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0억을 상속받았다-70화 (70/200)

70. 인간 개조 (3)

“어때. 일은 좀 할 만해?”

‘이 새끼야. 그걸 말이라고··· 너 같으면 할 만하겠냐.’

한영수의 물음에 구동일은 입을 꾹 다물고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한영수를 향해 그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저항이었다.

차 시트에 앉자 계속 혹사를 당했던 구동일의 다리가 미친 듯이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했다.

한영수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기가 싫어 구동일은 두 손으로 양쪽 무릎을 꾹 눌렀다.

“17만 원··· 이까짓 것 예전의 너한테는 아무것도 아닌 돈이지? 사람들 참 웃기지 않아? 고작 이거 벌겠다고 아등바등 몸 버려가면서 일하는 게.”

한영수는 일부러 천박하게 말했다.

당연히 마음에도 없는 소리였다.

구동일을 한번 슬쩍 떠보기 위해서 던진 말이었다.

과연, 강력한 육체노동이 구동일의 무언가를 깨우긴 한 모양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고양이 앞에 쥐처럼 한영수에게 꼼짝을 못 했던 구동일.

그런 그가 이빨을 드러내고 처음으로 한영수에게 성질을 부렸다.

“남의 피나 빨아먹는 당신이 뭘 압니까? 당신 같은 인간들이 더럽게 버는 돈에 비하면 훨씬 가치 있는 돈입니다.”

아까 35년 동안 이 일을 했다는 친절한 곰방 아저씨의 얼굴이 떠올랐다.

더불어 태어나 처음으로 개 같이 고생하며 돈을 벌어보았는데 그 돈을 홀랑 뺏어간 한영수에 대한 분노가 새삼 솟아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구동일의 말을 들은 한영수가 으하하 폭소를 터트렸다.

그 웃음의 의미를 해석할 수 없었던 구동일은 슬쩍 다시 겁이 나기 시작했다.

자기 말이 저 악마 같은 놈의 심기를 건드렸을까 봐 아차 싶었다.

사실 한영수 입장에서야 구동일의 모욕적인 말이 기분이 나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한영수는 진짜 사채업자도 아니고 그저 일종의 연기를 하고 있을 뿐이니까.

‘벌써 제법 기특한 소리도 하잖아? 그래. 더 화내고 분노해라. 그래야 예전의 너의 모습을 깨고 다시 태어날 수 있을 테니.’

이것이 지금 한영수의 진짜 속마음이었다.

“그만 열 내고 내려. 다음 일 시작해야지.”

한영수가 구동일을 데리고 내린 곳은 시내 한복판이었다.

“여긴 왜 왔어요.”

“잔소리하지 말고 날 따라와.”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자 문득 구동일은 자신의 남루한 복장이 부끄러워졌다.

불과 이틀 전만 해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갖 명품으로 치장하고 다니던 그다.

하지만 지금은 구동일의 모습은 어떤가?

땀으로 지저분해진 얼굴과 흙과 모래 따위가 잔뜩 묻어있는, 잔뜩 지쳐있는 남자일 뿐이었다.

구동일은 마치 발가벗겨진 채 거리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빨리 따라오래도. 시간은 돈이야.”

그런 구동일의 비참한 기분이야 한영수의 사정이 아니었다.

한영수는 손 대신에 입으로 구동일의 멱살을 잡아끌었다.

‘송림 프라자’

한영수가 구동일을 데리고 들어간 건물의 이름이었다.

여기는 다름 아닌 한영수가 매입했던 바로 그 건물.

한영수는 여기서 구동일에게 건물 내부 청소를 시킬 생각이었다.

‘··· 공사 중인 건물이 아니라서 다행이네.’

구동일은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서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혹시라도 한영수가 또 등짐을 나르는 일을 시킬까 봐 바짝 쫄았던 것이다.

송림프라자가 이미 완공된 건물이란 건 확인하자,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자, 이거 받아.”

잠시 사라졌던 한영수는 어디서 가져왔는지 커다란 빗자루와 쓰레받기, 그리고 쓰레기봉투를 구동일에게 내밀었다.

“건물 지하 주차장부터 5층까지 로비랑 비상계단을 청소하면 돼.”

구동일은 한영수의 말에 펄쩍 뛰었다.

“못해요! 난 이런 거.”

“왜 못해?”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지나다니는데···”

“쪽팔린다?”

한영수는 매서운 눈으로 구동일을 바라보았다.

태양을 맨눈으로 바라볼 수 없듯이, 구동일은 그의 뜨거운 시선을 제대로 마주 보지 못하고 눈을 피했다.

한영수의 눈빛에는 힘이 있었다.

그 힘은 고작해야 온실 속의 화초로 자라난 구동일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세상의 그 어떤 험한 말보다 강한 협박이기도 했다.

구동일은 힘없이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한영수에게서 넘겨받았다.

“여기 건물 주인이랑 이미 흥정 봤어. 네가 한 달 동안 쉬지 않고 나오면 이백만 원을 받기로.”

물론, 이건 건물주가 한영수이니까 순전히 거짓말.

굳이 구동일에게 자신의 사연을 설명할 필요가 없었기에 둘러댄 소리였다.

“어디 보자··· 200이면 하루에 7만 원 조금 안 되니까 곰방이랑 투잡 뛰면 하루에 25만 원은 너끈히 버는 거지? 이제 이게 앞으로 너 매일 일과야.”

“씨··· 이발···”

“응? 뭐라고?”

“...”

“이런 식으로 1년 살면 9천만 원. 4년하고 몇 달만 고생하면 되겠네? 생각보다 금방이다. 그렇지? 이따 일 끝나면 방금 타고 온 차, 대기하고 있을 거야. 그거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 돼. 먹여주고, 재워주고, 출퇴근까지 시켜주고. 세상에 이런 복지가 어딨냐?”

한영수는 구동일의 어깨를 툭툭 손으로 내려쳤다.

“설렁설렁할 생각하지 마. 이 정도면 편한 일이지. 항상 어디선가 너 지켜보는 눈 있다는 걸 명심해.”

*

오후 일곱 시.

“왔냐.”

엉망진창이 된 몰골로 구동일이 한영수의 집 안에 들어섰다.

오늘 새벽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미친 듯이 막일만 하다가 돌아온 구동일이다.

그는 혼이라도 빠져나간 듯이 신발을 벗고 터덜터덜 거실 안으로 들어왔다.

“어우, 냄새. 야, 구동일. 샤워부터 하고 나와라.”

한영수는 구동일에 속옷가지와 편한 옷을 던졌다.

“내가 입던 거 아니다. 다 새로 사 온 거니까 찝찝해하지 말고 입어.”

“잠깐··· 새것요?”

“어. 거기 택 달린 거 안보이냐.”

“설마··· 이거 오늘 내가 번 돈으로 산 겁니까.”

“당연하지. 그거 다 해서 이만 원이야. 곰방 일 한 거에서 깠다. 말했다시피 내가 해주는 건 딱 재워주고 먹여주는 것까지니까.”

“누가 이거 사달라고 그랬습니까?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합니까. 내가 그 돈을 어떻게 벌었는데···”

“그럼 맨날 팬티 빨아서 입을래? 그리고 네가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가 나랑 무슨 상관인데? 웃기는 놈이네. 전직 강남 도련님께서 고작 이만 원이 그렇게 아까워?”

구동일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뭐라고 더 할 말이 없었다.

그는 일부로 발을 크게 놀려 쿵, 쿵 소리를 내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쏴아아━

뜨거운 물줄기가 구동일의 몸에 묻은 땀과 먼지들을 쓸고 내려갔다.

온종일 긴장 상태였던 육체가 나른하게 풀어지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이렇게 기막힌 일도 없다.

살면서 뭐 하나 부러울 것 없었던 현금왕의 아들이, 이제는 공사판에서 시멘트를 지고 건물 청소를 하고 있다니!

- 넌 인생을 몰라! 언제까지 내가 이룬 것에 기대서 살 거야? 이 애비는 열 살 때 길거리에서 신문을 팔았고 스무 살에는 악착같이 돈을 모아보겠다고 하루에 네 시간 자면서 공사판을 전전했어. 불도 안 때 주는 여관방에서 자면서. 그게 지금 나를 만든 거란 말이다!

문득 아버지가 자신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했던 말이 떠오르는 구동일이였다.

‘그때는 그냥 꼰대의 잔소리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버지가 자신을 찾지 않는 것에 대한 미움.

형편없는 아들이었던 것에 대한 죄송함.

잃고 나서야 깨달은 집에 대한 그리움.

수많은 감정이 복잡하게 뒤섞여 물줄기와 함께 구동일의 가슴을 때렸다.

“씻었냐? 앉아. 밥 먹자.”

구동일이 화장실에서 나오기가 무섭게 한영수가 그를 불렀다.

분명히 그가 씻으러 들어갈 때만 해도 식탁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식사 준비를 빨리했다는 건···’

아니나 다를까, 식탁 위에는 아침에 먹었던 것과 똑같은 식단이 차려져 있었다.

‘이 닭도살자같은 새끼···’

“빨리 앉아. 왜, 아침을 안 먹는 게 습관이라더니 저녁도 안 먹는 게 습관?”

먹는다. 먹어주마.

안 먹으면 내일을 못 버틸 테니까.

구동일은 식탁 앞에 앉아 닭가슴살을 억지로 씹어 꿀떡꿀떡 넘겼다.

*

“야, 일어나.”

“으···”

또다시 아침이 찾아왔다.

어제와 같은 시간에 한영수는 구동일을 깨웠지만, 그는 몸을 꼼지락 댈 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다.

괜한 엄살을 부리는 게 아니었다.

구동일의 온몸은 세포 하나하나가 격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특히 무릎과 허리 쪽은 상태가 더 심각했다.

“몸이··· 너무 아파요.”

구동일은 간신히 입을 떼서 말했다.

“하루만··· 오늘 하루만 쉬게 해주세요.”

잠시 구동일을 내려다보던 한영수는 휴대전화를 귀에 가져다 대었다.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것 같았지만, 전화의 상대방은 없었다.

전부 한영수의 연기였으니까.

“어. 나야. 닥터 준비해놔. 인간답게 돈 벌게 하려고 했더니 나도 귀찮아서 도저히 안 되겠다. 이거 뭐, 애새끼 하나 키우는 것도 아니고. 그냥 배 열자. 그래, 지금 바로 되나? 알겠어···”

“안돼!”

목에 칼을 들이대도 안 일어날 것 같던 구동일이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가요. 가! 시팔··· 간다고···”

한영수는 그런 구동일을 보며 능글맞게 웃었다.

“아침 차려놨으니까 먹고 가라.”

*

그렇게 2주가 지났다.

인간의 몸이란 것은 참으로 신기한 것.

이걸 어떻게 버텨내냐 싶은 일도 결국에는 꾸역꾸역 적응해내니까.

처음 며칠간은 이럴 거면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며 구동일의 정신과 육체는 비명을 질러대었다.

하지만 그 역치를 넘어서자 이 새로운 생활이 어느새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구동일을 반신반의한 눈으로 쳐다보던 곰방 사람들도 하루도 빠짐없이 이른 시간에 공사판에 얼굴을 내미는 그를 동료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작은 것의 소중함도 알게 되었다.

죽어라 닭가슴살만 먹이니, 점심으로 먹는 싸구려 백반 한 끼가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2주 동안 단 하루였지만 눈이 엄청나게 쏟아져 곰방 일을 어쩔 수 없이 쉬었던 날, 구동일은 태어나 처음으로 하늘에 감사 기도를 드렸다.

몸을 이리 혹사 시키니 어딘가 맛이 가도 이상할 게 없는데 오히려 구동일의 몸은 날이 갈수록 좋아졌다.

살이 빠지고, 근육이 붙기 시작했다.

따지고 보면 엄청난 운동량에 한영수가 클린한 음식만을 강제하고 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몸보다 더 많이 변한 것은 생각의 크기였다.

오전에는 워낙에 고된 일을 하다 보니 생각할 여유 자체가 없었다.

오히려 그 탓에 오후에 건물 청소를 할 때는 숨을 참았던 머릿속이 많은 생각들을 토해냈다.

그 생각들의 대부분은 구동일 자신에 대한 성찰이었다.

“저기요.”

일과를 마치고 한영수와 저녁을 먹을 때였다.

구동일은 한영수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혹시 제 부모님은 찾고 있는 거예요?”

“그래. 왜···?”

구동일은 숟가락을 손에 든 채로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목에 걸려있는 말을 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구동일은 마른침을 한번 삼키고 입을 열었다.

“그분들 찾게 되면··· 내 빚 이야기는 안 하면 안 돼요?”

“안 하면 답 있어? 그럼 어떻게 돈 갚으려고.”

“계속 이렇게 일해서··· 일해서 내가 갚을 테니까··· 그분들은 아무 잘못이 없잖아요.”

구동일은 이 말을 마지막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이제야 각이 잡혀가는군.’

한영수는 마음속으로 구동일에게 박수를 보냈다.

괄목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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