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복희 할머니
91년도 봄.
새해가 되기 무섭게 가엾은 한 어린아이가 유괴되어 목숨을 잃었고, 그로부터 채 두 달도 지나지 않아 일가족이 생매장당하는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다.
그런가 하면 1기 신도시 물량 공급이 본격화되어 80년대 부동산 광풍이 한풀 가라앉고, 아파트 위주의 주거 환경이 대한민국에 정착되기 시작했다.
신구(新舊)의 가치들이 충돌하는 여러모로 뒤숭숭한 시절이었다.
그리고, 명동의 그 한옥.
장영복 회장은 삼십여 년 뒤에 한영수가 넘게 될 문지방을 방금 막 넘어서고 있었다.
“누님. 나 왔어.”
장영복 회장은 소리 높여 누군가를 불렀다.
그 목소리에 호응이라도 하듯 마루 건너 장지문이 열렸고, 한 중년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차 여사.
그녀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현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자, 명동 사채 시장의 여왕으로 불렸다.
다만, 그녀의 정체는 그저 뜬 소문 같아서 사람들의 입에 이름은 오르내리되, 차 여사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몹시 드물었다.
“영복이 왔구나. 밥은 먹었니.”
“일없어.”
장영복 회장은 커다란 서류 가방 하나를 마루에 턱, 내려놓았다.
“돈 잘 썼어, 누님.”
“천천히 돌려주지, 뭘 벌써 가지고 왔어.”
자리가 자리이다 보니 장영복 회장은 출처를 숨겨야 하는 돈이 필요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장 회장은 왕왕 차 여사에게 손을 빌리곤 했다.
장 회장과 차 여사의 인연은 70년대 태상 건설이 중동에 진출하면서 시작되었다.
차 여사는 그 당시에 건설 업체에 투자하며 돈을 긁어모으고 있었을 때고, 장 회장은 태상 그룹의 초대 총수이자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그녀를 소개받았었다.
비록 쩐 때문에 시작된 관계였지만, 교제의 역사가 십수 년이 훌쩍 넘은 지금에 이르러 둘은 서로를 친 오누이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장영복 회장이 이리 누군가를 친근하게 부르는 것은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장 회장은 사람들과 경계의 선을 긋는 스타일이었다.
그는 그 거리감이 두려움과 위엄을 만들어준다고 생각했다.
장 회장의 일생을 통틀어 자신이 경계 안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기껏해야 열 손가락으로 꼽을까 말까였다.
장영복 회장이 차 여사를 그렇게 대한 것은 단순히 돈이 많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녀에게는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혜안이 있었다.
이보다 조금 훗날의 이야기지만, 장 회장이 IMF 시절 오히려 태상 그룹을 더 키울 수 있었던 것도 차 여사의 조언을 귀담아들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차 여사는 입이 무거웠으며, 말을 해야 할 때와 아껴야 할 때는 정확히 구분했다.
그래서 장 회장은 이 한옥에 오면 편안하게 속을 내보일 수 있었다.
“뭐 좀 내어줄까?”
“됐어. 누님, 그냥 나 식혜 한 사발 줘요.”
“그래. 어쩐지 네가 올 것 같더라. 식혜 새로 담가놓았어. 이따 갈 때 싸가던지.”
장영복 회장은 차 여사로부터 대접을 받기가 무섭게 식혜를 벌컥벌컥 급하게 들이마셨다.
오늘의 장영복 회장은 쫓기듯 급한 구석이 있었고, 사람에 예민한 차 여사는 그걸 금방 알아차렸다.
“무슨 일이 있구나.”
차 여사는 장영복 회장의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청춘들 못지않은 건장함을 유지하고 있는 장 회장과 작은 체구의 차 여사,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다윗과 골리앗을 보는 것 같았다.
“회사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야?”
“문제는 무슨.”
“일전에는 좋은 사람을 만났다고 세상 행복한 얼굴이더니 지금은 왜 다 죽어가.”
“...”
여자 이야기를 하자 장영복 회장의 낯빛은 더 안 좋아져, 도깨비같은 형상이 되었다.
“그러지 말고, 그 아가씨를 처로 들이지 그러냐. 너 홀몸이 된 지가 몇 년이야. 부끄러울 일도 아니지. 세상 사람들 입방아, 그까짓 것 금방 지나간다.”
장 회장의 속내를 지레짐작하고 말을 꺼낸 차 여사였다.
하지만 장영복 회장의 입에서는 그녀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죽었어, 그 사람.”
아━
차 여사는 저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아이를 낳고는 제 할 일은 이걸로 다 했다는 것처럼 눈을 감았어. 어떻게 손도 써보지 못하고.”
“영복아.”
차 여사는 장영복 회장의 등을 손으로 쓸었다.
그렇게 둘은 한참을 말없이 마루에 앉아 하늘만 멍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던 와중 차 여사의 입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그런데, 그럼 그 아이는···?”
*
“어떻게 아셨습니까. 제가 장영복 회장님의 아들이라는 건. 그리고 할머니는 도대체 누구십니까.”
예사롭지 않은 이 할머니와 다과상 사이로 마주 앉은 나는 궁금한 게 많았다.
“벌써 30년이 넘게 지났구나.”
할머니는 묻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딴 소리부터 했다.
“··· 할머니.”
“이놈아, 일단 하나씩 묻거라.”
내가 조급증에 할머니는 떽, 소리를 내며 혀를 찼다.
“네 눈이 장 회장을 쏙 빼닮았어. 그런 눈은 절대 흔하지 않거든. 더군다나 내가 누군지, 여기가 어딘지 알고 있는 장 회장의 막내놈이 절대 어중이떠중이에게 명함을 줄 리가 없지. ··· 그리고 장 회장에게 서자가 있다는 사실은 진즉부터 알고 있었고.”
말이야 간단하지만, 놀라운 추론이었다.
고작 몇 마디 말로 평생 날카롭게 갈아온 혜안의 단면을 내게 보여준 노인이었다.
내가 처음 왔을 때 보여주었던 늙고 힘없는 할머니의 모습이 모두 연기였다는 방증이었다.
“이름이 뭐냐?”
“한영수입니다.”
“그래, 아이야. 이 할미가 누군지 이제 답을 줄까? 내 이름을 듣는 것은 값이 비싸. 그것만으로도 오늘 네가 일한 삯으로는 충분할 것이다.”
꿀꺽━
마른침이 절로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이 할미의 이름은 차복희. 한때 사람들이 날 차 여사라고 불렀지.”
“차 여사요···?”
비싼 값을 하기에는 너무나 맨송맨송한 답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내 모습을 보곤 복희 할머니는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하기야, 네가 모르는 게 당연한 일이겠구나. 세월이 많이 흐르긴 했어. 예전에는 내가 누군지 알아내겠다고 눈이 시뻘게져서 명동 바닥을 쑤시고 다니던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는데. 노인네 입으로 말하긴 민망하긴 하나 혹자는 나더러 명동의 현금왕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잠깐만,
뭔가 불현듯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차 여사··· 명동의 현금왕···
“설마··· 할머니가”
동공이 태양이라도 담을 듯이 커졌다.
“뭐, 떠오르는 것이라도 있어?”
대학 시절 ‘한국을 움직인 사람들’이라는 다큐멘터리를 한동안 열심히 본 적이 있다.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걸물들에 대한 일화를 다룬 프로그램이었다.
교양 프로에 가까웠으니, 시청률이래야 겨우 한 자릿수였지만 나름대로 꼭 챙겨보곤 했었다.
뭔가 그들을 보면서 대리만족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차 여사.
차 여사 역시 그 다큐멘터리에서 소개가 된 적이 있었다.
6.25. 전쟁 때 북에서 남으로 내려온 차 여사는 전쟁통에 염색사업으로 큰돈을 벌고, 70년대 오일쇼크 때 건설주에 투자해 어마어마한 재산을 쌓았다고 했다.
80년대부터는 명동의 사채 시장의 큰손으로 수 백억원의 현금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는 그저 풍문일 뿐인지라 차 여사는 실존하는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럿의 이야기가 합쳐진 허상의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으로 방송은 막을 내렸었다.
이 작은 체구에 소박한 복장의 노인이 다름 아닌 그 주인공일 줄이야.
“할머니가 바로 그 차 여사라고요?”
“여사는 무슨, 사실 예전부터 그 호칭이 마음에 안 들었어. 여사라는 건 결혼한 여자를 부르는 말인데 말이냐? 난 평생 결혼한 적이 없으니 영 틀린 셈이지.”
복희 할머니는 찻잔을 들어 국화차를 한 입 마셨다.
“그나저나 쉽지 않은 삶을 살았겠구나.”
할머니는 작게 한숨을 폭, 내쉬었다.
“아직도 야차 같은 얼굴로 네 어머니의 부고를 말하던 장 회장의 얼굴이 선하다. 그 기세가 어찌나 섬뜩하던지 차마 핏덩이를 버렸다는 장 회장을 뜯어말리지 못했어. 이 늙은이도 네 불행에 한몫한 셈이지. 네가 원망이 많겠어.”
“전 제 뿌리를 알기 전에도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복희 할머니의 눈이 나를 향했다.
“어차피 부조리 없이 세상 사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 덕분에 일찍 철이 들었고, 단단하게 클 수 있었습니다.”
내 말을 들은 복희 할머니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웃는 것도 아니고 찡그린 것도 아닌, 그 중간 어딘가쯤의 표정.
“인과 연이 이리도 무섭구나. 손 좀 줘보겠니.”
나는 손을 내밀어 복희 할머니의 검버섯이 피어있는 주름진 손을 잡았다.
“그래, 이 할미가 너 살아온 이야기 좀 들어보자.”
일대(一代)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인물에게서 느껴지는 아우라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나를 친손주처럼 대하는 자애 때문에?
홀린 듯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복희 할머니에게 풀어놓기 시작했다.
내 인생이 소리의 형태로 노도와 같이 쏟아져 나왔다.
신기한 일이었다.
복희 할머니는 내 손을 잡은 채 맞장구 한번 없었다.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내 입은 쉼이 없었다.
“··· 그렇게 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입 안에 침이 모두 마를 정도가 되어서야 이야기는 마침표를 찍었다.
“큰돈을 얻고도 남들을 많이 도왔구나. 허황한 것을 좇지도 않았고. 누구 씨가 아니랄까 봐 확실히 돈을 담을 그릇은 되는구나.”
나를 칭찬하는 듯하던 복희 할머니는 갑자기 혀를 쯧쯧 찼다.
“그런데 아직은 헛똑똑이야. 너무 순진해.”
“예?”
“그 정실 전자라는 회사 말이다. 너는 제법 영리하다고 처신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영 순진하기 짝이 없어.”
일순, 복희 할머니의 눈에서 광채가 스쳐 지나갔다.
“투자를 할 거라면 칼자루를 쥐었을 때 확실히 단도리를 쳤어야지. 회사 주식의 20%니 30%니 할미의 눈으로 보았을 땐 부도 직전에 회사를 살려준 공에 비하면 너무 적어. 지분 관계도 말이야. 만약에 증자 따위로 흔들어대면서 네 입지를 야금야금 갉아먹으면 어떻게 할 생각이냐?”
“사장은 좋은 사람입니다. 성실하고 믿을 만해요.”
막상 뱉어놓고 보니 그렇게 싱거울 수가 없는 말이었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그래. 네 말을 들으니 그 사장이라는 작자는 영악한 인간은 확실히 아니야. 오히려 우직한 밥통 같아. 하지만 회사가 크다 보면 꾀 많은 인간이 주변에 붙기 마련이야.”
말문이 턱 막혔다.
단순히 좋은 투자라고만 생각했다.
“그래도 영업이익이 아니라 총매출에 투자 수익을 건 것은 잘했다. 그것이 그나마 장난질 없이 정직하지.”
아.
··· 이래서 장은호 회장이 날 여기에 보냈구나.
복희 할머니에게 돈과 세상을 배우라고.
그리고 더 성장하라고.
날 진정한 형제로 여긴다는 장은호 회장의 진심이 느껴졌다.
“왜 대꾸가 없어. 노인네가 이런 소리 하니까 허튼소리로 들려?”
“아니요.”
나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배우고 싶습니다. 할머니는 알고 계시고, 저는 모르고 있는 세상에 대해. 제가 오늘 일한 값은 그걸로 치러주세요.”
하하━
복희 할머니는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 고놈 참 당돌하기도 하지.”
“노동으로 봉사를 했습니다. 할머니는 아직 저에게 계산이 남아있으시고요. 칼자루를 쥐었을 때 단도리를 치겠습니다.”
할머니의 입가에 또 한 번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요, 개호주야. 장 회장이 그랬듯이 너 같은 눈을 가진 사람은 말이야, 결코 갑남을녀로 세상 속에 묻힐 운명이 아니야. 오냐, 이젠 찾아오는 사람도 없어서 적적했는데 앞으로 이 늙은이의 말벗이나 되어주거라.”
옛날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