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낮과 밤
“대단한 미인인데? 뭘까. 자기 애인이라도 되는 거야?”
“그런 거 아닙니다. 저한테는 고마운 사람이에요.”
당연히 일부러 피한 것은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고윤아와 연락을 안 한 지도 꽤 되었다.
복희 할머니 옆을 지키면서 새로운 배움에 흠뻑 빠져 다른 데는 일절 신경을 못 쓴 탓이었다.
고윤아.
생각해보면 사실 모든 이야기의 시작은 그녀에게서 비롯되었다.
이후로 고윤아가 옆에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나에게 물심양면으로 큰 도움을 준 그녀다.
앞에 앉아있는 최화란에게는 미안한 소리지만, 그녀가 어둠 속에서 유혹적으로 발하는 불꽃이라면, 고윤아는 봄날의 태양처럼 따스한 온기를 품은 빛이었다.
“자기, 지금 아까 그 여자 생각하고 있었지.”
잠시 머릿속으로 고윤아를 떠올리고 있을 때 최화란이 훅 치고 들어왔다.
역시나 눈치가 보통이 아니다.
“이거 질투 나려고 하네? 사람 앞에 두고 말이야. 나도 여자라고?”
“뭔 소리예요. 고기 다 식습니다. 얼른 밥이나 먹어요, 우리.”
“그런데 말이야. 자기는 아무 사이 아니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저 여자는 그렇지 않은 거 같은데?”
고개를 들어 최화란의 입을 바라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 내가 뭘 봤게?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하더라. 자기한테 소중한 사람이면 말 잘해야겠어. 괜히 오해받지 말고.”
“됐습니다. 오해받고 말고도 없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고윤아에게 마음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
“사장님. 잘 먹었습니다. 들어가세요.”
“왜, 자기도 같이 차 타고 가지.”
미리 대기시켜놓았던 차 앞에서 최화란이 말했다.
나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좌우로 저어 보였다.
“아닙니다. 저는 그냥 좀 걷다가 지하철 타고 들어가면 되니까요.”
“왜, 내가 한 잔 더 하자고 할까 봐 겁나?”
최화란은 눈을 가늘게 뜨며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차 뒷문을 잡은 채로 몸만 내 쪽으로 숙였는데, 향수 냄새가 아찔하게 풍겨왔다.
일부러 눈을 거기에 둔 건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그녀의 깊게 파인 원피스 안으로 가슴골이 훤하게 보였다.
“갑니다. 저는.”
나는 그녀에게서 뒤로 몇 발짝 물러섰다.
최화란은 아주 잘 벼려진, 아름다운 칼 같은 여자다.
그렇기에 함부로 잡아서는 안 된다.
설령 칼날이 아닌 칼자루를 잡았다고 하더라도 어느 순간 내 손에 피가 묻어있을지도 모르니.
아직 집에 들어가기에는 이른 시간.
나는 길을 조금 더 걸었다.
이제 막 1차가 끝내고 거리로 나왔을 것 같은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상기된 얼굴로 소란스럽게 자기들만 아는 이야기를 떠들고 있었다.
이렇게 한 해가 가는구나.
연말의 강남 한복판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액정화면을 보니 고윤아로부터 걸려 온 전화였다.
“변호사님.”
“영수님, 식사 끝나셨습니까? 저도 이제 식사 마치고 나가려는데 자리에 안 보여서.”
“네. 지금 막 나온 참입니다. 아깐 제대로 인사도 못 했네요.”
“아직 일행분이랑 같이 있으십니까?”
여전한 고윤아의 화법.
오랜만에 듣는 그녀의 또박또박한 말투가 반가워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니요. 헤어졌어요.”
“저도···”
“그래요? 저 멀리 안 갔는데, 우리 잠깐 볼까요?”
“네. 저는 좋습니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고윤아가 기다렸다는 듯 바로 대답했다.
“그럼, 저 여기 앞에 카페에 들어가 있을게요. 주소 보내 줄게요.”
음료를 주문하고 얼마 기다리지 않아 고윤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추운 날씨에 뛰어오기라도 했는지 카페 안에 들어오기 무섭게 그녀의 입에서 하얀 김이 나왔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내 앞에 자리를 잡고 앉은 고윤아는 내 안색부터 살폈다.
“믿지 못할 일의 연속이죠. 요즘에는 뭐랄까. 세상 공부를 하고 있어요.”
“세상 공부 말이십니까?”
가뜩이나 큰 고윤아의 눈이 아리송한 내 답에 물음표를 띄우며 크게 열렸다.
“네. 장은호 회장에서부터 시작된 일인데요···”
나는 그간에 있었던 일을 고윤아에게 하나씩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내 이야기를 조용히 귀 기울여 경청했다.
내가 한참을 떠들고 나서야 그녀는 가만히 입을 열었다.
“그런 일들이 있었습니까? 저도 말로만 들었습니다. 큰 손이라는 사람들은 워낙에 소문만 많고 실체는 무성하지 않습니까.”
“그러게요. 사람 일이라는 게 참···”
“영수 님은 자석 같은 사람입니다.”
“자석? 갑자기요?”
고윤아는 내게 뜻 모를 말을 꺼냈다.
“아시다시피 저는 장 회장님을 가까이서 모셨습니다. 회장님께서는 저에게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도 거리낌 없이 털어놓으셨었습니다. 하지만 영수님이 말한 할머님에 대해서는 저도 처음 듣습니다. 그런 분에게까지 인연이 닿았다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
“저는 그게 영수 님이 가진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을 끌어드리는 자석 같은 힘.”
사람!
생각해보면 500억이 생긴 뒤에 나를 새로운 곳으로 이끈 것은 돈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인연은 새끼를 치듯 또 다른 인연을 만들어냈다.
물론 그게 내 능력 때문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사람에게는 시기가 있는 법이고, 그저 운 좋게 흐름을 잘 타고 있을 뿐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고윤아의 말은 다시 한번 나에 대해 생각해보게 했다.
정말 이 흐름이 나에게서 비롯되고 있는 것이라면?
그녀의 말 한마디에 갑자기 우주의 창조자라도 된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사실··· 복희 할머니를 만나고 난 이후에 생각들이 많이 바뀌었어요. 예전에는 물려받은 돈으로 그저 하고 싶은 것 하면서 편하게 살면 그만이라는 마음이 강했는데, 지금은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한번 확인해보고 싶어요.”
“원하시면 반드시 그렇게 되실 겁니다. 영수님이라면··· 저도 영수 님을 보면 제 인생을 맡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 예?”
“아··· 아니 그러니까, 제 말은···”
고윤아는 제풀에 놀라 자기가 뱉은 말을 어떻게든 수습해보려고 허둥지둥하였다.
변호사로서 프로다운 모습과 지금같은 모습의 갭 차이 또한 고윤아의 매력.
“변호사님.”
나는 가늘게 웃으며 고윤아를 불렀다.
“아무 생각 하지 말고 딱 1분만 숨 쉬는 데 집중해보세요. 아시겠죠? 절 따라 해보세요. 들이마시고··· 내쉬고···”
아주 예전에 고윤아가 공황 상태에 빠졌던 내게 했던 말이다.
나는 그 말을 그대로 장난스럽게 갚아주었다.
“영수님, 그건 제가 예전에 드렸던 말입니다만.”
얼굴이 사과같이 새빨개졌던 고윤아도 날 따라 웃었다.
그 덕분에 잠시 어색해졌던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풀렸다.
“자주 봐요. 나도 변호사님과 같이 있으면 든든하고 마음이 편합니다.”
“··· 정말입니까.”
“그럼요. 내 모든 이야기를 숨김없이 다 털어 놀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딱 한 명 변호사님밖에 없어요.”
“저 그럼··· 혹시 아까 같이 있었던 분은.”
고윤아는 마침내 꾹꾹 참았던 질문을 슬쩍 입에 올렸다.
“아까 이야기 중에 말했던 대부업자입니다. 할머니의 제자요. 오늘은 내가 도와준 일이 있어서 식사 자리를 함께 한 거고요. 그게 전부입니다.”
더할 것도 덜 것도 없는 담백한 답변이었다.
비로소 고윤아의 얼굴에 안도의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였다.
창밖으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변호사님 눈 와요!”
나는 손가락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올해의 첫눈.
거리는 소복하게 쌓인 눈으로 하얗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 둘은 한참 동안 말없이 내리는 눈을 바라보았다.
*
“그러니까, 우리 사장님께서는 돈은 많은데 당장 현금이 없다. 이 말씀이신 거죠?”
“그래요. 내가 미국에서 크게 중고차 사업을 하고 있어요. 한국에 놀러 왔는데 카지노에서 크게 털린 거야. 급전이 필요해서 이렇게 찾아온 거고.”
지금 최화란은 고객을 응대하고 있었다.
자신을 재미교포 2세라고 소개한 남자는 영어로 된 온갖 서류들을 최화란 앞에 내밀었다.
“이거 봐요. 우리 회사를 증명하는 문서들. 내가 사실 고작 10억 때문에 이런 데 올 사람이 아닌데.”
“사장님. 이거 어쩌죠? 저는 무식해서 영어 몰라요.“
남자는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쾅쾅 쳤다.
”It's so frustrating!"
혀에 버터 바른 발음으로 영어를 내뱉은 남자는 휴대전화를 최화란의 얼굴 앞에 내밀었다.
“봐요. 이거 다 미국에서 내가 하는 중고차 판매장들. 여긴 LA, 여긴 피닉스, 그리고 여긴···”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담보 하나 없이 어떻게 돈을 빌려드리나요.”
최화란의 목소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달달했지만, 남자를 쏘아보는 눈매는 날카로웠다.
“자! 여기 내 여권! 여권 맡기겠습니다. 나 미국에 있는 재산이 3천만 달러가 넘어요. 이렇게 합시다. 나 다음 달에는 미국 돌아가야 해요. 미국 가려면 여권 있어야죠? 일주일에 이자 10%씩 내겠습니다.“
한 달 남짓 10억을 빌려주면 무려 4억을 이자로 내겠다는 소리.
“자기야, 이거 어떻게 생각해?”
꿀 같은 제안에 고민이 되는 모양이었다.
최화란은 옆에 앉아 묵묵히 지켜보던 내게 말을 걸었다.
“고민하고 말고가 뭐 있습니다. 여권이야 얼마든지 위조할 수 있는 거고, 정체도 확실하지 않은 사람을 종이 몇 장 보고 10억을 턱 내놓으면 그게 미친 짓이죠.”
“역시 그렇지?”
최화란은 어쩌냐는 듯 남자를 향해 어깨를 으쓱 해 보였다.
“you're fucking me out. Even if not for you, there are plenty of place to borrow money.”
남자는 혼자서 계속 영어로 떠들며 화를 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쾅━
남자가 문을 닫고 나가자 최화란은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저 사람이 말한 게 진짜면 어떡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명품이던데. 돈 냄새는 좀 풍기던걸?”
“바로 그 옷 때문에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던데요. 입고 있던 슈트 재킷, 자기 몸보다 어깨선이 너무 많이 남아요. 그래서 막 울 정도던데. 그리고 소매도 거의 손등을 반을 덮을 정도로 길고. 돈이 그렇게 많은 사람이 자기 몸에 맞지도 않는 저런 큰 옷을 사 입을 리 없잖아요.”
“··· 남의 옷을 어디서 빌려 입고 왔다?”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거의 틀리진 않을 것 같은데요. 그렇게 자기 모습을 속이고 돈을 빌리려는 사람을 뭘 보고 믿어요.”
“대단하네. 자기 무슨 셜록 홈스라도 되는 거야?”
대부업자라고 해도 항상 돈의 승부에서 이기는 것은 아니었다.
세상에는 다양한 종자들이 있어, 오히려 사채업자들의 뒤통수를 치려고 덤벼드는 간 큰 사기꾼들도 있었다.
지금 재미교포라고 떠들던 저 남자 역시 그런 족속 중 하나였을 것이다.
최화란이 직접 상대하는 고객들은 한정되어 있었다.
피라미들은 밑의 직원들이 관리했고, 최소한 일정 정도 이상의 돈이 오갈 때만 전면에 나섰다.
그 덕에 나는 회장님이니, 사장님이니 호칭을 달고 있는 인간군상들을 그녀 옆에서 수없이 볼 수 있었다.
“뭐? 윤 회장님이 오신다고? 지금? 알았어.”
아니나 다를까, 지금도 아래 직원으로부터 걸려 온 전화에 최화란의 입에서 또 회장이라는 소리가 나왔다.
“이번에는 또 무슨 회장입니까?”
전화를 끊은 최화란에게 내가 물었다.
내 말에 그녀는 소리 높여 깔깔 웃었다.
“회장이라도 다 똑같은 회장이 아니지. 지금 이 회장님은 진짜 거물인걸? 고왕건설 윤일중 회장이라고 들어봤어? 지금 오고 계신다니까 자기는 어디 가지 말고 내 옆에 딱 붙어 있어.”
검은 머리의 이방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