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괄목상대
국방부 시계는 거꾸로 매달아도 돌아간다는 것처럼, 구동일의 시간도 계속 흘러갔다.
오늘은 한영수가 구 회장에게 약속한 한 달을 꽉 채운 날.
어김없이 새벽은 찾아왔고, 다섯 시가 되자 구동일의 눈이 번쩍 떠졌다.
한영수가 일일이 그를 먼저 깨우지 않은 것은 벌써 한참 전의 일이다.
알람을 맞춰놓을 것도 없이 시간만 되면 알아서 구동일의 몸이 반응했다.
사실 이전의 구동일이 삶이라고 아무 걱정 없이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술과 유흥으로 점철된 유쾌함은 그저 하룻밤, 고작 몇 시간뿐이었다.
현자타임.
언제나 방탕함이 지나가 버리면 숙연한 기분이 구동일에게 엄습했었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
내심 구동일도 자신의 인생이 불안했었다.
다만 아버지의 빽만 믿고 되는대로 시간을 허비했을 뿐.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비록 모든 돈은 모조리 빼앗기고 있었지만, 적어도 그를 괴롭히던 권태에서는 해방이 되었다.
역설적으로 이제야 자신이 살아있다는 걸 자각하는 구동일이였다.
괄목상대라는 말이 있다.
후한 말 오나라의 군주였던 손권이 휘하의 장수였던 여몽에게 학식이 없음을 꾸짖자, 여몽은 전쟁터에서도 책을 놓지 않을 정도로 학식을 갈고 닦았고 결국 손오의 명장이 된 것에서 유래한 고사성어.
과거의 그와 지금을 비교하자면 그 말이 딱 맞지 않을까?
작은 개울에 불과했던 구동일이 마침내 바다와 만나 훨씬 더 큰 사람이 된 것이다.
한영수의 작전은 완벽한 성공이었다.
“구동일. 오늘은 나와 같이 갈 곳이 있어.”
한영수는 문지방에 등을 기대고 일을 나갈 준비를 하는 구동일을 향해 말했다.
“어디요.”
“네 부모님을 만나러 갈 거야.”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구동일은 두 눈을 꾹 감았다.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을 낳아준 사람이 궁금한 것이야 당연했지만, 지금 자기 모습과 상황을 보여주려니 부끄럽기도 했다.
“··· 꼭 만나야 하나요.”
한영수는 그런 구동일의 마음을 단박에 읽어냈다.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예전의 너에 비하면 지금이 훨씬 더 훌륭한 인간이니까. 최소한 자기가 져야 할 짐을 감당할 줄 아는 인간이 되었잖아. 겨우 한 달이지만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버틴 건 박수를 보낸다.”
‘병 주고 약 주냐···’
그래도 한영수의 칭찬이 썩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은 구동일이였다.
“가자, 너희 부모님을 만나러.”
“그럼··· 빚 이야기는 전에 말한 것처럼 그분들에게 이야기하지 않는 겁니다. 남자 대 남자로 약속하세요.”
달라진 구동일의 모습이 흡족했던 한영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약속할게.”
*
오늘은 한영수의 차로 움직였다.
늘 집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덩치들도 보이지 않았다.
“저 근데, 반장님께 오늘 일 못 나간다고 말씀 못 드렸는데.”
“이야, 구동일이 진짜 사람 됐네? 걱정하지 마. 내가 사정 말씀드렸으니까.”
“그런데 저희 부모님은 어디에 살고 계십니까? 뭐 하시는 분들이에요?”
“네가 직접 확인해봐.”
한영수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게 얼마 동안 차를 달렸을까.
“··· 어?”
한영수가 운전하는 차는 구동일에게 익숙한 곳으로 들어섰다.
여기는 그가 살던 동네였다.
눈에 익은 풍경들이 보이자 몇 십 년 만에 고향에 돌아오기라도 한 듯 뭉클한 기분이 들었다.
고작 한 달일 뿐인데.
‘그런데 여길 왜.’
친부모가 자신과 이렇게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단 말인가?
영문을 알 수 없으니 이 상황이 구동일은 의아하기만 했다.
놀랄 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한영수의 차는 구동일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곳 근처에서 멈춰 섰다.
다름 아닌 자신의 집.
“여길··· 왜.”
‘이 악마 같은 놈이 그래도 마지막으로 아버지에게 인사라도 하고 가라는 건가?’
구동일은 놀란 토끼 눈이 되어 한영수를 쳐다보았다.
“여길 왜 왔냐고요.”
“구동일. 그동안 정말 고생 많았다.”
“예?”
“뭐해, 아버지 만나러 가야지.”
한영수가 어디 아프리카의 소수 민족의 언어로 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구동일은 그의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네가 누리고 있던 것을 송두리째 빼앗긴 기분은 어땠어? 나와 함께 있었던 한 달이 네 인생에 큰 의미가 있는 시간이었으면 좋겠다. 아니, 꼭 그래야 할 거야. 이제 네가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
“··· 잠깐 ··· 그럼.”
비로소 한영수의 말이 이해되기 시작하는 구동일이였다.
“그래. 네가 진 빚은 이미 구 회장님이 모두 갚아주셨어. 그리고 나는 구 회장님에게 제안을 했다. 천둥 벌거숭이 같은 너를 사람으로 만들어 놓겠다고.”
구동일의 입이 떡 벌어졌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저히 알 수 없는 그였다.
그리고 언어를 대신해 그의 몸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구동일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혹시라도 아버지를 원망하지는 마. 모든 건 나의 계획이었으니까. 그동안 본의 아니게 모질게 대한 건 사과할게.”
한영수는 입고 있던 점퍼 안쪽을 뒤져 하얀 봉투를 하나 꺼내더니 그걸 구동일에게 건넸다.
“700만 원이야. 네가 일해서 번 돈.”
봉투를 쥐자 구동일은 설움과 그동안의 마음고생이 북받쳐 올라왔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수도꼭지라도 열은 듯 눈물이 계속 쏟아졌다.
구동일의 눈물방울이 봉투 위에 하나둘 떨어져, 종이의 색을 변하게 했다.
한영수는 그런 구동일을 바라보고 씩 웃었다.
“어이, 구동일이. 그리고 나 너랑 동갑이야. 말 높일 필요 없어. 어때? 꽁돈 생겼으니까 우리 그 돈으로 오늘 밤에 나가서 신나게 파티라도 하고 올까?”
“씨··· 이발···”
한영수의 농담에 구동일의 얼굴은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꼴이 되었다.
아마 구동일은 이 700만 원이라는 돈을 평생 쓰지 못하리라.
크건 작건 액수의 문제가 아니었다.
과거의 그는 700만 원보다 훨씬 더 큰 돈도 아까운 줄 모르고 펑펑 써왔으니까.
이 돈은 기록이다.
구동일이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증거.
그런 돈을 어찌 쉽게 쓸 수 있을까.
“뭐해? 아버지 만나러 가자고. 새벽부터 널 기다리고 계셨어.”
한영수는 구동일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 주었다.
*
돌아온 탕자는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열었다.
집은 자신이 떠나던 그 날과 다른 것이 하나도 없었다.
현관을 건너 거실 오른쪽에 있는 자신의 방.
그 방문을 열면 과거의 나태했던 자신이, 세상모르고 침대에 누워 자고 있을 것만 같았다.
할 수만 있다면 달려가 그놈의 엉덩이를 발로 걷어차고 싶은 구동일이였다.
그리고,
“동일아.”
사람 들어오는 기척을 들은 구 회장이 안방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 아버지.”
빌어먹을 눈물이 왜 멈추질 않는지.
구동일은 정말 아이처럼 서럽게 엉엉 울었다.
“오냐, 내 새끼.”
눈시울이 붉어진 것은 구 회장도 마찬가지였다.
이 순간 구 회장은 강남의 현금왕도, 지하 금융의 큰 손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한 명의 아버지일 뿐이었다.
한영수는 구동일의 일과를 단 하루도 빠짐없이 구 회장에게 보고했다.
모질게 연기를 하면서까지 아들을 내쫓았지만, 마음이 편할 리 없는 구 회장이었다.
- 영수 군. 이제 이쯤 했으면 되지 않았을까?
- 회장님. 안 됩니다. 조금만 더 참아주시죠. 아드님은 이제야 혼자 뭔가를 깨닫고 있습니다.
- 저··· 나를 못난 애비라고 생각해도 좋네. 그런데 혹시 동일이 그놈이 나중에라도 나를 원망하지 않을까?
- 걱정하지 마세요. 아드님한테서 나오는 모든 원망의 화살은 제가 받겠습니다. 제가 잘 컨트롤 하겠습니다.
마음이 약해진 구 회장은 몇 번이고 이 갱생 프로젝트를 접으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한영수는 “조금 더”를 외치며 단호하게 그를 말렸다.
그리고 마침내.
“아버지···”
구동일은 아버지 앞에서 두 무릎을 땅에 대고 엎드려 고개를 떨궜다.
그가 절을 하는 것인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것인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 어느 쪽이든 무슨 상관이랴.
구 회장에게도 지금은 인생에 몇 없었던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그는 몸을 웅크려 아들의 굽은 등을 껴안았다.
오랜만에 만져본 아들의 몸은 단단했다.
“이놈아, 장하다. 장해.”
“아버지, 제가 그동안 너무 철이 없었어요. 죄송해요··· 앞으로는 정말 열심히 살게요. 이제 잘할 자신 있어요.”
“그래··· 아무렴 그래야지.”
한영수는 그들의 뒤에 서서 부자의 눈물겨운 상봉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이 광경을 보고 있자니 자연히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만약 장 회장이 살아서 날 보았다면 나에게 뭐라고 했을까?’
“동일아, 가서 옷 갈아입어라. 입고 있는 낡은 옷은 치워버리고.”
“아니에요. 이 옷 저한테는 의미가 있는 옷이에요. 버리지 마세요.”
“그래, 알았다. 알았어. 아직 밥 안 먹었지? 아침 먹자꾸나. 나가자, 이 애비가 좋아하는 설렁탕집이 새벽부터 일찍 여니···”
“예. 아버지.”
두 손으로 연신 눈물을 훔치던 구동일이 잠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고 이제 거실에는 구 회장과 한영수만이 남았다.
“영수 군. 내 새끼니까 말 몇 마디만 해봐도 알아. 자네가 정말로··· 우리 아들을 바꿔놓았구만!”
“제가 한 게 뭐가 있겠습니까. 아드님에게 의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할 일이었습니다.”
“아니야. 자네가 정말 큰 일을 해줬어. 원하는 게 뭔가? 내가 다 해줄 테니.”
“약속하신 대로 제 이름을 기억해주세요. 언젠가 제가 회장님의 도움이 필요하게 되면 그때 힘을 실어주시면 됩니다.”
“암, 내가 어찌 이름을 잊겠는가. 내 은인이야, 영수 군은.”
‘한영수, 저놈은 걸물이야.’
한영수가 그렇게 말을 하지 않아도 구 회장은 그와의 인연을 계속 이어나갈 생각이었다.
구 회장은 밑바닥에서 여기까지 올라온 입지전적인 인물.
그런 만큼 사람을 가려내는 감식안도 범인의 것을 아득히 초월하는 자였다.
누구나 그의 앞에서는 머리를 조아리며 아첨만 하기 바빴는데, 한영수는 똘똘한 머리와 세 치 혀로 자신을 완벽하게 구워삶지 않았는가.
인간에 대한 투자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구 회장의 눈에 한영수는 특급 상품으로 보였다.
“구 회장님. 그럼 다음에 또 인사 올리겠습니다.”
“자네, 그러지 말고 같이 식사하지.”
“아닙니다. 그 자리는 제가 낄 자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한영수는 구 회장 앞에서 구구절절 제 공을 자랑하지 않았다.
그는 이제야 제 일이 끝났다는 듯 깔끔하게 뒤돌아섰다.
그렇게, 한영수가 현관에서 나와 집 앞 마당을 가로지르고 있을 때,
“한영수!”
누군가 크게 한영수의 이름을 불렀다.
구동일이였다.
몸을 돌린 한영수는 구동일에게 한 손을 들어 보였다.
“강남 도련님. 나 너무 미워하지 마라. 널 위해서 한 거니까.”
“너··· 너···”
한영수는 말을 잇지 못하는 구동일에게 고개만 한번 끄덕이곤 다시 등을 돌려 앞으로 걸어갔다.
“고마워!”
구동일은 그의 뒷모습에 대고 크게 소리를 질렀다.
“··· 언제든 놀러 와. 닭가슴살 정도는 실컷 대접해 줄 테니까.”
이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한영수는 구 회장의 집을 빠져나왔다.
가치관의 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