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가치관의 차이
“그래. 개호주, 네가 대어를 낚았구나.”
복희 할머니가 입원해 있는 병실.
이 병원에서 가장 좋은 병실을 혼자 쓰고 있는 당신이었다.
호화스러운 호텔 방 못지않게 좋은 곳이었다.
다만,
복희 할머니는 날이 갈수록 점점 야위어갔다.
암과 싸워보겠다는 당신의 의지는 몸속 깊숙하게 자리를 잡은 병마의 강력한 도전을 받아야 했다.
진통제에 의존한 연명치료.
당신의 남은 날들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롭기만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복희 할머니의 손을 꼭 잡아드리는 것뿐.
그래도 할머니는 나를 보면 억지로라도 꼭 웃어 보이셨다.
사실, 구동일을 뺑뺑이 돌리는 동안에도 나는 계속 최화란의 사무실에 출근도장을 찍었고, 또 할머니를 찾아뵈었다.
“천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더니, 구 회장이 자식 때문에 그렇게 속이 시끄러운지는 몰랐구만.”
“그래도 구 회장 아들이 본성 자체는 악하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이번 기회에 분명 뭔가를 깨달았을 거예요.”
“그래, 구 회장에게 받은 돈은 어떻게 했느냐?”
“최 사장에게 돌려줬어요.”
구 회장은 내게 수고비까지 넉넉하게 포함해 5억을 내주었다.
그것도 무려 현금으로.
물론 그 돈을 내가 다 가져갔다고 해도 최화란은 아무 말도 못 했을 것이다.
애초에 그녀는 구 회장과의 문제만 해결된다면 돈은 상관없다고 했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구동일이 빌린 돈과 그간의 이자를 1원 한 장 빠트리지 않고 정확히 계산해 최화란에게 돌려주었다.
당연히 남은 수고비야 내가 가져가야 할 몫이고.
이유는 있었다.
사람이라면 응당 화장실 들어가기 전과 나온 후의 마음이 달라지기 마련.
최화란은 돈에 관해서라면 지독한 구석이 있었다.
내가 만약 그 돈을 혼자 다 먹었다면 내게 어떤 올가미를 칠지 모르는 여자였다.
그렇게 뒤통수를 맞느니 차라리 최화란에게 마음의 빚이나 하나 안겨주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왜 돈을 돌려주었냐고 묻는 복희 할머니에게 나는 생각한 그대로를 말씀드렸다.
할머니는 내 말을 듣고 고개를 가만히 끄덕이셨다.
“그래. 어떠냐. 화란이를 따라다니면서 뭔가 느낀 것이 있느냐?”
“뭐, 눈치껏 기술적인 것들은 어깨너머로 들여다봤어요. 대부분 음성적이었던 것들이지만. CD나 채권으로 현금 세탁하는 법··· 돈 심부름··· 사람 쥐어짜는 법. 이런 것들요.”
“그래, 돈놀이가 재미있어 보이던?”
나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확실히 알았어요. 거기는 제가 갈 길이 아니에요. 그래도 하나 느낀 건 있어요. 부자건 빈자건 다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요. 사람이라면 누구나 욕망이 있고 그 욕망을 흔들기에 따라 얼마든지 그 사람을 내 편을 만들 수 있다는 걸요. 앞으로 제가 뭘 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사람을 남기는 일을 하고 싶어요. 사람을 남기면 돈은 알아서 따라온다는 걸 배웠어요.”
“그래. 암. 그래야 개호주 답지.”
자애가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할머니가 갑자기 한숨을 푹 내쉬었다.
“··· 화란이, 고년. 내가 화란이를 왜 내쳤는지 아느냐?”
그러고 보니 그랬다.
최화란은 교태라는 가면을 쓰고 자신의 속마음을 숨기는 타입이었는데, 복희 할머니 이야기가 나오면 그 가면에 조금씩 균열이 생겼었다.
언젠가 내가 같이 할머니를 찾아뵙자는 말에도 불편한 기색으로 손사래를 쳤었다.
“화란이, 내 밑에서 3년을 수발을 들었어. 참 똑똑한 아이였다. 그 애를 내보낼 때 약속을 하나 했었어. 큰 줄을 하나 쥐여줄 테니 절대 개인을 상대로는 돈놀이를 하지 말라고.”
잠시 말이 없던 할머니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의 이야기지. 어느 날인가 화란이가 한 달 무이자라는 조건을 내걸고 TV에 광고를 내기 시작하더구나. 한참 나중에야 다른 대부업자들도 화란이의 수법을 다 따라 했지만, 그때만 해도 화란이가 처음이었으니··· 화란이에게 돈을 빌리겠다는 사람들이 문전성시를 이뤘다. 영수 너는 이자로 먹고사는 대부업자가 왜 그런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그렇게 했다고 생각하니?”
“··· 글쎄요? 자기 회사를 홍보하려고요?”
“녀석! 이 할미가 항상 모든 일을 깊게 생각하라고 했거늘. 그렇게 단편적으로 세상을 봐서는 안 된다. 그때 화란이의 광고에 혹해 돈을 빌린 사람들은 대부분 철없는 젊은이들이었어. 간단한 신원 조회만으로 몇백만 원을 내주니 복잡한 절차가 없었고, 한 달 공짜로 돈을 빌려 쓰는 것이니 잠깐 쓰고 얼른 갚으면 된다는 생각이었겠지. 여기에 혹해 너도, 나도 화란이에게 손을 벌렸다. 하지만 돈이라는 것이 어디서 도깨비방망이 휘두르는 것처럼 뚝딱 나오는 것도 아니고 아차, 싶어 그제야 은행을 찾으면 과연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아···!
할머니가 좀 더 부연 설명을 해주자 뭔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은행에서 대출을 거절당했겠군요. 애초에 신용이랄 것도 없는 젊은 사람들이 사채에까지 손을 대었으니 신용등급은 뭉텅이로 썰려 나갔을 것이고···”
한마디로 최화란은 사람들을 사채밖에 쓸 수 없는, 자기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몸으로 만들어버린 셈.
“그래. 그 당시만 해도 법정 최고금리가 연 44%에 달했다. 화란이는 그때 돈을 갈퀴로 긁어모았다. 그 영리한 머리로 그런 발상이나 했으니··· 그 이후로 그 애를 보지 않았다.”
잠깐···
그렇다는 건 할머니는 오직 내 교육을 위해서 자존심을 굽히고 자기가 내친 제자에게 날 보냈다는 건가?
정말로 복희 할머니는 내게 고마운 분이다.
뭐라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그래. 개호주 너는 앞으로 어쩔 생각이야. 계속 화란이를 따라다닐 테냐?”
“독초는···”
할머니가 주신 기회를 아직 더 써먹어야 한다.
“독초는 쓰기에 따라 약이 될 수도, 독이 될 수도 있다고 들었어요. 최 사장을 통하면 제가 접근할 수 없는 인맥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번 구 회장처럼요. 하나 정도는 더 건지고 나오렵니다.”
*
“자기, 무슨 생각해?”
할머니를 만난 다음 날, 공교롭게도 최화란은 나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구 회장 건을 잘 처리해준 것에 대한 감사의 의미라고 했다.
강남의 그럴듯한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썰면서 나는 어제 할머니와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최화란에게 돈을 빌렸다는 수많은 젊은이는 모두 어떻게 되었을까?
한순간의 어리석음의 대가를 지금까지도 너무 비싸게 치르고 있지는 않을까?
“별생각 없습니다.”
“나, 자기한테 정말 고마운 거 있지? 어떻게 이렇게 일을 깔끔하게 처리하지?”
최화란은 핏기가 덜 가신 스테이크를 붉은 입술 안에 넣었다.
어차피 어둠과 가까운 곳에 몸을 의탁하고 있는 최화란이 선인(善人)이리라 믿진 않았다.
그저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생각했던 것처럼 나는 나대로 건질 것만 건져서 나오면 된다.
“뭐 필요한 거 있어? 내가 선물하나 해주고 싶은데.”
“괜찮아요. 일전의 그 일 때문이라면 수고비 넉넉하게 챙겼으니까.”
“참··· 무슨 사람이 그렇게 욕심이 없어? 돈 안 돌려줘도 된다니까 통 크게 내놓는 거 보고 나 깜짝 놀랐단 말이야.”
···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든단 말이야.
최화란은 작게 뒷말을 붙였다.
“자기야. 그러지 말고 나랑 같이 일해보는 게 어때?”
“사장님 밑으로 들어오라고요?”
“뭐, 총알이 충분히 있으시다면야 동업으로 들어오던지.”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식사나 마저 하시죠.”
최화란은 양손에 들고 있던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그녀는 그 손으로 턱을 괴더니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근데 나 궁금한 거 있는데.”
“뭔데요?”
“선생님이랑 어떻게 알게 된 거야? 그분이 보통 분이 아니잖아. 자기 같은 젊은 사람이 알 수 있는 인맥이 아닌데 말이야.”
“소개받았습니다. 어떤 분에게.”
으흠━
최화란은 콧소리를 내었다.
“숨기는 게 있는 남자라. 뭐 그편이 더 매력적이긴 하지.”
“그럼 사장님은요. 할머니를 어떻게 알게 되셨는데요?”
“나? ··· 나 어렸을 때 집에서 도망쳐 나왔어. 내 엄마라는 사람, 직업적으로 몸을 파는 그런 일을 했었거든? 정말 미치도록 싫었어. 그런데 막상 집에서 나오니 그때 내가 가진 무기라고는 젊음과 반반한 얼굴 뿐이더라고. 어쩌겠어, 그거라도 써먹어야지. 정신을 차려보니 돈 많고 지체 높은 사람들의 옆에서 술을 따르고 있더라?”
급작스러운 최화란의 고백에 뜨악해진 내가 말을 잇지 못하자 그녀는 입을 손으로 가리고 웃었다.
“자기야, 그렇다고 이상한 오해는 하지 마. 정말로 술만 따랐으니까. 어렸을 때 그런 환경에서 자라서 그런지 예전이나 지금이나 나는 팔아야 할 것과 팔지 말아야 할 건 기가 막히게 잘 구분하거든? 어쨌든 그 자리에서 우연히 어떤 사람이 선생님에 대해 말하는 걸 듣게 되었어. 이거다 싶더라고. 한 달 내내 명동 바닥을 돌아다녔어.”
최화란은 와인잔을 들어 잔 바닥에 깔린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그렇게 선생님 댁을 찾을 수 있었어. 당연히 날 안 받아주시려고 했지. 나가던 술집도 그만두고 매일 찾아갔어. 울며불며 매달렸지. 나를 안 받아주시면 나도 우리 엄마와 똑같은 삶을 살면서 인생을 망칠 수밖에 없다고. 지극이면 정성이라고 어느 날인가 자잘한 심부름 몇 개 시켜보시더니 날 받아주시더라고.”
속마음을 알 수 없는 최화란의 눈이 일순 진지해졌다.
“아마 선생님께서는 자기에게 날 나쁜 년이라고 말씀하셨겠지. 그래, 틀린 말 아니야. 하지만 악당들에게도 사연이 다 있다고. 난 그냥 내 일을 열심히 했을 뿐이야. 일본계 대부업체들이 밀고 들어올 때도 독하게 버텼어. 살아남기 위해 나 나름대로 발버둥을 쳤다고. 지금도 가끔 생각해. 그때 집에서 도망쳐 나오지 않았다면 내가 지금 누리는 것을 가질 수 있었을까? 물론 선생님께는 진심으로 죄송한 마음이 있어. 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아.”
“··· 환경이 좋지 않다고 해서, 모두가 망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내 이야기기도 했다.
불우한 과거에서 벗어나려는 최화란의 노력은 이해한다만, 과연 그 방향이 옳은 것일까?
돈이 그녀의 갈증을 모두 채워줄 수 있을까?
그녀와 내가 다름을 절감할 수 있는 대화였다.
그리고 왜 복희 할머니가 우리 둘을 다르게 보고 있는지도.
“··· 자기는 아직 때가 너무 덜 탔어.”
그녀는 한번 피식 웃은 뒤 다시 나이프와 포크를 잡고 고기를 마저 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였다.
“··· 영수님?”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고개를 돌려보니 놀랍게도 고윤아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우연도 이런 우연이.
“변호사님. 여길 어떻게···”
“아, 저는 직장 동료분들과 저녁 식사가 있습니다.”
고윤아는 최화란을 바라보더니 그녀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제가 영수님 식사하시는 데 방해를 한 것 같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고윤아는 어설프게 나에게 인사를 하고 어디론가 황급히 모습을 감췄다.
내 눈에 분명히 보였다.
고윤아의 귀끝이 붉게 달아올라 있는 것이.
“뭐야? 자기 애인?”
최화란은 이 상황이 재밌다는 듯이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낮과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