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난 한영수라고 해
옛날 옛적에 대감집에 골칫덩이 도령이 한 명 있었다.
대감은 게으름뱅이 도령을 글공부라도 시켜보려고 절에 딸린 암자로 보냈다.
하지만 제 버릇 어디 남에게 줄까.
도령은 절에 와서도 공부는 하지 않고 게으름만 피우기 일쑤였다.
이 도령에게는 또 나쁜 버릇이 하나 있었는데, 손톱을 물어뜯고는 아무 데나 퉤, 퉤, 뱉는 습관이었다.
절에서 도령을 돌보던 스님은 손톱을 함부로 버리면 나쁜 일이 닥치니, 잘 싸서 버리라고 꾸중을 하였는데 그 말을 귓등으로 들은 도령은 숲에다 그냥 휙 던져버렸다.
그리고 그 도령의 손톱을 들쥐가 와서 주워 먹는다.
공부를 마치고 하산한 도령.
그런데 이게 무슨 경천동지할 일이란 말인가.
대감집에는 도령과 생김새도, 목소리도 쌍둥이처럼 똑같은 사람이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거기에 이 가짜는 진짜와는 다르게 공부도 열심히 하고, 효도도 잘하고 있었다.
도령은 자기 부모를 붙잡고 눈물로 호소해보기도 하고 가짜와 다투어 보기도 했지만, 결국 집에서 쫓겨나게 된다.
길바닥에서 도령은 자신의 지난날을 반성하며 엉엉 울었다.
어찌하랴, 갈 곳이 없는 도령은 별수 없이 암자로 되돌아간다.
그 도령에게 절의 스님은 한가지 조언을 해주는데, 고양이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 보라고 한다.
스님의 말을 따라 고양이를 데리고 집으로 가자, 가짜는 혼비백산하여 겁을 먹고 도망치기 바빴다.
고양이는 가짜에게 달려들어 목덜미를 물어뜯었고 놀랍게도 죽은 가짜의 모습은 사람이 아니라 들쥐였다.
이것이 손톱을 먹은 들쥐의 이야기.
*
“그래서, 그 이야기가 어쨌다는 거야?”
구 회장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일단 말이나 들어보자는 태도였다.
“이야기에는 언제나 교훈이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읽는 동화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야, 그렇게 뜸 들이지 말고 빨리 회장님께 말씀드려봐.”
최화란은 조바심이 나는지 이야기 속 도령처럼 자기가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고 난리였다.
1과 1을 더하면 2가 된다는 소리를 해봐야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나는 극적인 효과를 위해 일부러 말을 돌린 것이다.
그래야 구 회장이 내가 그리고 있는 그림에 더 몰입을 할 테니까.
“회장님께서는 아드님이 왜 이 지경까지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구 회장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눈에 닿는 모든 것을 태워버릴 것처럼 분노로 가득하던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구 회장은 더 이상 나를 마주 보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툭 떨궜다.
“허, 하기야 내가 남을 탓할 것이 뭐 있어. 다 내가 자식 잘못 키운 탓이지. 너무 오냐오냐했어···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외람된 말씀이나, 아드님은 본성 자체가 악하지는 않다고 들었습니다. 다만 철이 없을 뿐이지요.”
“맞아요. 회장님. 요즘 젊은 친구들 더 한 애들도 많아요. 어찌나 생각들이 그렇게 없는지···”
능글맞게 최화란이 맞장구를 치자 구 회장은 그녀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엇, 뜨거 싶었던 최화란은 바로 입을 닫았다.
“아드님에게는 시련이 없었을 뿐입니다. 시련이 없는 사람은 가진 것의 소중함을 모르기 마련입니다. 저 동화 속의 도령처럼요.”
“그럼 어쩌겠는가. 동일이 저놈 이제 서른이 훌쩍 넘었어! 인제 와서 정신 차리게 만들 방법이 있겠는가.”
구 회장은 이제 완전히 나의 페이스에 말려들었다.
나는 지금 그에겐 실낱같은 희망이었다.
“제가 아드님에게 시련이 되겠습니다.”
“영수 군 자네가···?”
구 회장의 동공이 태양이라도 담을 듯 커졌다.
“아까도 말했지만 애비인 나도 못 한 일이야. 나라고 손 놓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아무리 회장님이라도 아드님을 극한까지 밀어 넣지는 못하셨을 겁니다. 저에게 한 달만 맡겨주십시오.”
정적.
거실에는 커다란 장식용 벽시계의 초침이 째깍째깍 움직이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 그런데 혹시 동일이 그놈이 크게 다치게 되는 건 아니겠지?”
“고생은 해야 할 겁니다. 다만 안전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어느 분의 아들인가요. 당연히 그래야지요.”
비록 아들에게 큰 실망감을 품고 있을지언정 구 회장의 부정(父情)은 가짜가 아니었다.
역시 내 생각대로 구동일은 쓰임에 따라 불량채권이 될 수도, 최고의 담보물이 될 수도 있었다.
“좋네. 만약 자네가 우리 아들 정신만 차리게 해준다면 그깟 3억이 문제겠는가.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해주겠네. 뭘 원하는가?”
“우선 아드님의 빚부터 갚아주셔야지요. 이자 모두 포함해서. 그리고 제가 받아야 할 값은 지금 이 자리에서 말하지 않겠습니다. 구 회장님이 제 이름만 기억해주시면 됩니다.”
하하하━
구 회장은 이제 기분이 완전히 풀어진 것 같았다.
그는 자기 몸 안의 장기까지 모두 내보일 듯 크게 입을 벌리고 웃었다.
“차 여사님이 말년에 호랑이를 한 마리 키우고 있구먼. 역시 못 당하겠어. 그래, 좋아. 이번 일만 잘된다면 내 절대로 자네의 이름을 잊지 않겠네.”
“그럼 이제 구 회장님과 최 사장님, 두 분이 해주셔야 할 게 있습니다. 일단 최 사장님은 저한테 사람을 몇 명 붙여주세요. 그리고 회장님은···”
마침내 나는 내 머릿속에 있는 계획을 두 사람 앞에서 풀어놓았다.
한참을 가만히 듣고 있던 구 회장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이야, 과연 우리 아들이 이걸 모두 믿겠는가?”
“사람이 몸이 힘들면 잔 생각을 못 하는 법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 말을 믿을 수밖에 없게 정신 못 차리도록 굴릴 생각이니까요.”
*
“아침부터 뭐야···”
구동일은 까치집이 된 머리를 벅벅 긁으며 눈을 떴다.
어제도 클럽에서 코가 삐뚤어지게 마신 참.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도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밖이 시끄럽다.
무슨 일인지 구 회장이 거실에서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고 있다.
‘아버지 나갈 때까지 조용히 몸 사리고 있어야겠네.’
눈을 뜨자마자 요의가 밀려왔지만, 그걸 참아보려 구동일은 제 사타구니 근처를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나저나 어제 걔 진짜 이뻤는데. 아, 술 좀 적당히 먹을걸.’
구동일의 머릿속에 어제 클럽에서 만난, 옆에 앉아 있던 여자애의 얼굴이 떠올랐다.
침만 잔뜩 발라놓고 술을 못 이겨 아무것도 못 했다는 사실이 아쉽기만 했다.
“아··· 아버지는 근데 왜 안 나가시는 거야.”
휴대전화를 보니 지금 시간은 오전 10시.
구 회장이 나갔어도 진작 나갔어야 하는 시간인데 구동일은 도저히 무슨 일인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럼, 지금 내 아들은 어디에 있단 말이야!”
‘엥?’
아버지 나 지금 방에 있어요.
구동일은 저도 목구멍에서 튀어나오려는 소리를 간신히 참아냈다.
아닌 게 아니라 밖에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전쟁통도 이런 전쟁통이 없다.
“....”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도저히 가만히 누워있을 수 없었던 구동일은 침대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는 문에 귀를 대고 밖의 소리를 훔쳐 듣기 시작했다.
구 회장은 계속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 그의 문책을 받는 상대의 목소리는 너무 작아 들리지 않았다.
‘에라, 모르겠다.’
구동일은 문고리를 잡아 돌리고 밖으로 나갔다.
거실 한가운데는 구 회장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낯선 남자가 무릎을 꿇은 채로 머리를 땅에 대고 있었다.
“아버지. 무슨 일이에요?”
구동일은 자신의 아버지를 불러보았지만, 구 회장은 그를 한번 힐끗 쳐다보았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평소에도 자신을 잡아먹을 듯 꾸짖는 아버지였지만, 저 정도로 화가 난 모습을 보는 건 구동일도 처음이었다.
“아아···”
길길이 날뛰던 구 회장은 세상이라도 잃은 듯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구 회장의 입에서 구동일에겐 정말 세상을 앗아가는 말이 튀어나왔다.
“자식이 바뀌었다니···”
머리를 땅에 조아리고 있는 남자는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읊조렸다.
“회장님, 당시에는 병원에 컴퓨터가 없어서 수기로 대장을 다 작성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너무 오래전 일이라서 지금은 다 유실이 되어···”
“그럼 지금 내 자식을 찾을 수 없다는 거야!”
구 회장은 몸까지 부들부들 떨었다.
“아닙니다. 반드시 찾아내겠습니다. 목숨을 걸고 반드시 찾아내겠습니다.”
“한 달. 딱 한 달이야. 그 안에 못 찾아내면 절대 당신들 가만히 두지 않겠어.”
구동일은 철이 없을 뿐이지 바보는 아니었다.
구 회장과 남자의 대화로 돌아가는 상황을 바로 알아챘다.
갓 태어난 아이가 바뀌었다.
고로 구 회장은 자신의 친부가 아니다···!
‘지금 장난하는 거지?’
간밤의 숙취가 순식간에 모두 날아가는 구동일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의 온몸의 털이란 털은 모두 바짝 섰다.
구 회장과 남자는 한참동안 더 뭐라고 떠들었으나, 구동일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우주 한복판에 홀로 버려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구동일이었다.
“··· 아부지.”
구동일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구 회장에게 다가갔다.
“나가라.”
구 회장은 싸늘하게 구동일에게 말했다.
“이봐, 저 애를 데리고 당장 여기서 나가. 그래, 차라리 잘 되었지. 내 속만 썩이는 저놈 이제 안 봐도 되겠구만.”
“아버지···”
“어서 썩 꺼져! 네 부모를 찾아가라.”
구동일은 그만 바지에 오줌을 지려버렸다.
*
“말도 안 돼.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집에서 겨우 지갑과 휴대전화만 챙겨 쫓겨난 구동일은 담벼락에 주저앉아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때, 대문을 열고 구 회장에게 머리를 조아리던 남자가 밖으로 나왔다.
구동일은 부리나케 남자를 향해 뛰어갔다.
“저기요, 아저씨.”
남자는 구동일을 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게 다 뭐 하는 겁니까. 무슨 장난질이냐고요.”
“나도 이게 모두 장난이었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뭐 병원에서 갓 태어난 애가 바뀌기라도 했다는 거예요?”
“아··· 나한테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건데.”
하늘을 바라보며 남자는 힘없이 말했다.
“아저씨한테라니요. 지금 당사자는 난데.”
“미안해. 지금 병원 직원들 다 동원해서 서류 싹 다 뒤지고 있어. 자네 부모님에 대해서도 알게 되면 바로 연락을 주겠네.”
“아니, 그게 아니고···”
“그래도 젊은이는 팔자에도 없는 호사를 여태껏 실컷 누린 셈 아닌가. 회장님의 진짜 자식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지···”
남자는 옷자락을 붙잡는 구동일을 떨쳐내고 휘적휘적 제 갈 길을 가버렸다.
구동일은 도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어 그저 멍하니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팔.”
절로 욕이 나오는 구동일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집 담벼락을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하며 서성대고 있을 때,
갑자기 그의 앞에 검은색 차가 급하게 와 섰다.
조수석 문이 열리고 차의 색깔과 똑같은 검은색 슈트를 입은 남자가 튀어나오더니 구동일을 팔을 잡아챘다.
“뭐야, 이거 놔!”
슈트의 남자는 구동일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뒷좌석 문을 열고 거기에 구동일을 구겨 넣었다.
“너희들 뭔데!”
구동일은 악다구니를 써보았지만, 차는 다시 미끄러지듯 도로 위를 달렸다.
“반갑다. 구동일.”
구동일의 옆자리에는 남자가 한 명 앉아 있었다.
남자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구동일의 고개가 자연히 돌아갔다.
건장한 체격에 호방함이 느껴지는 잘생긴 얼굴.
남자는 구동일을 보고 서늘하게 웃었다.
그 한기는 명품 패딩을 뚫고 구동일의 심장에 화살이 되어 박혔다.
“난 한영수라고 해. 앞으로 너, 나랑 자주 보게 될 거야.”
인간 개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