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실전 (2)
있을 수 없는 일을 한번 가정해보자.
세상의 모든 사람을 일렬로 쭉 세우고 그들의 마음속에 전망대를 하나씩 세운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각자의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어떨까?
모르긴 해도 어느 것 하나 똑같은 장면이 없을 것이다.
단언컨대 김진우의 전망대에서 보이는 풍경은 아주 조잡하며, 형편없을 것이다.
‘어리석다’라는 말의 어원이 ‘어리다’라고 들은 적이 있다.
김진우의 어리석음은 두 가지 의미가 모두 해당되었다.
이 한심한 개망나니는 지금 자신 목 앞에 바짝 칼날이 들어와 있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사장이라는 위치에 있으니 이 회사안에서는 누가 나타나도 자기가 왕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칼자루를 쥐고 있는 건 누구인가?
다름 아닌 바로 나다.
지금 이 자리에서 나와 김진우가 비록 비슷한 또래일지언정 서로의 전망대에 올라서 보는 풍경은 천국과 지옥만큼이나 차이가 났다.
그래도 김진우에게는 다행인 것이 한 가지 있었다.
본인은 그 행운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다만.
이 자리에는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그 사람은 나와 김진우의 차이를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그 차이를 아는 사람이 김진우의 편이라는 것이 개망나니에게는 다행이라는 소리.
신 상무.
김진우는 신 상무가 자기 옆에 있다는 걸 엎드려 절해도 모자랐다.
“한 사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금 신 상무는 터지기 직전의 풍선 같았다.
그는 누가 옆에서 바늘로 콕 건드리기만 해도 그대로 터져버릴 것 같았다.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신형제지, 참 괜찮은 회사더라구요. 코로나19 덕에 사람들에게 이름까지 알렸으니 탐을 내는 자들이 있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요.”
“··· 한 사장님, 고인이 되신 사장님과 전환채권의 주인께선 교분이 두터우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관계라는 것이 있는데 이러시면···”
“글쎄요. 저야 일개 대리인일 뿐이고···”
안절부절못하는 신 상무와 그 옆에서 눈깔만 연신 굴리고 있는 김진우.
나는 그 둘을 번갈아 한 번씩 바라보곤 계속해서 입을 뗐다.
“아까 김진우 사장님이 말하길 이제 이 회사의 주인은 본인이라고 하시던데요. 굳이 이 자리에서 과거 이야기를 꺼낼 필요가 있을까요?”
“...”
말이라는 게 이렇게 무섭다.
생각 없는 말이라는 더욱더.
한번 뱉으면 주워 담을 수가 없으니.
자승자박.
김진우가 세 치 혀로 성깔대로 지껄인 말이 오히려 포승줄이 되어 제 몸을 꽁꽁 묶어버린 셈이다.
“한 사장님, 이렇게 하시죠. 상환금에다 그동안 돈을 맡겨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는 의미로 성의를 표시하겠습니다. 그 정도로 참아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제 조건은 변함없습니다. 이쪽에서 곤란하시다면, 저쪽을 찾아가 볼 수밖에요. 어느 쪽에서든 전 받아낼 겁니다. 100억 말입니다. 유감스러운 말씀이지만, 경영권을 지키시겠다면 빠른 결정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는 잃을 것이 없지만, 저들은 지켜야 할 것이 있다.
그 커다란 간극이 힘의 균형추를 완전히 무너트렸다.
어떻게든 나를 어르고 달래보려는 신 상무 옆에서 붕어처럼 입만 뻐끔대던 김진우가 드디어 목소리를 내었다.
“신 상무님. 지금 이거 뭡니까. 저래도 되는 거예요? 저 사람 지금 우리 협박하는 거잖아요.”
“...”
“아니, 뭐라고 말 좀 해봐요. 그렇게 쩔쩔매고 있지만 말고!”
“...”
“석현이 아저씨! 이래도 되는 거냐니까!”
이제 내 눈에 김진우는 어른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일곱 살 박이 어린애였다. 그것도 마트에서 울며불며 장난감을 사달라고 드러누워 떼를 쓰는.
좋은 옷을 입고 높은 자리에서 다리 꼬꼬 앉아있다고 회사의 주인이 되는가?
이제는 신 상무를 비롯한 이 회사의 모든 직원이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김진우!”
김진우의 따발총 같은 징징거림에 입을 꾹 닫고 묵묵부답이던 신 상무의 입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마침내 급류를 막는 댐처럼 버티고 있던 신 상무의 인내심이 터져버린 것이다.
“어···?”
김진우는 못 들을 말이라도 들었다는 듯이 놀란 토끼 눈이 되어 움찔했다.
”너 조용히 하고 있어! 네 아버지가 평생을 바친 회사야. 두 눈 뜬 채로 이 회사 몽땅 빼앗기고 싶어? 나중에 아버지 얼굴을 어떻게 보려고 그래!“
암군(暗君)에게 목을 내걸고 충언을 하는 신하처럼, 신 상무는 김진우에게 열변을 토했다.
아니, 정말 충신이 맞다고 말해야겠지.
신 상무는 자신이 이 회사의 재무를 책임지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저런 덜 되먹은 놈 밑에서 일을 하느니, 사모펀드 쪽에 붙는 것이 훨씬 얻어갈 게 많을 것이다.
“너희 아버지와의 오랜 의리가 아니었으면 나도 진작에 사표 쓰고 퇴직했어. 네가 널 본 지가 20년이야. 도대체 언제 정신 차릴래!”
신 상무는 거친 진심을 토해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니 오늘뿐만이 아니라 신 상무는 김진우의 뒤처리를 하느라 그동안 이만저만 고생이 아니었던 듯했다.
이제 이만큼 보았으면 됐다.
그만 일어나자.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지, 이들의 미래는 오롯이 본인들의 문제다.
내 전략이 쩐의 전쟁에서 통할 수 있다는 걸 확인한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한 소득을 얻었다.
*
한영수가 신형제지를 떠난 지 불과 한 시간 정도 지난 후.
“그렇게 되었구만.”
무슨 좋은 소식이라도 들은 것일까?
휴대전화를 들고 있는 복희 할머니의 입가가 쓱 올라갔다.
복희 할머니는 지금 신 상무의 전화를 받은 참이었다.
한영수의 일화는 신 상무의 입을 통해 고스란히 복희 할머니의 귀로 들어갔다.
그는 한영수에게 이빨이 박히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복희 할머니에게 직접 연락을 취해온 것이었다.
물론 신 상무는 복희 할머니가 그 유명한 명동의 큰 손이라는 것은 전혀 모르는 상황.
그저 유복한 자산가 중에 하나겠거니 추측만 할 뿐이었다.
“100억이라. 그런데 말이야. 그 돈, 고인이 정말 절박할 때 빌려준 것이거든. 신형제지라는 회사를 살려준 것이나 다름없으니 과하다는 생각은 안 드는구만.”
“예.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르신이 채권을 사셨을 때, 저도 회사 구해보겠다고 며칠 밤을 새우며 돈 구하러 뛰어다녔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또 사정이 다릅니다. 회사를 통째로 먹으려는 세력들이 있어요.”
“그것은 자네들의 문제 아닌가? 내 채권이 이자가 1%였지? 4년간 충분히 사정은 봐주었다고 생각하네만.”
“70억! 어르신, 저희가 대출까지 동원해서 융통 가능한 돈이 70억 정도입니다. 이 정도 선에서 사정을 좀 봐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사실 한영수가 얼마를 받아오던 복희 할머니는 원금을 제하고 나머지는 신형제지에 모두 돌려주려고 애초부터 마음먹고 있었다.
산처럼 이미 많은 재산을 쌓아두었는데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당신에게 지금 몇십억이 따위가 뭐가 중요하겠는가.
‘저승에서 김 사장 만나면 생색이나 내고 먼저 맡아놓은 좋은 자리나 내어달라고 하는 것이 낫지.’
“됐어. 원금만 상환하시게.”
“··· 예?”
복희 할머니의 전화기 건너편에서 신 상무는 뜻밖의 말에 자기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원금 50억만 돌려달라고. 내 말이 어려운가?”
“아, 아닙니다! 어르신,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지금 당장 찾아뵙겠습니다. 어디로 뵈러 가면 되겠습니까?”
“아니야. 따로 사람을 보내지.”
“예··· 저, 그런데 어르신. 혹시 그 한영수라는 젊은 분이 또 오시는 겁니까?”
하하하하━
명동 집 마당에 복희 할머니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니야. 다른 사람을 보낼 것이야. 변호사가 자네 회사로 갈걸세.”
‘개호주, 고 녀석. 짐작은 했지만 역시 물건이구만. 잘 해냈어. 일단은 통과야.’
진작에 변호사를 보내서 해결했어도 될 일을 굳이 한영수에게 맡긴 것은 명확한 목적이 있었다.
복희 할머니가 예사 사람인가.
이제는 늙고 노쇠했다지만 한때 지하경제를 주름잡던 사람이다.
아무리 덕을 베풀기 위해 돈을 빌려주었다고 해도 돈을 빌린 회사가 어떤 상황인지는 손바닥 안처럼 꿰고 있었다.
한영수에게 복희 할머니가 가타부타 신형제지에 대해 더 말을 안 했던 것은 그가 스스로 그 회사의 약점을 찾길 바랐기 때문이다.
당신의 눈에 한영수는 심지가 굳건하고 영리했으며, 무엇보다도 제 아버지의 그것을 쏙 빼닮은 강한 기운이 있었다.
하지만 아쉬운 것이 하나 있다면 세상의 때를 아직 덜 타 순진한 구석이 있다는 것이다.
평범한 월급쟁이라면 그 순진함은 주변 사람들에게 바른 인성을 가졌다며 박수를 받을 일이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한영수가 앞으로 갈 길은 결코 평탄한 길이 아닐 것만 같았다.
자기는 애써 외면하고 피하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그의 운명은 기어코 한영수를 선과 악으로 승부를 가릴 수 없는 권모술수의 세계로 끌어들일 것만 같았다.
그래서 일부러 신형제지에 한영수를 보냈다.
이 회사의 것을 빼앗아보라고.
그래서 역으로 어떻게 하면 자기 것을 빼앗기게 되는지 똑똑히 보고 배우라고.
복희 할머니는 한영수가 달랑 본전만 찾아오면 하수요, 반절 정도 더 얹은 돈을 찾아오면 상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영수는 그 이상을 해냈다.
그것도 말 몇 마디로 아주 쉽게.
물론 복희 할머니는 한영수에게 50억을 돌려주었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작은 성취로 인해 타오르기 시작했을 불씨를 꺼트리지 않기 위하여.
‘내게 시간이 더 있었다면.’
할 수만 있다면 한영수에게 자신의 모든 경험을 그대로 전수해주고 싶은 복희 할머니였다.
그의 옆에서 계속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저 한영수라는 놈이 어디까지 올라가는지 지켜보고 싶었다.
하지만 복희 할머니에게는 이제 정말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영복이 이 바보 같은 사람아. 평생을 사업했다는 사람이 저런 보물을 어찌 길에다 그리 쉽게 버릴 수가 있어. 조만간 자네를 만나면 단단히 한소리를 해야겠어.’
복희 할머니가 만나본 장영복 회장의 두 아들, 장은수와 한영수는 차이가 명확했다.
장은수는 장영복의 비정함의 정수만을 뽑아 만든 것 같았다.
그에 반해 한영수는 장 회장의 단단함을 쏙 빼닮아 있었다.
장은수는 돈이 담겨서는 안 되는 그릇이라면, 한영수는 예쁜 그림을 그려 넣고 싶어지는 그릇이었다.
복희 할머니는 그렇게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다, 휴대전화를 들어 액정의 다이얼패드를 눌렀다.
전화를 건 곳은 자신의 변호사.
당신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오랫동안 함께 손을 맞춰온 변호사였다.
“어르신. 최 변호사입니다. 전화 받았습니다.”
“응, 그래 최 변, 날세. 날 대신해서 돈을 좀 받아와야겠어.”
“예. 말씀하시지요.”
“채권이야. 신형제지. 회사로부터 50억을 상환받으면 되는 것이네.”
“예. 처리해 놓겠습니다. 또 제가 할 일이 있겠습니까?.”
할 일···
최 변호사 입에서 나온 할 일이란 단어가 묘하게 마음에 와닿는 복희 할머니였다.
‘그래. 할 일이 있지. 살아 있을 때 말이야.“
“최 변호사. 공증인을 데리고 우리 집으로 좀 와주게. 최대한 빨리 말이야. 내가 유언장을 좀 고쳐야겠어.”
종로의 화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