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명함
서울특별시 중구 새희망로 2가 47-2
장은호 회장이 준 명함 속에 적혀있는 주소였다.
명동역 3번 출구에서 지상으로 나오면 저 멀리 남산타워가 보인다.
인터넷 포털 속 내비게이션은 나에게 남산타워 방향으로 오르라고 안내했다.
그렇게 경사진 도로를 오르다 보니 제법 쌀쌀한 날씨임에도 어느새 이마와 등에는 땀이 스멀스멀 맺혔다.
-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도보 내비게이션의 음성이 내가 바른길로 왔다는 걸 알려주었다.
그리고 빽빽이 세워진 건물 숲 사이 골목 어귀에 작은 한옥 한 채가 보였다.
“와, 여기에 저런 곳이 있네.”
여기가 어딘가.
과거에는 대한민국 사채업의 메카였고, 오늘날에는 외국인 관광객들과 그들을 상대로 물건을 팔려는 장사치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관광쇼핑지.
명동.
정말 기묘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명동의 중심거리에선 조금 벗어나 있는 곳이지만, 그래도 도심 한복판에 이런 한옥이 남아있다는 건 그 자체로 생경한 풍경이었으니까.
잠깐 한옥 주변을 둘러보았다.
딱 내 키만큼의 담장이 한옥을 감싸 안고 있었고, 그 담장 너머로 보이는 마당에는 커다란 나무 하나가 심겨 있었다.
이곳에서는 무엇이 날 기다리고 있을까.
긴장과 설렘이 뒤섞인 마음을 안고 대문 앞에 섰다.
똑똑━
“계십니까.”
문을 몇 번 두들기고, 목소리를 내어 사람을 불러보았다.
아무도 없는 것일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여기가 정말 맞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소를 한 번 더 확인해보았지만, 위치는 틀림없다.
몇 번 더 문을 두드려보았지만, 누구도 나와보지 않았다.
어디선가 탁탁, 뭘 내려치는 소리가 들려왔는데 이 집 안에서 나는 것인지 다른 곳에서 나는 곳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하릴없이 돌아서려던 찰나,
끼익━
문이 열렸다.
그리고 주름진 노파 한 명이 그 틈새로 얼굴을 쑥 내밀었다.
몹시나 작은 체구의 할머니였다.
키가 150cm나 될까?
땡땡이 무늬가 어지럽게 박혀있는 몸빼 바지에 생활 한복 상의를 입고 있는 노파는 힘없이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뉘세요?”
“아, 안녕하세요. 사람을 좀 만나러 왔어요. 할머니 혼자 계시나요?”
“뭐라고요?”
“잘 안 들리시는구나. 사람을 좀 만나러 왔다고요.”
노인은 가는 귀가 먹으셨는지 내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하기야 연세가 80은 훌쩍 넘어 보이신다.
나는 할머니의 몸에 맞춰 무릎을 굽혀 내 키를 낮췄다.
“사람? 여기 노인네밖에 안 사는데 젊은 총각이 누구를 만나러 온 거요?”
“아··· 그게.”
할머니의 질문에 말문이 턱 막혔다.
장은호 회장은 이 명함을 주면서 나에게 일언반구 아무런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이게 뭐냐고 몇 번 물어보았지만, 입을 꾹 다물고만 있었다.
그래, 멍청하게도 누굴 만나는지도 모르고 여길 찾아온 것이다.
별수 없이 나는 할머니에게 장은호 회장에게서 받은 명함을 건넸다.
노인은 안개라도 낀 것 같은 흐린 눈으로 건네받은 명함을 잠시 바라보았다.
“할아버지를 만나러 왔구먼. 들어와요.”
작은 마당 안에 들어서자 푸른 하늘 아래 서 있는 단출한 전통가옥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살기에는 불편하겠다 싶었지만, 확실히 운치는 있었다.
“집이 참 예쁘네요.”
“··· 뭐라고?”
“한옥이 참 좋다고요.”
노인은 얼굴을 잔뜩 찡그리더니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내 말을 알아들은 것 같지 않았다.
노인은 마당 한쪽에서 깨를 털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까 내가 들었던 탁탁, 거리는 소리의 정체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귀도 잘 안 들리시는 분이 깨까지 털고 있었으니 나의 방문을 몰랐던 것도 이해가 되었다.
할머니는 내가 멀뚱히 서 있건 말건 관심이 없었다.
그저 무심하게 나에게서 등을 돌려 벌려놓은 깨 판으로 돌아가 쭈그리고 앉았을 뿐이다.
그것만이 자기 소임이라는 듯 노인은 깔아놓은 멍석 위에 대고 탈탈 깨를 털기 시작했다.
주인의 허락도 없이 집 안에 들어갈 수도 없고, 가만히 서 있자니 그것도 민망한 꼴이다.
나는 슬쩍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할머니. 깨 터시는 거예요?”
“...”
“할머니, 이걸 언제 다 터시려고요. 해지기 전에 다 하실 수 있겠어요?”
목소리 볼륨을 좀 더 키웠다. 그제야 노인은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이곤, 수북하게 쌓여있는 깨 줄기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럼 총각이 좀 도와줄라요?”
“예? 아, 그럴까요?”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뒤로 돌아가면 창고에 도리깨가 있우. 그거 좀 가져와 봐요.”
내가 도리깨를 가지고 오자 할머니는 에구구 소리를 내며 허리를 펴며 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뭘 멀뚱히 서 있우? 어서 깨 털지 않구선.”
탁, 탁, 탁···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고 도리깨를 몇 번 휘둘렀을 뿐인데 어깨가 뻐근해져 왔다.
“덩치도 좋은 총각이 왜 이리 힘이 없어?”
“아니, 제가 이걸 처음 해봐서 요령이 없나 봐요.”
“뭐라고?”
에라, 모르겠다.
나는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평상에 올려놓고 본격적으로 깨를 털기 시작했다.
옆에서 잔소리를 늘어놓던 할머니도 그제야 내가 일하는 모양새가 마음에 들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얼마나 도리깨질을 했을까. 적어도 한 시간은 넘게 쉬지 않고 휘둘러댄 거 같다.
나의 노동의 결과물로 멍석 위에는 누런빛의 깨들이 곱게 모여있었다.
“총각, 이거.”
“예?”
어깨를 돌리고 허리를 뒤로 젖히며 스트레칭을 하고 있자니, 할머니는 내가 잠시라도 쉬는 꼴을 못 보겠다는 듯 키를 건넸다.
오랜만에 보는 물건이었다.
오줌싸개들의 머리 위에 씌우곤 했다는 바로 그것.
“으스러진 잎사귀들이 깨 사이에 섞여 있으니까 마저 걸러내야지.”
“할머니, 그런데 할아버지는 멀리 나가셨어요? 언제 오세요?”
허, 노파는 못 들은 건지, 못 들은 척하는 건지 나를 외면했다.
그렇게 다시 한참을 키질로 깨를 까불러 검불을 날려 보냈다.
또 한 소리 할까 봐 시키지 않아도 뒷정리까지 모두 깔끔하게 끝낸 나는 이만하면 되지 않았냐는 눈으로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이봐, 그건 그렇고. 우리 집 등이 나간 게 있어. 그거나 좀 갈아줘.”
이런 심술궂은 노인네 같으니!
할머니는 이제 아예 반말 조였다.
마치 나를 이 집에 일하러 온 잡부 취급이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안 갈아줄 거야?”
어이가 없었다.
그렇다고 연세 지긋하신 분과 싸워야겠는가.
나에게는 별 수고롭지 않은 일이지만 저 작은 노인에게는 어려운 일일 수도 있다.
“어디요, 등 어디가 나갔는데요.”
“이리 따라와.”
그런데 이게 웬걸, 노인의 요구는 끝이 없었다.
등을 갈아주자, 창고를 정리해달라고 했다.
창고를 다 정리하니 집 안에 있는 화초들을 밖에 내놓으라고 했다.
“그거 비싼 화초니까 조심해서 옮겨.”
낑낑대며 커다란 화분들을 나르는 나에게 노파는 연신 싫은 소리였다.
마치 나를 일부러 골탕 먹이기라도 하겠다는 듯.
아마 운동으로 내 몸이 단련되어 있지 않았더라면 오늘 이 마당 위에 그대로 퍼져버렸을 것이다.
계속되는 부당한 요구에 슬슬 부아가 치밀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나중에는 그러려니 하고 해탈했던 것 같다.
그래, 좋게 생각하자.
바쁜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힘없는 노인네 하루 도와준 셈 치면 되지 뭐.
그렇게 잡일들을 하다 보니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할머니, 더 시킬 일 없으세요?”
마루에 앉아 내내 바쁘게 몸을 움직이던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노인에게 물었다.
할머니는 내 말에 가타부타 대답도, 반응도 없었다.
몸을 일으킨 노인은 어디론가 모습을 감췄다.
“거, 참 희한한 분이네.”
나는 마당의 평상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석양에 물든 구름은 붉게 염색이 되어 나름 볼만한 그림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장은호 회장은 왜 나더러 여기에 가보라고 한 것일까.
우습게도 여기에 처음 왔을 때는 머리 위에 해가 떠 있었는데, 그 해가 질 때까지 나는 만나야 할 사람은 아직 만나지도 못했다.
허드렛일이나 하고 말이야.
“이거 좀 마셔봐.”
그때, 할머니가 나에게 대접을 하나 내밀었다.
식혜였다.
“예. 잘 먹을게요.”
꿀꺽, 꿀꺽···
식혜는 너무나 달고 시원했다.
나는 쉬지 않고 대접 가득 담긴 식혜를 단번에 들이마셨다.
밑에 깔린 밥알 하나 남기지 않고.
“와, 할머니. 이거 직접 하신 거예요? 정말 맛있는데요.”
“땀 흘리고 먹으니까 더 맛있지?”
참나, 누가 일을 이렇게 시켰는데···
이 얄미운 노인은 나에게 선심 쓰듯 말했다.
“할머니, 그런데 사람을 이렇게 부리시고선 식혜 하나로 일당 퉁 치시려는 건 아니겠죠?”
나는 농담 반, 진담 반 섞어 투정 부리듯 말했다.
그러자 노파는 평상 위에 엉덩이를 깔고 내 옆에 털썩 앉았다.
“중간에 그냥 갈 수도 있었잖아.”
“예?”
“왜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일했어?”
“그거야···”
나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 하다가 중간에 그만두면 처음부터 안 도와드린 것만 못하니까요.”
할머니의 입가에 웃음의 자취가 아주 옅게 스쳐 지나갔다.
노인은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말하는 본새만 들어봐서는 제법 쓸만한 녀석이구나.”
갑자기 할머니의 말투가 또 한 번 변했다.
“누가 보내서 여기에 왔어. 이 남한 땅에 내 명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몇 안 되는데.”
뭐라고?
노인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할머니의 눈은 아까처럼 다 죽어가는 흐린 눈이 아니었다.
비록 얼굴에는 주름살이 가득했지만, 소녀의 그것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렇구나.
할아버지라는 건 처음부터 없었구나.
내가 오늘 만나야 할 사람이 바로 이 할머니였구나.
“누가 보냈냐고 물으시면, 장은호 회장으로부터 명함을 받았습니다.”
“장은호? 장영복의 막내?”
눈뿐만이 아니었다.
가는 귀가 먹은 척 연기했던 건지, 이제 할머니는 내 말을 하나도 흘림 없이 다 잘 알아듣고 있었다.
노인에 대한 궁금증은 커져만 갔다.
도대체 이 사람은 누구길래 태상 자동차 그룹 회장의 이름을, 그리고 이제는 세상에 없는 대한민국 경제 대통령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걸까?
“할머니는 도대체 누구십니까.”
“남에 관해서 묻기 전에 네가 누군지 먼저 말을 해야지. 가만 보자. 너 낯이 참 익어.”
관상쟁이가 관상을 보듯, 할머니는 내 얼굴을 시간을 들여 유심히 뜯어보았다.
“··· 그렇구나, 그래. 이제 알겠다.”
뭘 알겠다는 건지, 할머니는 갑자기 박장대소를 했다.
나야 영문을 알 수 없으니 그저 눈앞에 광경을 멀뚱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너, 틀림없이 개호주로구나.”
이건 또 뭔 소리란 말인가.
나한테 욕이라도 하는 건가?
“예? 개호주라니요.”
“새끼 호랑이 말이야. 장영복의 씨가 틀림없어. 내 말이 맞지? 장은호가 보냈다는 걸 보니 이제야 네 집을 찾아 들어간 모양이구나.”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입이 떡 벌어져 노인을 바라보았다.
“방으로 들어가자. 삯을 쳐달라고 했지? 오냐, 내가 일한 값은 쳐줄 터이니.”
복희 할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