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인간 개조 (1)
“한영수···? 당신 누구예요. 내 이름은 어떻게 아는 겁니까?”
다부진 어깨와 중심이 바로 서 있는 목소리.
그리고, 불이라도 품고 있는 것처럼 뜨겁게 빛나는 눈동자.
구동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남자는 풍기는 냄새부터 보통이 아니고 자신과는 체급 자체가 다르다는 걸.
그렇게 첫 대면부터 주눅이 들어버린 구동일은 비슷한 또래인 한영수가 반말로 치고 들어왔음에도 저도 모르게 존대를 해버렸다.
“잠깐··· 나 당신 본 적 있어. 최 사장의 건물에서!”
“초면인지 구면인지는 중요한 게 아니지. 지금 네가 왜 여기에 있는가가 진짜 중요한 문제 아닐까?”
“그럼 내가 왜 여기 있는데요.”
구동일은 바보같이 한영수의 말을 그대로 따라 읊었다.
“빚. 넌 나한테 빚이 있어.”
“뭔 빚이요. 지나가면서 얼굴 한번 본 게 다인데.”
“최 사장한테 진 빚 말이야. 그게 나한테 넘어왔거든.”
“최 사장··· 그래, 당신 최 사장 밑에서 일하는 사람이야? 잘됐네. 나 최 사장 좀 봅시다.”
최화란의 이야기가 나오자 근거 없는 호기가 샘물처럼 솟아오르는 구동일이었다.
그러자 한영수는 말없이 손을 들어 운전석을 툭툭 쳤다.
그의 수신호에 앞자리에서 운전하고 있던 남자는 급하게 핸들을 꺾어 갓길로 들어섰고, 동시에 브레이크를 세게 밟았다.
쿵━
급작스러운 정차에 전혀 대비하지 못했던 구동일.
그는 그대로 조수석 의자에 머리를 박았다.
“아···”
한영수는 우스꽝스러운 자세를 하고 있는 구동일의 양쪽 어깨를 잡아 다시 그를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네가 진 빚을 받기 위해 너희 아버지··· 아니, 이제 아버지도 아니지. 구 회장에게 전화했어. 그런데 그분이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시더라고.”
한영수가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설마하니··· 돈 때문에 구 회장 정도 되는 양반이 거짓으로 아들을 팔진 않을 테고. 진짜야? 자식이 뒤바뀌었다는 말이?”
“모··· 몰라요.”
“모르면 안 되지. 어쨌든 구 회장님은 이제 너랑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니까 나보고 구워 먹든, 삶아 먹든 알아서 하라고 하더라. 길길이 날뛰시던데? 그래서 이제 어떻게 갚을 거야. 내 돈 4억.”
“잠깐, 잠깐만! 최 사장한테 빌린 돈은 3억인데···”
“이렇게 갑갑한 사람을 봤나. 그동안 원금은커녕 이자 한번 갚은 적 없잖아. 연체 이자까지 더하니까 우수리 떼고 4억이 똑 떨어지던데?”
“기다려··· 기다려 봐요.”
구동일은 황급하게 구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 죄송합니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는 절박한 심정으로 미친 듯이 수십 번 다시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ARS 음성은 똑같은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마치 구동일을 놀리기라도 하듯.
‘그런데 이상하잖아. 어떻게 저 사채업자가 바로 그 사실을 알고··· 우연이라도 너무 한 거 아니야?’
쾅━
그때, 한영수가 주먹으로 유리창을 세게 쳤다.
한영수는 구동일에게 잠시라도 생각할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이 강하게 압박하고 나왔다.
아니. 사실이 그랬다.
이 역할이 썩 마음에 들 리가 없는 한영수였다.
하지만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이보다 더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할 마음이었다.
구동일이 아무 생각도 못 하게 만드는 것이 한영수의 목적이었다.
사람이 셋만 입을 맞추면 한 명을 속일 수 있다던가.
구 회장이 이 한량 놈을 집에서 쫓아내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니, 그가 맡은 역할은 충실히 다한 셈이다.
이제 남은 것은 이 연극 무대의 설계자, 한영수의 몫이었다.
“친구들··· 기다려봐요. 친구들이 있어요.”
구동일은 손가락은 더 바빠졌다.
황급하게 주소록에서 손에 걸리는 대로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 야, 뭔 돈. 그나저나 어제는 언제 집에 들어갔냐?
- 4억? 새끼야, 너 약 했냐? 네 아버지한테 말해봐. 너희 아빠 돈 진짜 많잖아.
- 보증? 미안한데 우리 아빠가 딴 건 다해줘도 보증은 서주지 말라고 해서···
매일 우리가 남이냐를 외치며 함께 네온사인이 번쩍이던 밤거리를 거닐던 친구들.
그들의 절반쯤은 구동일의 말을 시답잖은 농담으로 흘려들었고 나머지 절반은 매정하게 그를 손절했다.
‘이 새끼들이··· 내가 그동안 사준 술값이 얼만데···’
“구동일.”
“에··· 예?”
“너 그래도 통장에 얼마는 남아있겠지.”
“어, 그럴걸요.”
“그럴걸요? 넌 네가 가진 게 얼마인지도 몰라? 내가 계좌 하나 줄 테니까 인터넷 뱅킹으로 몽땅 이체해. 천 원 한 장 빼놓지 말고.”
2,400만 원.
구동일의 통장 계좌에 찍혀있는 숫자였다.
결코 적은 돈은 아니었지만, 빌린 돈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언 발에 오줌 누기.
‘잽싸게 문을 열고 튀어 버릴까?’
잠시 용기를 내보았지만, 그 용기는 행동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사실 천성적으로 남들보다 훨씬 겁이 많은 구동일이였다.
우습지만, 그래서 그는 돈을 뿌리고 다니는 데 집착을 했다.
사람들 앞에서 실컷 돈을 쓰고 나면 자신이 대단한 사람처럼 느껴졌었다.
돈은 구동일에게 자신이 겁쟁이라는 것을 숨겨주는 갑옷이었다.
도망친다고 어디 갈 곳이나 있는가.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구동일이었다.
아버지를 통해서 어깨너머로 들어 알고 있었다.
이들이 추심을 얼마나 독하게 하는지.
“이체··· 했어요.”
결국 구동일은 한영수가 내민 계좌로 모든 돈을 이체했다.
“얼마야··· 뭐야? 이천사백? 3억을 빌렸는데 1년도 안 돼서 이거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영수는 이 철없는 도련님의 통 큰 씀씀이에 혀를 내둘렀다.
‘확실히 개조가 필요하겠구만.’
그는 운전석에 앉아있는 남자에게 말했다.
“자, 출발하세요.”
*
“내려.”
한 시간 여쯤 차가 달렸을까?
차는 어느 아파트 단지 앞에서 멈춰 섰다.
구동일은 명령조의 말에 엉겁결 한영수를 따라 차에서 내렸다.
“여기가 어딥니까.”
“우리 집.”
한영수의 말은 짧고 무뚝뚝했다.
“아니, 당신 집을 왜···”
“잔소리 말고 따라와.”
한영수의 엄포에 기가 죽은 구동일은 꼬리를 내리고 비적비적 뒤를 따랐다.
“편하게 앉아.”
어떻게 편할 수가 있겠는가.
구동일은 한영수의 말에도 엉거주춤 서 있었다.
한영수는 과시라도 하듯 몸에 딱 붙는 티셔츠로 옷을 갈아입었는데, 잘 발달한 근육의 실루엣이 그대로 드러났다.
평생 운동이라고 학창 시절 체육 시간 빼곤 해본 적도 없는 구동일은 위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구동일은 고개를 푹 수그렸다.
“앉으래도.”
한영수가 한 번 더 말을 하고 나서야 구동일은 자리를 잡고 엉덩이를 깔았다.
의자를 하나 끌어와 구동일 앞에 앉은 한영수는 서류뭉치를 턱 던졌다.
“이거, 네가 직접 작성한 서류 맞지?”
분명히 구동일이 직접 도장과 지장을 찍은 것은 맞지만, 문서 안의 단어와 그 단어들의 나열로 만들어진 문장들은 방금 막 발견된 신대륙처럼 낯설기만 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돈을 빌릴 때 구동일은 신이 나서 날인만 찍기 바빴으니까.
“4차례에 걸쳐서 총 3억을 빌렸고, 금리는 20%. 거기에 지연배상금이라는 것도 딸려 있어. 약정이자율에 연체가산 이자율 3%까지. 계산기 때려보니까, 네가 나한테 갚아야 할 돈이 4억 하고도 900만 원이야.“
구동일은 뱃속 깊은 곳에서 구토가 밀려 나올 것 같았다.
“아까 보낸 이천사백 제하면 이제 3억 8천 5백만 원 남았네.”
숫자에서 압도적인 무력감이 밀려들었다.
그 무력감은 구동일의 사고를 잠식해 머릿속을 백지로 만들어버렸다.
집 밖을 나오고 나니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버지라는 우산이 자신에게 얼마나 컸는지 새삼 깨닫는 그였다.
할 수만 있다면 아버지 몰래 돈을 빌리려고 했던 과거의 자신을 찾아가 뚝배기를 깨놓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나저나 난 진짜 아버지 자식이 아닌 건가···’
낯선 이의 집에 오고 나서야 구동일은 자신의 처지가 비로소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영화처럼 지난 세월이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사실 자신이 사람 구실만 제대로 했어도 아버지가 이렇게 맨몸으로 내쫓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구동일의 두 눈에서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그 눈물을 보고 있자니 한영수의 마음도 편치는 않았다.
팔자에도 없는 악역 연기가 몸에 맞을 리 없는 그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어.’
“재수 없게 울긴 왜 울어.”
마음을 다잡은 한영수는 그런 구동일에게 싸늘하게 말했다.
“돈이라는 건 담보를 받고 빌려주는 거야. 그 담보가 무엇이든 말이야. 너에겐 강남 구 회장이라는 이름이 담보였던 거고. 그런데 이제 그 담보가 없으니 어쩔래?”
“일해서··· 일해서 갚을게요.”
“이 세상 물정 모르는 한심한 도련님아. 일해서 갚겠다고? 어느 세월에.”
놈팡이 한량이 성실하게 일해서 4억에 가까운 돈을 갚겠다는 건 모래로 다이아몬드를 만든다는 것만큼이나 허황된 이야기였다.
“진짜예요. 뭐든지 하겠습니다.”
“뭐든지 하겠다라···”
한영수는 잠시 말이 없었다.
“너, 당장 어디 잘 데는 있어?”
구동일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떠오르는 곳이 없는 그다.
친구들의 인심은 이미 진작에 확인했다.
가진 돈도 모두 빼앗겼으니 어떻게 방을 구할 방법도 없다.
“그래··· 그럼 이렇게 하자. 네가 어디로 숨어버리면 그걸 찾는 것도 귀찮은 일이고, 날도 추운데 어디서 얼어 죽기라도 하면 곤란해지는 건 나야. 내가 방 한 칸은 내줄게.”
싫다고 말해야 하는데 구동일의 입은 떨어지지 않았다.
아무런 대책이 없으니 한영수의 말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었다.
“너 뭐 할 줄 아는 건 있어?”
또다시 꿀 먹은 벙어리.
중국어가 앞으로 쓸 만해질 거라는 아버지의 말에 관련 학과로 대학을 졸업하긴 했다.
하지만 빈 가방만 메고 학교에 다녔고, 그나마 알고 있던 것도 깡통이 되어버린 지 오래인 구동일이다.
그렇다고 주색잡기만은 자신이 있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
“허!”
한영수는 구동일을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너 돈 갚기 위해서 뭐든지 하겠다고 했지? 좋아. 내가 선심 써서 일자리까지 알아봐 주지. 먹여주고, 재워주고, 일까지 시켜주고. 진짜 고객님 너무 우대해드리는데?”
잔뜩 겁을 먹은데다 머리까지 마비된 구동일은 계속 입을 다물고 있었다.
“싫으면 나가. 괜히 나중에 감금당했네, 협박당했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어쨌든 널 쫓아다니면서 돈은 다 받아낼 거니까.”
“아··· 아니요. 그냥 무슨 일자리일지 궁금해서···”
구동일은 간신히 입을 뗐다.
그래도 마음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을 시키겠다는 건 배를 갈라 장기라도 빼서 팔겠다는 소리는 아니니.
“묻지 마. 설마 너한테 선택권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몸뚱이만 멀쩡하면 돈을 벌 수 있는 곳은 얼마든지 있어. 일수 끊듯이 매일 돈을 갚아. 내가 특별히 앞으로 이자는 빼줄게. 너 같은 불량채권을 사들인 내 잘못도 있으니까. 그리고 조금만 기다려봐. 네 진짜 부모를 수소문해 볼 테니까.”
“그 사람들은 왜···”
한영수의 눈이 순간 매섭게 변했다.
“몰라서 물어? 연대 책임을 져야 할 것 아니야.”
구동일의 양팔에는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우리가 이렇게 떠들고 있는 동안에도 이자는 계속 붙고 있다는 거 알고 있지? 일단 오늘은 네가 할 일이 있어.”
심약한 구동일의 머릿속에 온갖 흉한 상상들이 떠올랐다.
‘마약··· 그래, 요즘 마약이 서울에 다 풀렸다던데 던지기 배달이라도 시키는 거 아니야?’
불행 중 다행이랄까.
한영수 입에서 나온 말은 구동일의 생각과는 아주 거리가 먼 것이었다.
“오늘은 자격증부터 따라. 밖에 차 대기 시켜놨으니까 잠자코 따라가서 네 시간 동안 교육 듣고 와. 그럼 이수증을 하나 줄 거야.”
인간 개조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