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초대 (3)
“할 이야기라.”
장은호 회장은 나의 눈동자 안에서 거칠게 타오르는 불꽃을 보았는지 큼, 헛기침했다.
잠시 시선을 땅바닥에 떨군 그는 무언가 망설이듯 잔디를 발끝으로 밟아대었다.
흠━
숨을 한번 몰아쉰 그는 고개를 들어 나를 보고 입을 열었다.
“너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는데 날 따라오겠니?”
말은 마친 장은호 회장은 나를 앞서서 두 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석에 끌리듯 나도 모르게 그의 넓은 등 뒤를 따르게 되었다.
그렇게 몇 발자국을 더 걸어 들어갔을까.
장은호 회장의 걸음이 멈춘 곳에는 저택 입구 쪽에서는 보이지 않던 창고 하나가 숨겨져 있었다.
“여기는 뭔가요?”
“여기?”
장은호 회장은 두 팔을 쫙 펴고는 관객 앞에 선 서커스 단장처럼 말했다.
“내 젊은 시절의 낭만과 꿈이 잠들어 있는 곳이지.”
안에 얼마나 대단한 것이 있길래···
창고는 셔터로 굳게 닫혀있었다.
드르륵━
장은호 회장은 벽 어딘가를 더듬어 문을 개폐하는 버튼을 눌렀다.
버튼에서 그의 손이 떨어지자 철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문이 다 열렸지만, 창고 안은 동굴과 같이 컴컴했다.
아직은 장은호 회장의 낭만과 꿈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와.”
창고에 불을 들어오자 나도 모르게 입에서 탄성이 나왔다.
일단 나에게 익숙한 것은 보였다.
헬스 기구들.
해머 사이언스 이사가 자신이 디자인해주었다고 말한 개인 헬스장이 여기였구나.
“영수, 너 헬스장 차렸다고 했지? 어떠냐. 내 운동 공간은?”
“훌륭하네요. 덤벨이 150파운드짜리까지 있네요. 일반 헬스장에선 보기도 힘든 건데.”
“서양 애들은 우리랑 근골 자체가 다르니까. 어렸을 때는 걔들한테 지는 게 싫어서 진짜 악으로 운동했었어. 이젠 뭐··· 시간도 없고 나이도 먹어서 유지할 정도로만 운동하고 있지. 그것보다는 저기 좀 봐봐라.”
장은호 회장이 가리킨 곳에는 바이크가 3대 서 있었다.
할*데이비슨.
“어때, 멋지지? 다 커스텀 모델이야. 오토바이값보다 튜닝비가 더 들었을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는 남자라면 누구나 심장이 뛸 법한 멋진 공간이다.
장은호 회장은 3대의 바이크 중에서 가장 연식이 오래되어 보이는 물건 쪽으로 다가갔다.
그게 그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기라도 한 걸까?
연료 탱크를 매만지는 장은호 회장의 손길이 예사롭지 않았다.
“팻보이야. 터미네이터2에서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그리도 멋지게 타고 종횡무진으로 움직이던 그 바이크지. 그 영화를 보고 홀딱 반해서 미국에서 19살에 운전면허를 따자마자 이놈을 샀어.”
“재벌가 자제의 품격에 어울리는 물건은 아닌 것 같은데요.”
하하━
내 말에 장은호 회장은 크게 웃었다.
“맞아. 젊었을 때 반항아에 가까웠지. 네 말처럼 재벌 3세라는 꼬리표가 지긋지긋했어.”
장은호 회장은 바이트의 시트 위에 몸을 얹었다.
할*데이비슨의 오토바이는 그의 큰 체구와 찰떡처럼 잘 어울렸다.
마치 중세의 기사가 말 위에 올라타 있는 것처럼 보였다.
“미국 땅이 얼마나 넓은지 아니? 바이크를 타고 끝없이 펼쳐진 땅을 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아. 진정한 자유의 경지에 들어서는 거지. 평생 이렇게 살수만 있다면 바랄 게 없다고 생각했었어. 그때는.”
회상에 잠긴 장은호 회장의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자유롭게 살던 사람이 왜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쟁의 길을 걸으려고 하는 것일까.
“그럼 왜 돌아오셨습니까. 한국에.”
“나 혼자만 생각했다면 계속 미국에 있었겠지. 하지만 소미가 태어나고 많은 것들이 바뀌었어. 부모가 된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야. 눈도 제대로 못 뜨는 아이가 내 손가락을 작은 손으로 꼭 잡을 때 나는 다짐했어. 이 아이를 위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고.”
장은호 회장의 말은 달리는 기차처럼 멈추지 않았다.
“때마침 아버지가 날 불렀지. 이제 한국으로 그만 돌아오라고. 곰곰이 생각했봤어. 그래, 비겁하지만 선택을 해야겠구나. 내가 세상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은 역시 태상의 이름을 빌리는 것이겠구나.”
장은호 회장은 일전에 날 만났을 때 세상을 좋은 방향으로 바꾸기 위해 총수가 되고 싶다고 했다.
사실 그때는 그저 내 앞에서 자신의 명분을 허울 좋게 꾸며내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자본주의의 첨병인 태상 그룹. 그리고 그곳의 꼭대기에 서겠다고 선언한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치고는 너무나 순진한 소리였으니까.
하지만 그게 장은호 회장의 본의(本義)였단 말인가.
”아까 네가 물었지. 너에게 할 말이 없냐고. 물론 아직도 네가 내 손을 잡길 원하는 건 여전해. 하지만 더 이상 강권할 생각은 없다. 널 부른 건 인간 대 인간으로서 네가 마음에 들기 때문이야. 가족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건대 오늘만큼은 결코 얄팍한 수 따위는 없다.“
물음에 대한 답은 뒤로 밀어놓고 젊은 시절의 서사부터 풀어놓다니.
이래서는 의심하는 내가 못난 사람이 되는 것 같다.
제기랄,
역시 보통이 아니다.
곰의 탈의 쓴 여우.
”알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저도 회장님의 진심을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하나 더 물어보고 싶습니다.”
“뭐지?”
“오늘까지라고해봐야 겨우 두 번 만났을 뿐입니다. 회장님은 무슨 이유로 절 이렇게 높게 쳐주시는 겁니까.”
장은호 회장은 바이크에 몸을 기대고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내가 널 왜 여기에 데리고 왔는지 아니? 널 보면 나의 젊은 시절이 생각나. 그래, 네가 나와 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닮았다구요?”
“그래. 넌 태상을 거절했지. 나와는 다르게. 솔직히 말하자면 그걸 응원하는 마음도 없지는 않아.”
바이크에서 내린 장은호 회장은 내 곁으로 다가왔다.
내 어깨 위에 손을 올려놓은 장 회장의 말투는 결연했다.
“아무리 싫다고 해도 나는 틀림없는 너의 형이다. 설령 네가 날 돕지 않는다고 해도.”
“··· 제가 정말 회장님을 형이라고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그는 외투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명함 한 장을 뽑아 들었다.
장은호 회장은 잠시 그 명함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이걸 받아라.”
이상한 명함이었다.
주소 하나만 달랑 적혀 있을 뿐, 전화번호도 이름도 없었다.
“이게··· 뭡니까?”
“내 동생에게 주는 선물이지. 찾아가 보거라. 나에게도 단 한 장 밖에 없는 명함이야.”
장은호 회장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한영수가 장은호의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던 때.
이걸 그저 우연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가혹한 운명의 장난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장영복 회장의 또 다른 자식들 역시 회합을 하고 있었다.
바로 장은수와 장은우.
장소는 일전에 장은수가 고윤아를 비밀리에 만났던 바로 그 바였다.
“회장님. 장은우 사장님이 5분 뒤에 도착하실 예정입니다.”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마친 황 실장이 장은수에게 말했다.
“알겠어. 밖에 나가 있어.”
장은수의 명에 따라 황 실장은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한 뒤 자리를 벗어났다.
그가 나가고 채 몇 분이 지나기도 전, 바의 문이 열렸다.
또각━ 또각━
백화점과 T 마트를 맡고 있는 태상 그룹 내 유통업의 대모 장은우의 등장이었다.
베이지색 슈트를 입고 명품 클러치를 들고 있는 그녀는 기업의 오너라기보다는 뭐랄까, 크리에이티브 아티스트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오빠도 여기 참 좋아하네.”
“누구에게나 마음의 고향이 한 곳쯤은 있잖아. 나에겐 여기가 그런 곳이고.”
“근데 그거 알아? 오빠의 마음의 고향을 다른 사람들은 굉장히 불편해한다는 거. 내 기억에 여기서 오빠한테 좋은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바텐더, 난 그냥 진토닉 한 잔”
바텐더는 장은우의 주문을 받고 능숙하고 빠른 손놀림으로 칵테일을 만들어 내놓았다.
늘 그랬던 것처럼 그는 그걸로 자기 할 일을 다 했다는 듯이 조용히 자리를 비웠다.
“여전히 말이 톡톡 쏘는구나. 그러니까 네가 아직 결혼을 못 하는 거야.”
“우리 장은수 회장님은 여전히 무례하시고. 그렇게 세상 떠들썩하게 이혼 한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 않아?”
“그래. 결혼, 그거 정말 피곤한 일이야. 너처럼 애완동물이나 키우면서 사는 게 훨씬 낫지. 아무렴. 저번에는 영화배우였던가? 아, 아니다. 아이돌이었지?”
장은우는 붉어진 얼굴로 장은수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장은우의 입이 조용해지자 자기가 이겼다고 생각했는지 장은수는 낄낄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본론만 이야기하자. 왜 불렀어?”
“왜? 이 오빠가 좋은 시간 보내고 있는데 방해라도 했나?”
“그만해.”
“우리의 돈독한 우애를 재확인하는 차원에서 보자고 한 거지. 무슨 이유가 있겠어. 사장단 모임에는 왜 참석 안 했어.”
“노인네들 모여 있는 자리에 뭐하러 가.”
장은우가 흥, 코웃음을 쳤다.
‘그래, 넌 원래 허영심만 가득한 애였지. 계속 그렇게 있어.’
장은수는 속마음은 감춘 채 동생의 말에 동의를 한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차피 어차피 그 노인네들 우리 장 씨들의 머슴에 지나지 않아. 주인인 우리가 그들에게 휘둘릴 필요가 없지.”
장은우는 오빠의 말에 가타부타 대답 없이 칵테일을 한 모금 마셨다.
어두운 조명 아래서 장은수의 안광이 빛났다.
“이 대한민국의 명품시장을 키운 건 다 네 덕 아니냐. 앞으로도 계속 응원하고 있으마. 그룹 차원에서도 전폭적으로 지지할 거고.”
“그래? 인정해준다니 고맙네. 그런데 오빠나 나나 지금 그룹 안에서 동등한 위치 아니야? 마치 오빠가 총수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네?”
“말이 좀 섭섭한데. 어차피 그 자리에 누가 앉을지 너도 잘 알고 있잖아. 상징적인 의미로 비워두는 것뿐이야. 우리의 아버지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왜, 아니면 네가 대권을 꿈꾸기라도 하는 건가?”
“나는 아니지. 관심 없어. 그런 숨 막히는 자리보다 재밌는 게 더 많으니까. 하지만 은호는?”
순간 장은수의 볼이 씰룩거렸다.
언제부턴가 장은수는 장은호의 시선을 참을 수가 없었다.
‘평생을 망나니처럼 살아오던 놈이 감히 형의 자리를 노려···?’
이따금 장은수는 장은호의 눈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발견하곤 했다.
그 눈을 보고 있자면 자신이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 같은 모멸감이 가슴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너도 돌아가는 판을 보면 알겠지. 그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이 아무리 날뛰어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이야. 명분도, 돈도, 지분도 모든 것이 나한테 안돼. 태상 건설 그룹은 말할 것도 없고, 전자, 금융··· 이미 내 위치는 콘크리트처럼 굳건해.”
”그렇게 무섭게 쳐다보지 마. 승산 없는 곳에 배팅할 생각 없으니까. 그런데 오빠가 나의 지지를 확인하고 싶다면 나도 무언가 확실한 약속을 받아야 하지 않겠어?“
”약속이라···“
장은수는 고개를 숙이고 음산하게 웃었다.
그가 다시 얼굴을 들었을 때 조금 전의 웃음기는 싹 사라지고 온데간데없었다.
장은수는 흉악한 눈으로 장은우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녀를 집어삼키기라도 할 듯이.
그는 손가락으로 바 테이블을 톡톡 두들기며 말했다.
”그래도 피를 나눈 사이라고 좋게 이야기하니까 착각을 하는구나. 사실 네가 어디에 배팅해도 나는 상관없어. 어차피 결과는 달라질 게 없으니까. 그래, 약속하나 하지. 내 옆에 가만히 붙어 있으면 네가 좋아하는 명품 장사, 그건 계속하게 해줄게. 만약 네가 장은호와 짜고 날 엿 먹일 생각을 한다면 각오를 단단히 하는 게 좋을 거야. 내가 반드시 태상에서 너희 둘의 이름을 지워버릴 테니까.“
명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