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0억을 상속받았다-63화 (63/200)

63. 종로의 화란

태상 자동차 회장실.

장은호는 공 팀장으로부터 업무보고를 받고 있었다.

“공 팀장님, 다음 달 부산 국제 모터쇼 준비는 잘 되어 갑니까?”

“예. 출시 예정인 TN70 페이스리프트 모델 위주로 1 전시관의 중앙 부스에 전시될 예정입니다. EV 콘셉트카들도 같이 진열하겠습니다.”

TN70은 태상자동차의 고급 차 브랜드인 ‘Tnext'의 중형 스포츠 세단으로 출시 후 첫 번째 페이스 리프트를 앞두고 있었다.

세계시장에서 좋은 평가를 받으며 프리미엄 브랜드로서 성공 가능성은 확인했지만, 아직 Tnext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조금은 애매했다.

혹자들은 그저 ’성능이 좋긴 하지만 그냥 비싼 태상차‘라며 Tnext의 가치를 깎아내리기도 했다.

그래서 이번 TN70의 페이스리프트에는 회사 차원에서 총력을 기울여 무진 공을 들였다.

이름값 높은 유럽의 자동차 디자이너들을 섭외하였으며, 기존 태상 차의 패밀리 룩 냄새를 지우기 위해 노력했다.

- 단순히 성능만으로는 안된다. 브랜드만의 감성을 만들어야 한다.

장은호 회장이 디자이너와 엔지니어들을 모아놓고 수없이 강조한 말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또 보고 하실 사안이 있나요?”

“아, 예. 정실 전자가 태상 오토비스에게 납품을 시작했습니다. 계약 규모는 미미하지만, 회장님께서 관심이 많으신 것 같아 말씀드립니다.”

“그래요. 물건은 써보니까 어떻답니까?”

“긍정적입니다. 납품 단가는 기존 업체들과 비교해보았을 때 유의미한 차이는 없습니다. 오토비스 쪽에서 자체 실험해 본 결과 확실히 기존 컨버터보다 수명이 길다고 합니다. 일단 A/S 모듈로 사용하고 추가 납품받을 예정이라고 합니다.”

“알겠습니다. 물건에 이상이 없으면 적극적으로 확대 사용하라고 의사를 전해주세요.”

“예, 회장님. 그럼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공 팀장은 사실과 의견을 명확히 구분할 줄 알았다.

그래서 장은호는 공 팀장의 보고를 신뢰했다.

‘믿을 수 있는 부하 직원이 곁에 있다는 것도 내 복이지.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니까.’

공 팀장이 장은호에게 머리를 숙여 보이곤 등을 돌려 사장실을 빠져나갔다.

이윽고 장은호가 혼자 있는 이 공간에 고요한 적막이 찾아왔다.

정실 전자 이야기가 나오니 한영수 생각이 나지 않을 수 없는 장은호 회장이었다.

차 여사의 명함.

그건 장은호에게도 정말 귀중한 카드 중의 하나였다.

만약 장은호가 차 여사의 마음을 얻기만 한다면 든든한 뒷배가 되어줄 터.

그런 그가 왜 한영수에게 그 귀중한 연줄을 순순히 넘겼을까?

- ··· 제가 정말 회장님을 형이라고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장은호는 한영수에게서 태상과 거리를 두려고 하던 젊은 시절의 자신을 찾아볼 수 있었다.

말하자면 결국 태상의 일원이 되어버린 장은호에게 있어 그는 ‘가지 않은 길’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더욱더 한영수를 도와주고 싶었다.

명함도 다소 그런 감상적인 기분으로 건넸던 것 같다.

‘그래, 차라리 나보다는 그 녀석이라면···’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차라리 한영수에게 주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장은호였다.

차 여사는 아버지와 피를 나눈 오누이와 다를 바 없다고 들었다.

아무리 태상의 주인 자리를 욕망하는 이유와 선의를 내비친다고 해도, 차 여사는 형제간의 골육상쟁에 있어 어느 쪽의 손도 들어주지 않을 것 같았다.

‘기대되는군.’

한영수에게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었다.

차 여사 정도의 인물이라면 틀림없이 한영수의 가치를 알아볼 것이다.

지하경제의 대모를 만나고 한영수가 얼마나 성장할지 궁금해지기 시작한 장은호였다.

*

신형제지를 방문한 다음 날, 나는 의기양양하게 복희 할머니의 집을 찾았다.

당신이 내준 숙제를 제법 훌륭하게 해결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는 발걸음이 가벼울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 저 왔어요.”

복희 할머니는 마당에 들어선 나를 보곤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개호주, 요놈아. 아주 기세가 개선장군 못지않구나. 어떻게 계산을 잘 끝냈느냐.”

“그럼요.”

할머니를 깜짝 놀라게 하며 드릴 생각에 신이 났다.

사실 귀여운 구석을 찾기 어려운 나지만 이상하게도 할머니 앞에서는 어린아이처럼 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차라리 장 회장이 나를 복희 할머니에게 맡겼다면···

부질없는 가정이지만 그랬다면 내 인생은 지금과 또 많이 달랐겠지.

아서라, 우리 신부님이 이런 생각하는 거 아시면 섭섭해하실라.

“할머니. 어쩌면 저, 수금에 탁월한 재능이 있는지도요?”

“왜, 뜸 그만 들이고 어디 말해보래두.”

“50억이요.”

“그래. 내가 빌려준 돈이 딱 그만큼 아니더냐.”

“아니요. 거기에 50억을 더 받아왔다구요. 제대로 승부하고 왔어요.”

어제의 일을 복기하니 다시 한번 가슴이 더워졌다.

5백만 원도, 5천만 원도, 더욱이 5억도 아니다.

50억!

고작 말 몇 마디로 얻어낸 성과였다.

하하하━

어느 역사 속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여걸처럼 복희 할머니가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개호주, 요놈아. 돈을 받아오라고 했더니 아주 기둥뿌리까지 다 뽑아왔구나. 그걸 어떻게 해냈어?”

“신형제지가 아쉬운 곳을 물고 늘어졌어요. 지분 관계가 지저분하더라고요. 그걸 이용했어요.”

“인정사정 봐주지 않았구나.”

“젊은 사장 놈, 영 못쓰겠더라고요. 이번 기회에 정신 좀 차려야죠. 말은 100억이라고 던지고 나왔는데 이제 할머니가 적절히 조율을 좀 해주세요. 그래도 할머니 지인이 운영했던 회사니까요.”

“어쭈, 요놈이 이제 이 할미에게 지시까지 하네.”

복희 할머니는 이가 드러나도록 웃었다.

날 보는 당신의 눈에서는 꿀이 뚝뚝 떨어졌다.

“할머니, 이제 제 심부름 값 주셔야겠네요.”

“심부름 값?”

“병원 말이에요. 안 다녀오셨죠? 오늘은 늦었고, 내일 저랑 같이 큰 병원 한번 가봐요. 아시겠죠?”

“그래··· 병원.”

맑은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끼었다.

병원 이야기가 나오자 복희 할머니의 얼굴에 갑자기 그늘이 진 것이다.

“영수야.”

할머니는 내 이름을 한번 부르더니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목소리에서 심상치 않은 기류가 느껴진다.

복희 할머니의 침묵은 승전보를 전하느라 들떠 있던 내 마음을 순식간에 무겁게 가라앉혔다.

“이 할미가 아주 나중까지 숨기려고 했는데··· 사실 너에게 말할 것이 있다.”

“할머니, 갑자기 무섭게 왜 그러세요.”

“··· 사실 나는 오래 살지 못한다. 몸이 많이 아파.”

아···

“암이야. 이미 수술을 하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하더구나.”

역시 그때 할머니의 혼절은 예삿일이 아니었구나.

그렇게 몸이 아프셨는데도 날 보며 웃어주시고, 뭐라도 하나 더 알려주려고 애를 쓰셨단 말인가.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할머니··· 병원은···”

고작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앵무새처럼 병원을 되뇌는 것뿐이었다.

“병원에서 주삿바늘을 팔에 꽂은 채로 삶을 마감하고 싶지 않았어. 남은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을 의사에게 듣고 내 신변 정리는 모두 끝내놓은 참이야. 이걸로 내가 이승에서 할 일은 모두 다 했다고 생각했지.”

“...”

“그런데 네가 나에게 나타났단다. 영수, 너를 보고 있자니 늙은이가 주책맞게도 더 살고 싶다는 욕심이 자꾸만 생겼다.”

복희 할머니가 나를 예뻐하는 건 그저 적적한 노인이 소일거리 삼아 똘똘한 녀석에게 훈수 두는 재미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도 배울 것이 많은 당신에게 적당히 응석도 부릴 수 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복희 할머니는 생의 마지막 불꽃을 오로지 나를 위해 태우고 있었던 것이다.

쏟아지는 비를 이기지 못하고 바닥을 향하는 꽃잎처럼 내 고개가 툭 떨어졌다.

“개호주, 요놈. 고개 들거라. 네가 날 살린 거야. 네가 나타나지 않았으면 할미는 진작에 저승사자를 따라갔을지도 몰라. 삶의 의욕을 잃었었으니.”

복희 할머니가 내 손을 잡았다.

그래, 분명히 느껴진다.

살아있는 자의 온기가.

“병원에 입원하려고 한다. 아직 너에게 알려주고 싶은 것들이 더 많구나. 이 할미가 할 일이 아직 끝난 것 같지 않아. 갈 때 가더라도 끝까지 암 덩어리와 한번 싸워보겠다.”

흠━

깊은 한숨을 한번 내쉰 할머니가 다시 입을 뗐다.

“네가 모르는 세상을 이 할미에게 배우고 싶다고 했지? 우리 속도를 내자꾸나. 100번 말보다 좋은 것이 한번 경험해보는 것이다. 쓸만한 사람이 하나 있다. 찾아가 보거라.“

*

“사장님 30억이라고요?“

“예. 담보는 압구정 문산 아파트입니다. 은행 돈 하나 안 묻은 거니 담보로는 충분할 것 같은데요.”

“예··· 그거야, 뭐 그렇게는 한데. 그러지 말고 큰 거 10장만 쓰시죠. 특별히 시중은행 금리 수준으로 맞춰드리겠습니다.”

나는 순진무구한 눈망울을 연기하며 내 앞에 앉아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복희 할머니는 내게 ‘종로의 화란’이라는 사람을 찾아가라고 했다.

할머니에게서 대부업을 사사 받았다는 화란이라는 사람을 만나면 음지의 돈이 움직이는 걸 볼 수 있을 거라고 하셨다.

문제는 그 화란이라는 사람을 만날 방법을 전혀 안 알려주셨다는 것.

- 화란이를 찾는 것부터가 공부가 될 거다.

복희 할머니의 입에서 나올 정도의 인물이면 꽤 거물일 것이고, 그런 거물이 어중이떠중이를 만나줄 것 같지는 않았다.

역시나 아무리 신발 바닥을 끌며 종로 바닥을 돌아다녀 보아도, 화란의 꼬리를 밟기는커녕 소문조차 들을 수가 없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전략을 바꾸기로 했다.

내가 그쪽을 찾아다닐 것이 아니라 그쪽에서 먼저 날 찾게 만들자.

그래서 내 소유의 압구정 문산 아파트의 등기 권리증을 들고 종로와 광화문 일대의 사채업자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10억은 안 됩니다. 30억 이상이 필요해요.”

“허 참··· 그럼 저희가 총알을 준비할 시간을 좀 주세요.”

내가 돌아다닌 대부업체들은 모두 한결같은 모습을 보였다.

친절한 말투와 상냥한 미소의 여자 직원이 응대를 하다가 원하는 액수를 말하면 곧장 다른 방으로 나를 안내를 했다.

거기서 만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험악한 얼굴로 무장한, 어두운 기운을 풍기는 사내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 앞에서 겁을 먹거나 위축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의 말처럼 이것도 공부의 일환일 뿐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오히려 내가 거액을 입에 담자 그들은 한없이 날 공손하게 대했다.

“반드시 오늘 안이어야 합니다. 급한 돈이 아니었다면 은행을 찾았겠죠. 안된다면 어쩔 수 없군요.”

나는 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참, 그런데 사장님. 혹시 화란이라는 사람을 아십니까?”

“누구요?”

“화란 말입니다.”

“몰라요. 그런 사람. 일단 사장님 번호나 좀 주고 가세요.”

이번에도 허탕인가.

그래도 냄새는 충분히 풍기고 다녔다.

젊은 호구 하나가 나 잡아 먹어줍쇼 하고 길거리를 쏘다니고 있다는.

하도 계단을 오르내렸더니 종아리가 뻐근했다.

대부업체 사무실에서 나와 근처에 카페에 가서 자리를 잡았다.

유리창 밖으로 정장 차림의 회사원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종로는 정말 신기한 곳이었다.

수많은 금융기관의 본사들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인데, 뒷골목으로 조금만 들어가기만 하면 어둠의 세계가 있었다.

음과 양이 공존하는 곳.

이곳은 마치 세상의 축소판과 같았다.

그때,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휴대전화가 몸을 떨기 시작했다.

액정에는 010으로 시작하는 모르는 번호가 떠 있었다.

왔구나.

왠지 느낌이 왔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사장님. 30억이 필요하시다구요.”

“예, 어디시죠?”

“저희 최 사장님을 찾으신다고 들었습니다.”

“최 사장님이요? 그게 누구신데요.”

“최화란 사장님 말씀입니다.”

뭐야, 화란이라는 게 무슨 닉네임이 아니라 자기 본명이었던 건가?

“예. 듣기에는 그분께서 대부업을 크게 하신다고 하더라구요. 혹시 제가 좀 만나 뵐 수 있을까요?”

전화기 건너편 남자는 잠시 말이 없었다.

“··· 어디에 계십니까? 저희가 모시러 가겠습니다.”

종로의 화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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