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계산을 해주셔야겠습니다
“회장님. 화란이 왔어요.”
“그래, 최 사장. 오랜만이구만. 요즘 일은 어떻고?”
“회장님께서 돌봐주시는 덕에 매일이 최고죠.”
“허허, 그래. 어쩐 일이야. 전화 통화가 아니라 이렇게 찾아온 걸 보니 뭔가 중요한 일이 있는 모양이지?”
“이래저래 드릴 말씀드릴 것도 있고··· 제가 너무 불쑥 찾아뵈었나요.”
“아니야. 앉지.”
여기는 최화란의 전주인 구 회장의 자택.
큰 손들은 전통 한옥을 선호하기라도 하는 걸까?
복희 할머니처럼 구 회장도 한옥에서 살고 있었다.
강남 한복판에 이런 곳이 있구나 싶은 곳이었다.
물론 명동의 복희 할머니 댁과 비교하면 집의 규모는 천지 차이였다.
복희 할머니의 집이 작고 아담했다면, 구 회장이 사는 곳은 웬만한 운동장 못지않은 정말 커다란 부지를 자랑하고 있었다.
당장 나라에서 문화재로 지정해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이는 장소였다.
그런데 이 집은 약간 특이한 점이 있었다.
겉으로 보았을 땐 예스럽기만 한 이곳엔 탑차도 들어갈 만한 커다란 지하 주차장이 있었다.
여러모로 집의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공간이었다.
이유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할머니의 조언대로 매사에 생각하는 버릇이 생긴 나는 지하 주차장의 존재 이유에 대해서도 곰곰이 따져보았다.
그리고 내린 결론.
돈.
아마도 이 지하 주차장으로 엄청난 액수의 돈이 오가는 것이 아닐까.
조용히 돈을 나르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구 회장을 찾아가자는 나의 제안에 최화란은 선뜻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로서는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계속해서 자신만만하게 최화란을 설득했고, 결국 별다른 수가 없었던 그녀는 나에게 구 회장에게 가는 비밀의 문을 열어 보여주었다.
- 구동일이 졌다는 빚 3억 말입니다. 어차피 버려도 되는 돈이라면, 저한테 넘겨주시죠. 대신 최 사장님의 고민은 말끔히 해결해드리겠습니다.
- 정말 자신이 있는 거야? 만약에 일이 잘못되기라도 나 자기한테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 일단 두고 보시죠.
- 도대체 머릿속에 있는 생각이 뭐야?
- 아들을 이용해서 구 회장을 흔들겁니다. 좋은 그림이 있어요. 아들을 담보로 구 회장에게 큰 걸 받아낼 겁니다.
- 진짜 나 미치겠네. 그러니까 그 그림을 어떻게 그릴 거냐구. 나랑 미리 손발이라도 맞춰봐야 할 거 아냐.
- 생각이 다 있습니다. 사장님은 구 회장에게 가는 길만 열어주세요.
나는 최화란에게 끝까지 내가 품고 있는 비장의 수를 숨겼다.
반전의 뒤 끝은 모르는 사람이 많을수록 짜릿한 법이니.
구 회장은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최화란을 환대했다.
속사정까지 내가 어찌 알겠냐마는, 겉보기에는 이렇게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니 이 관계가 깨질까 그녀가 노심초사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구 회장의 첫인상은 조금 의외였다.
그는 170cm도 안 될 것 같은 작고 볼품없는 중년남성이었다.
검소한 복장의 그의 몸에서는 작은 금붙이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최화란에게 듣기로 구 회장은 이제 막 환갑을 넘겼을 뿐이라고 했는데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검게 탄 그의 얼굴은 제 나이보다 훨씬 겉늙어 보이게 만들었다.
큰 귀에 도톰한 코, 긴 눈썹에 큰 입 같은 흔히 알려진 부자의 관상이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구 회장은 그 관상론과 뭐 하나 일치하는 구석이 없었다.
아무리 뜯어보아도 그에게서 부의 냄새가 풍기지 않았다.
길거리에서 그를 마주친다면 누구도 구 회장이 지하경제의 제왕 중 한 명이라고 짐작조차 못 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구 회장이 다르게 보였다.
평범한 외모로 돈의 세계에서 일대를 호령할 성취를 이뤘다면 그에게는 분명 껍데기를 뛰어넘는 특별함이 있다는 소리니까.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좌식 테이블을 사이에 놓고 구 회장, 그리고 나와 최화란은 자리를 잡았다.
구 회장은 차호를 기울여 손수 나와 최화란에게 차를 한 잔씩 따라주었다.
“회장님. 저에게 부탁하신 일 있죠? 깨끗하게 처리했어요.”
“고생했구만.”
구 회장은 찻잔을 들어 호록 차 한 모금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그래. 시세차익은 얼마나 가져왔고?”
“액면가보다 5% 높은 가격이에요.”
“5%···?”
구 회장의 숱 없는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들이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그저 짐작만 할 수 있을 뿐 내막을 알 수는 없었다.
아마도 구 회장은 최화란에게 채권 같은 것을 세탁하라고 명한 것이 아닐까.
대놓고 떳떳하게 말할 일은 아닌지, 구 회장과 최화란은 중요한 단어는 생략한 채 담화를 나누고 있었다.
어쨌든 구 회장은 최화란의 입에서 나온 5%라는 숫자가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아이, 참. 회장님도. 이번 일은 정말 쉽지 않았어요. 그 회사, 노조가 회사 사무실을 완전 장악하고 있어서 그거 깨고 물건 확보하는데 제가 얼마나 애를 먹었는데요.“
최화란 역시 구 회장의 심기를 읽었는지 교태 섞인 목소리로 엄살을 부렸다.
“이봐, 최 사장.”
“예. 회장님.”
“자네랑 내가 같이 일한 지 얼마나 되었지?”
“제가 모신지 이제 10년은 되었죠.”
“사람이 오래 얼굴을 보면 편해지더라고. 난 최 사장이 참 영리하고 일도 깔끔하게 처리해서 좋아. 그런데 그 영리한 머리로 내 돈을 가지고 뒤에서 장난질을 치는 건 아니겠지?”
이게 진짜 구 회장의 모습이구나!
공기마저 싸늘하다.
구 회장의 눈에서 날이 선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그의 눈빛에 천연덕스럽기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것만 같은 최화란조차 얼굴이 새빨개지며 당황한 모습을 숨기지 못했다.
“회장님 모시면서 거짓으로 대한 적 한 번도 없어요. 앞으로 이 화란이가 더 잘하겠습니다.”
붉어진 얼굴을 감추기라도 하듯 최화란은 구 회장을 향해 고개를 깊게 숙여 보였다.
“··· 그래. 처음 보는 양반도 있는데 일 이야기는 그만하지. 인사가 늦었구먼. 그쪽은 누구 신가?”
구 회장의 시선이 슬쩍 나를 향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한영수라고 합니다.”
“지금 저희 선생님을 모시고 있는 친구예요.”
대화 주제가 내 쪽으로 옮겨가자 이때다 싶었는지 최화란이 재빠르게 말을 보탰다.
“가만, 최 사장의 선생님이라면 차 여사님을 말하는 건가? 명동의 차 여사님?”
“예. 맞습니다.”
“허허! 나 이거 참.”
구 회장은 내 말을 듣고 한바탕 호탕하게 웃었다.
동시에 그가 뿜어내던 살기도 조금은 누그러들었다.
“최 사장이 웬 젊은이를 데려왔나 싶었는데, 반가운 손님이었구만. 그래 여사님께서는 건강하시고?”
“··· 예. 정정하십니다.”
나는 일부러 복희 할머니의 몸 상태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이 바닥의 신화나 다름없는 당신이 병마에 시름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쓸데없이 꺼낼 필요가 있을까.
? 최화란이 말하길 자신에게 구 회장이라는 끈을 잡아준 것도 복희 할머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구 회장과 할머니, 두 사람의 관계가 우호적일 거라고 쉽게 유추할 수 있다.
하지만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이 바닥에서 분명 할머니의 적들 역시 도처에 깔려 있을 것이다.
말이라는 것은 일단 입 밖으로 나오면 어떻게 퍼질지 모르는 법.
할머니의 적들에게 당신의 약점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복희 할머니는 내게 새로운 세상에 대한 눈을 뜨게 해주셨으니 나도 할머니를 지켜드리고 싶다.
“참 대단하신 분이야. 손 털고 떠날 때를 아신 분이지. 나처럼 지금까지 이 판에 남아 고생도 안 하고 말이야.”
구 회장은 뭔가 떠오른 추억이라도 있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한영수 군이라고 했나? 최 사장이 자네를 여기까지 데려온 건 틀림없이 이유가 있을 테지. 연유를 물어도 되겠는가?”
내가 입을 열어 속에 있는 말을 꺼내려고 할 때, 최화란이 내 허벅지를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자 최화란은 작게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든 오늘은 날이 아니니 그만두라는 무언의 신호였다.
나는 그녀의 사인을 무시한 채 고개를 돌려 구 회장을 바라보았다.
“이 사람들이. 뭐 내게 부탁할 거라도 있는 거야? 편하게 말해보아. 여사님과의 인연을 생각해서 내가 어지간하면 좋게 생각할 테니까.”
“부탁은 아닙니다. 오늘 여기에 온 건 회장님께서 저에게 계산을 해주셔야 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계산? 허허, 무슨 소리일까, 그게.”
구 회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드님 문제입니다.”
“내 아들?”
구 회장의 이마에 깊은 세 줄의 주름이 잡혔다.
“예. 아드님은 최화란 사장에게 3억을 빚졌습니다. 그리고 저는 최 사장으로부터 그 빚을 받을 권리를 승계 받았구요.”
“허.”
구 회장은 짧게 탄식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 탄식을 끝으로 넓은 거실에는 정적이 흘렀다.
“··· 이봐, 최 사장. 한영수 군의 말이 사실인가.”
“회장님 그게···”
“말 돌리지 말고 사실대로 말해.”
“예. 아드님이 얼마간 돈을 쓰셨습니다.”
최화란은 마지못해 실토했다.
쾅━
진노한 구 회장이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그놈의 새끼가 어디서 돈이 나서 아직도 흥청망청 지내는가 했더니 그게 최 사장이 내준 돈이었단 말이야?”
최화란은 눈을 질끈 감았다.
“최 사장, 자식새끼 잘못 키운 건 내 잘못이 맞아. 그래도 내 사정을 아는 자네가 나에게 말도 없이 그럴 수가 있는가! 그놈에게 돈을 내어주면, 내가 자네에게 잘했다고 할 것 같았어?”
구 회장의 노기(怒氣)는 바다도 절절 끓게 만들 것 같았다.
하지만 거기에 굴하지 않고 씩씩거리는 구 회장을 향해 계속해서 말했다.
“회장님, 원금만 3억입니다. 여태껏 아드님은 원금을 갚기는커녕 이자 한번 낸 적이 없습니다. 연체 이자까지 따져보니 정확한 계산은 3억 8천만 원입니다.”
“자기, 미쳤어?”
최화란은 내 팔을 잡아 흔들며 어떻게든 내 입을 막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구 회장은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래. 아들 새끼가 진 빚이야 내가 갚겠네. 하지만 최 사장 자네와 내 관계는 오늘까지인 것 같구만. 둘 다 당장 내 눈앞에서 썩 사라져.”
아아···
최화란의 탄식이 들려왔다.
“회장님.”
나는 앉은 자리 그대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구 회장을 불렀다.
“듣기 싫으니까 어서 나가래도!”
“지금 회장님에게 3억 얼마쯤이 문제겠습니까. 회장님이 영원히 사실 수 없다면 언젠가 아드님이 재산을 물려받을 겁니다. 그럼 그 재산이 어떻게 될지는 회장님께서 더 잘 알고 계시겠죠?”
“이 사람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제가 회장님의 아드님을 새사람으로 만들어드리겠습니다. 회장님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가장 큰 돌덩어리를 치워드리겠다는 겁니다.”
“...”
내 당돌함에 말문이 막힌 것일까, 아니면 아픈 곳을 찔려 할 말을 잃은 것일까.
불같이 화를 내던 구 회장은 입만 벌린 채로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아드님의 빚과 별개로 만약 제가 일을 잘해 냈을 때는 그 값을 제대로 쳐주셨으면 합니다.”
“자네, 내 아들을 아는가?”
“모릅니다. 그저 말로만 들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자네가 무슨 수로 내 아들을 바로 잡아놓겠다는 거야? 애비인 나도 못 한 일을.”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여유롭게 씩 웃었다.
“회장님. 혹시 이 전래동화 아십니까? 손톱을 먹고 사람이 된 들쥐 말입니다.”
난 한영수라고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