
윤일중 회장은 혼자 입을 닫고 있는 나에게 배려라도 한다는 듯이 뜬금없이 질문을 던졌다.
“글쎄요. 그쪽에 문외한인 제가 말한들 회장님 귀에는 아이들 장난으로 들리실 텐데요.”
“하하! 그래도 자네가 최 사장이 이거라며?”
윤 회장은 손가락으로 자기 머리를 톡톡 쳤다.
“훈수에 급수가 있나. 그러지 말고 생각나는 데로 한번 말해봐.”
“제 짧은 생각으로는··· 최근 장기적으로는 그동안 과열됐던 부동산 시장이 금리 인상으로 찬물을 뒤집어쓰면서 고배를 피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서울과 수도권에 짓기만 해도 완판되던 아파트들이 미분양 나기 시작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거시적으로 보면 당연한 이야기겠죠.”
“장기적이라는 건 단기적인 문제도 있다는 건가?”
“예. 여러모로 비관적이긴 합니다. 특히나 건설업은 부동산 PF로 자금을 많이 조달하시지 않습니까? 이번 테마파크의 디폴트의 여파로 금융권에서 건설 쪽에 사업성이 없다고 판단해 대출을 막거나 재연장을 해주지 않기라도 하면··· 생각만 해도 오싹합니다.”
“허허··· 그렇지.”
내내 여유롭던 윤일중 회장의 안색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의 표정을 보아하니 어설픈 내 추측이 핵심을 영 벗어난 것은 아니라는 소리.
제기랄, 한영수 너 많이 컸구나.
날고 긴다는 재벌 회장의 얼굴도 굳게 만들고.
“아이참, 자기도 회장님 모시고 기운 빠지는 소리 그만해. 회장님은 든든한 뒷배가 있으시잖아요. 아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최화란이 능숙하게 분위기를 바꾸었다.
그렇게 30분쯤 더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윤일중 회장과 앨런 오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 사장. 그럼 일정 잡히는 대로 우리 비서실 쪽으로 연락을 좀 줘.”
“예. 회장님.”
“응, 나오지 말고··· 그리고 자네, 한영수. 이야기 즐거웠네.”
“아닙니다. 제가 짧은 소견으로 괜히 회장님 심기를 어지럽힌 것 같아 죄송합니다.”
최화란은 윤 회장이 문을 열고 나갈 때까지 두 손을 앞으로 공손히 모은 채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쿵━
그녀의 태도는 문 닫히는 소리가 나기 무섭게 180도로 변했다.
“자기, 아까 윤 회장님 앞에서 했던 소리. 정말이야?”
최화란은 날카로운 눈빛은 내게 대답을 갈구하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예측입니다. 하지만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상정해야죠.”
“그래··· 고왕건설에 들어간 구 회장님의 돈이 작지 않은데···”
그때였다.
방금 윤 회장과 함께 밖으로 나갔던 앨런 오닐이 혼자서 다시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 짧은 찰나에 최화란은 표정을 바꾸며 가면을 썼다.
“왜? 뭐 두고 가신 거라도···”
“아니···”
나와 최화란에게 다가온 앨런 오닐은 무언가 말하기를 주저하고 있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가 입을 뗐다.
“사실 윤 회장님과 동행을 승낙한 건 개인적으로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서입니다.”
“부탁이요? 뭘까요?”
“개인적인 사정이지만, 저는 한국에서 태어나 다섯 살 때 미국으로 입양이 되었습니다.”
역시나.
뭔가 복잡한 사연이 있을 것 같더니 이거였나?
“한국에 들어온 지 이제 세 달째입니다. 사실 잊고 살려고 했는데 막상 여기에 오니 제 출생에 관해 관심을 안 가질 수가 없군요.”
“설마··· 사람이라도 찾아달라는 건가요?”
“제가 듣기로 사장님은 돈뿐만이 아니라 한국식 표현으로 이곳저곳 발이 넓다고 들었습니다. 바쁘실 테지만 도움을 좀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어쩌지? 우리는 그런 거 하는 사람들이 아닌데?”
최화란은 곤란하다는 듯이 앨런 오닐에게 말했다.
그녀의 말을 듣고 잠시 얼굴에 그늘이 졌던 앨런 오닐은 이내 포커페이스로 돌아와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그렇군요. 제가 실례를 했습니다. 그럼···”
흠━
나도 모르게 자기 뿌리를 찾으려는 그의 모습을 보자 한숨이 나왔다.
동병상련이라고 앨런 오닐의 모습에서 과거의 나를 보았달까.
··· 내가 도와줄까?
어쨌든 사람을 남기는 일을 하려고 마음을 먹은 나다.
사모펀드에 대해 안 좋은 이미지는 분명 가지고 있다.
하지만 세계적인 투자그룹의 임원과 연을 터놓으면 장차 손해 볼 것은 없으리라.
빠르게 판단을 내리고 등을 돌려 발걸음을 떼고 있는 앨런 오닐을 향해 입을 열었다.
“··· 잠깐만요. 다섯 살에 어느 기관에서 입양 보내졌는지는 아시고요?”
미스터 오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