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0억을 상속받았다-64화 (64/200)

64. 종로의 화란 (2)

“사장님. 모시러 왔습니다.”

카페에서 얼마를 기다렸을까.

검은 슈트 차림새의 남자 두 명이 나를 데리러 왔다.

분위기가 제법이었다.

오늘 만나러 다녔던 사채업자들이 뭔가 2% 부족한 동네 건달 느낌이었다면 이들은 누가 봐도 반듯한 회사원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물론 험악한 인상에 한 덩치 하는 것은 매한가지였지만.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들이 타고 온 차량은 벤*의 고급 세단이었다.

슈트 1은 운전석에 탑승했고, 슈트 2는 뒷좌석 문을 열고서 나를 태우더니 그대로 내 옆에 자리를 잡았다.

“사장님. 죄송하지만 이걸 좀···”

내 옆자리의 슈트 2는 나에게 검정 안대를 내밀었다.

이거야, 원.

얼떨결에 물건을 받아들었더니 무슨 영화라도 찍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제가 이걸 왜 써야 합니까?”

“실례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양해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슈트 2의 말은 단호했다.

그는 나에게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날 믿지 못하겠다는 거겠지.

도대체 화란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기에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걸까.

좋아, 어차피 여기까지 왔으면 낙장불입.

안대가 어디냐. 비닐봉지 같은 걸 냅다 씌우지 않았으니 다행이지.

일단 장단에는 맞춰주마.

나는 안대를 얼굴에 뒤집어썼다.

비싼 차라 그런지 승차감이 정말 훌륭했다.

그 덕에 맹인이나 다름없는 신세가 된 나는 차가 멈춰있는 것인지,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막상 안대를 쓰고 나니 슬쩍 걱정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낯선 이들과 함께 앉아있다는 건 결코 마음이 편한 일은 아니었다.

슈트 1과 2는 차가 움직이는 내내 나에게 단 한마디도 걸지 않았다.

설마하니 내 인생이 여기서 갑자기 서스펜스 스릴러로 변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렇게 30분 정도 지났을까?

드디어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 왔습니다. 안대 벗으시면 됩니다.”

안대를 벗고 차창 밖을 바라보니 어두컴컴한 지하 주차장이었다.

“올라가시죠.”

그들은 나를 주차장의 엘리베이터로 안내했다.

다행히도 내 걱정과 달리 슈트 사나이들은 여전히 나를 공손하게 대했다.

그들에게서 물리적인 위협이나 나를 겁박하려는 태도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띠링━

엘리베이터는 이 건물의 꼭대기인 8층에서 멈췄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본 건물의 8층에는 좁은 홀과 궁궐의 입구처럼 커다란 문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문 앞에서는 날 데리고 온 슈트 1과 슈트 2와 똑같은 복장의 남자 2명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그리고···

“아, 최 사장 한 번만 만나게 해 달라고.”

“도련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지금 일정이 있습니다.”

보초를 서고 있는 남자 한 명과 내 또래쯤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 한 명이 옥신각신 시비를 하고 있었다.

“야, 너 내가 누군지 몰라서 이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장님께서 안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 아래층에서 이야기하시죠.”

“아래에서 너희들이 뺀찌놔서 내가 여기까지 올라온 거잖아.”

젊은 남자는 겁도 없이 자기보다 머리가 하나는 더 큰 상대에게 협박조로 윽박지르고 있었다.

“신경 쓰시지 말고 들어가시죠.”

슈트 1은 슬쩍 내 등을 문 쪽으로 밀었다.

이어서 슈트 2는 문 앞에서 보초를 서던 남자 둘을 향해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까딱해 보였다.

슈트 2에게서 무언의 신호를 받은 그들은 양쪽에서 젊은 남자의 팔을 하나씩 낚아챘다.

“도련님. 저희가 아래로 모시겠습니다.”

“어! 이거 안 놔!”

공손한 말투와 달리 두 남자는 거의 대롱대롱 들다시피 해서 젊은 남자를 8층에서 퇴장시켰다.

*

똑똑━

“사장님. 모시고 왔습니다.”

“응, 들어오라고 해.”

문을 두들기자 문 뒤편 저 멀리 어디선가 메아리처럼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울림으로 이 안의 공간이 꽤 넓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슈트 1은 나에게 고개를 한번 끄덕였고, 나는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허···”

문 안쪽은 삭막한 바깥과 완전 다른 풍경이었다.

장은호 회장의 집도 엄청났지만 여기도 만만치 않았다.

마치 최고급 호텔 방이라도 들어온 것 같았다.

천장에는 심지어 거대한 샹들리에까지.

그리고···

“날 만나러 왔다면서? 이리로 와서 앉아.”

샹들리에 아래 커다란 소파에 앉아 잡지를 보고 있던 단발머리의 여자.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저 여자가 최화란이구나.

뭐랄까. 잘 나가는 강남 사모님 같은 외양의 그녀였다.

원숙함이 느껴지는 분위기와 다르게 피부는 젊은이들의 그것과 다를 것 없이 팽팽했다.

그녀가 앉아있는 상아색 소파 앞 유리 테이블 위에는 길거리에서 보기도 힘든 슈퍼 카의 차 열쇠가 세 개나 일렬로 올려져 있었다.

허, 스승과 제자가 이리도 다를 수가 있는가.

복희 할머니가 지나칠 정도로 검소하게 살고 계신다면 최화란은 눈이 부시도록 자신을 화려하게 꾸미고 있었다.

일단은 복희 할머니가 그녀를 일컬어 ‘쓸만한 사람’이라고 콕 집어 지칭했다.

당신의 눈이 헛될 리 없으니, 일단은 최화란과 부딪쳐 볼 수밖에.

“뭐해, 멀뚱히 서서. 이리와 앉으래도.”

최화란의 목소리에는 나른함과 교태가 섞여 있었다.

마치 고양이의 짧은 ‘야옹’ 울음소리처럼.

그래서일까, 그녀가 내게 한 반말은 마치 당연한 것처럼 거슬림 없이 자연스럽게 들렸다.

나는 유리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최화란의 건너편의 소파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최화란은 신기한 물건이라도 보듯 잠시 나를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 혹시 경찰이야? 나 경찰이 찾을 정도로 잘못된 일을 한 기억은 없는데.”

여전히 그녀의 말투는 나긋나긋했지만, 가까이서 보니 눈빛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눈에서 독기가 보였다.

그 강렬한 눈빛은 최화란이 그저 단순히 돈만 많은 캐릭터가 아니라는 증거였다.

나는 일단 오리발을 내밀었다.

“경찰은 무슨요. 그저 돈이 필요한 사람일 뿐입니다.”

“하긴, 경찰 할 관상은 아니야. 칭찬이다, 이거. 자기 얼굴 좋다는 소리야.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단 말이지···”

나는 조용히 그녀의 입을 바라보았다.

“30억이나 되는 돈이 필요하다는 사람이 하나도 안 급해 보이네?”

예리하다.

장미 같은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화려한 외모와 살살 녹는 목소리 속에 가시를 잔뜩 감추고 있는.

이왕 거짓을 연기한 거 조금 더 가보기로 했다.

슬쩍 내가 가지고 있던 서류 봉투를 유리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아파트 담보로 돈 좀 빌리려고요. 압구정 문산 아파트입니다. 최대한 크게 빌리고 싶어요. 그래서 최 사장님을 수소문해서 찾아온 거고요.”

어쩐 일인지 최화란은 서류 봉투를 열어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여전히 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물건만 확실하면 돈이야 10억이고 100억이고 내놓을 수 있지. 그런데 나는 서류 같은 거 안 봐. 그거는 내가 할 일이 아니지. 난 사람만 보거든? 그런데 참 이상하다. 자기한테는 돈 빌려주면 안 될 것 같은데? 마치 스스로 범의 아가리 안으로 일부러 작정하고 들어오는 사람 같잖아. 그런 인간들은 정말로 조심해야 하거든.”

과연!

최화란의 추론은 거의 완벽했다.

괜히 복희 할머니가 이 여자를 찾아가라고 한 것이 아니구나.

나도 모르게 슬쩍 입가에 웃음이 돌았다.

그런데 최화란은 내 침묵과 미소를 다른 방향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녀에게서 서늘한 기운이 스멀스멀 풍기기 시작했다.

“수소문한다고 알 수 있는 게 내 이름이 아니야. 경찰이 아니면, 어디서 나한테 던지기가 들어온 건가?”

최화란은 당장이라도 문밖의 덩치들을 호출할 기세였다.

그런 사태가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나는 갈색 서류 봉투 위에 명함을 올려놓았다.

복희 할머니의 명함을.

“이거···”

명함을 주워든 최화란의 동공이 크게 열렸다.

“뭐야. 자기, 선생님이 보낸 사람이었어?”

선생님이라고 함은 복희 할머니를 지칭하는 말이겠지.

“예. 사장님을 찾느라고 애 좀 먹었습니다. 지금 할머니는 제가 모시고 있습니다.”

“어머, 우리 선생님 어떡해. 이제 할머니 소리 듣는 거야?”

복희 할머니의 이름 앞에 최화란이 내뿜던 살기는 순식간에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런데, 자기도 참 짓궂네. 그럼 바로 찾아왔으면 됐을 걸 굳이 길에서 왜 내 이름을 말하고 다녔어?”

“할머니가 사장님의 이름 말고는 아무런 힌트도 주지 않았으니까요. 알아서 찾아보라고 하시더라구요.”

“영리하긴 한데, 겁이 없구나? 이 바닥에 양아치들이 얼마나 많은데.”

“어쨌든 이렇게 목적지는 제대로 찾아왔으니까요.”

“그래. 뭐, 나는 무모한 남자를 좋아하긴 해.”

최화란은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한영수입니다.”

나는 최화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자기는 몇 살? 우리 선생님이 이제 제자는 안 받는다고 하셨는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사람을 들이셨을까?”

“32살입니다. 제자라기보다는 말벗이나 해드리고 있어요.”

“으흠···”

최화란이 콧소리를 내었다.

“선생님이 어떤 사람인지 알 거 아니야. 제자든 말벗이든, 선생님 마음에 자기가 들었다는 건데··· 어쨌든 한참 좋은 나이네. 나는 몇 살로 보여?”

“현명한 사람이라면 여자의 나이에 대해서는 입을 다무는 법이죠.”

내 말을 들은 최화란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깔깔 웃었다.

“얼굴만 잘생긴 게 아니라 재치도 있네? 그래. 그나저나 여기까지는 어쩐 일이야. 선생님의 심부름이라도 온 거야?”

“세상 공부 좀 하러 왔습니다. 할머니께서 최 사장님에게 가서 배우라고 하더군요.”

“그래?”

할머니 이야기로 둥글둥글해졌던 최화란의 눈매가 다시 날카로워졌다.

“그런데 아무리 선생님 말씀이라도 그건 좀 곤란한데. 난 호랑이 새끼는 키우지 않는 주의거든. 언제 내 경쟁자가 될지도 모르잖아.”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되겠는데요. 저는 이쪽 계통을 업으로 삼을 생각은 조금도 없으니까요. 그냥 옆에서 지켜보게만 해주시면 됩니다. 어디서든 밥값은 했으니까 또 사장님에게 도움을 드릴 수 있을지도 모르죠.”

복희 할머니는 내게 진짜 교과서는 학교와 학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세상 속에 있다고 하셨다.

여기에서 벌어지는 천태만상을 보다 보면, 세상을 보는 내 시야는 틀림없이 더 넓어지리라.

최화란은 한참을 고민했다.

장고 끝에 결정을 내렸는지 그녀는 아주 작게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선생님의 이름만 없다면 이런 터무니 없는 소리를 하는 자기를 당장 내쫓겠지만··· 나도 궁금하긴 하네. 선생님이 뭘 보고 자기에게 내 이름까지 입에 올리셨을지. 그나저나 우리 동문(同門) 만난 셈 아니야. 흔치 않은 일인데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한잔할래?“

손가락으로 벽장 안쪽에 진열된 위스키병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닙니다. 낮술은 별로 즐겨하지 않아서요.”

“낭만이 없네. 저거 다 밖에서는 구하기 힘든 술이거든.”

“다음에 기회가 되면요. 그나저나 궁금한 게 있습니다.”

“벌써? 뭔데, 말해봐.”

“이 방에 들어올 때 보았는데, 문밖에서 진을 치고 있던 젊은 사람은 뭡니까? 사장님과 아는 사이인 것 같던데.”

내 말을 들은 최화란의 한쪽 눈가가 찡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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