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초대 (2)
“이 사람에게 내가 태상 총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처음 밝혔을 때 뭐라고 했는지 알아?”
“참나, 도대체 이 이야기를 몇 번을 하는 거예요. 당신은.”
“영수는 처음 듣잖아. ‘그래서요’라고 하더군. 걸작이지? 그래서요 라니.”
“도련님이 그걸 보셨어야 해요. 무슨 자기가 드라마 속 비련의 주인공이라도 되는 것처럼 폼을 잡고선···”
부정하지 않겠다.
식사 자리는 유쾌했다.
식탁 위의 음식들은 훌륭했고, 대화 주제는 그저 시시콜콜한 잡담이었고, 일상적인 이야기들이었다.
내가 상상했던 재벌가의 엄숙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건 그렇고 영수야.”
장은호 회장은 와인을 한 모금 넘겼다.
내가 사 온 와인은 벌써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고윤아 변호사랑은 좀 어때?”
“좋습니다. 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 거 말고.”
장은호 회장의 말은 의뭉스러웠다.
무슨 소리를 하는가 싶어 나는 그의 입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날 우리 셋이 만났을 때 말이야. 고 변이 네 얼굴에 금이라도 발라져 있는지 그렇게 빤히 쳐다보더라.”
“그랬습니까? 난 그날 회장님이 하는 말에 집중하느라 주변을 둘러볼 여유도 없었습니다.”
하하하━
장은호 회장은 특유의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소리를 따라 그의 목울대가 꿀렁거렸다.
“고윤아 변호사라면 시아버님께서 참 예뻐하시던 분이잖아요.”
“당신께서 그러셨지. 그야말로 재색겸비가 딱 어울리는 사람이랄까.”
“자기 부인 앞에서 못 하는 말이 없네요.”
“그래서 여자가 아니라 사람이라고 칭했잖아. 나에게 여자는 당신 한 명뿐이니까.”
“말은···”
잠시 티키타카를 주고받던 부부의 시선이 다시 나에게로 향했다.
“넌 몰랐다고 하니까 말해주는 건데, 널 쳐다본 것뿐만이 아니야. 당장이라도 너에게 안길 것처럼 잔뜩 네 쪽으로 몸이 기울어져 있더라.”
내가 아는 고윤아는 항상 앉아있거나 서 있거나 자세가 꼿꼿한 사람.
그날 고윤아가 그랬었구나.
하긴, 그때 그녀의 태도는 뭔가 이상하긴 했다.
- ··· 왜요. 왜 그렇게까지 날 생각해주는 겁니까?
고윤아는 나의 질문에 침묵했었다.
그래, 나도 알고 있다.
그녀의 마음을 짐작 못 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를 보며 귀 끝이 앵두처럼 빨개지곤 하는 고윤아.
내 일을 자기 일처럼 생각해주는 고윤아.
그녀의 목에는 항상 내가 선물한 목걸이가 걸려있었다.
나 역시 고윤아에 대해서 조금 다른 감정을 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녀에 대한 호기심이 관심으로 발전한 것은 어제, 오늘 일은 아니다.
고윤아가 내게 보여주었던 수어(手語)를 해석하기 위해 한 시간을 인터넷을 찾아 뒤졌었으니까.
항상 관계의 끝을 먼저 생각하기에 시작을 어려워하는 나에게 고윤아라는 존재는 제법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물론 지금 이 자리에서 그런 속내를 드러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고윤아 변호사와 좋은 파트너 관계입니다. 저로서는 고마운 사람이죠.”
“어머! 도련님 남녀 사이는 모르는 일이죠. 저도 학생 때 저이랑 이렇게 결혼하게 될 거라곤 생각도 못 했었어요.”
서정은은 입을 가리고 웃었다.
“저랑은 어울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앞으로 더 큰 일을 해야 할 사람이고요.”
“영수, 네가 어때서.”
“저야 배움도 짧고, 아는 것도 많이 없으니까요.”
“아니야.”
장은호 회장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의 얼굴에 웃음기가 싹 가셨다.
어떤 엄숙함마저 느껴지는 게, 마치 나를 꾸짖기라도 할 것 같은 기세였다.
“설마 영수, 너 사람의 그릇이 학벌같이 쩨쩨한 것으로 결정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건 어느 정도는 타고나야 하는 거야. 유전적인 형질 같은 거지. 내가 보기에 너는 아주 좋은 그릇을 타고 태어났어. 단지 너에겐 기회가 없었을 뿐이야.”
그러고 보니 예전에 고윤아도 나에게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녀는 내가 사람과 사물을 보는 안목을 타고 태어난 것 같다고 말했었다.
그릇이라···
하긴, 생각해보면 500억을 상속받은 이후로 놀랍도록 인생이 잘 풀리고 있다.
사실 일확천금을 얻고 나서 오히려 인생이 더 끔찍해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가?
재산을 빼앗기고, 피붙이들과 원수가 되고, 심지어는 목숨을 빼앗기기까지···
결코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주변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내가 돈이라는 망망대해에 떠 있는 한 척의 배라면, 잔잔한 파도는 계속해서 나를 앞으로 밀어주고 있다.
운명은 아직까진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것 같다.
장은호 회장의 말처럼 이것이 그릇의 차이일까?
“제 그릇이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그저 가진 거라곤 배짱뿐입니다. 꽤 거친 삶을 살아야 했으니까요.”
“배짱이 있다는 건 심장이 강하다는 소리지.”
장 회장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심장께를 쿡쿡 찔렀다.
“아무튼 고 변이 지금 널 서포트하는 모양새가 보기 좋더구나. 꼭 이성적인 관계가 아니더라도 넌 고변을 꼭 옆에 붙잡아두어야 해. 내 생각이지만 아버지가 네게 남긴 진정한 유산은 돈이 아니라 그녀 같으니까.”
“... 아빠, 나 졸려.”
그때, 어른들의 목소리 사이로 어린 새의 지저귐이 들려왔다.
진작에 자기 배를 다 채우고 자기 엄마의 무릎 위에 앉아있던 소미였다.
어린 소녀에게 어른들의 대화는 참을 수 없는 지루함이었을 것이다.
아이의 눈은 반쯤 게슴츠레 감겨 있었다.
“우리 공주님이 졸리시구나!”
소미의 투정에 장은호 회장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돌았다.
행복함이라는 놈이 장은호 회장의 양쪽 입꼬리 끝을 잡아당겼다.
소미에게 다가간 그는 영차, 소리를 내며 아이를 들어 안았다.
“여보. 나 소미 좀 재우고 올게. 소미야, 삼촌 조금 이따가 가실 건데 지금 잘 거면 인사해야지.”
“아빠, 삼촌 자고 가면 안 돼? 우리 집에 방 많잖아.”
“안돼. 삼촌 바쁘셔.”
소미는 손으로 눈을 비비더니, 아빠의 품 안에서 내게 동그란 머리를 끄덕여 보였다.
“삼촌, 다음에 또 오실 거죠? 다음에는 낮에 일찍 오셔야 해요.”
“하하하, 소미가 삼촌이 마음에 들었구나?”
“응. 삼촌 멋있어. 그리고··· 얼굴은 다른데 꼭 아빠 같아.”
나는 소미에게 손을 흔들었다.
와인이 아니라 소미를 위한 선물이라도 사 올걸.
장은호 회장에게 저렇게 사랑스러운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게 뒤늦게 아쉬워졌다.
장은호 회장은 딸을 안고 계단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소미가 도련님을 잘 따르는 걸 보니 엄마로서 참 신기하네요. 워낙에 수줍음이 많은 아이인데.”
“참 예쁜 아이네요. 장은호 회장님도 집 안에서는 어쩔 수 없는 딸바보인가 봅니다.”
“우리 애 아빠가 아주 딸이라면 끔찍해요. 도련님은 32살 맞으시죠? 어서 결혼하세요. 아이를 낳아보면 인생에 대해서 또 다른 시각을 가지게 된답니다.”
“글쎄요. 저는 아직 결혼에 대해서는 생각을 안 해봐서···”
서정은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도 오늘 소미가 보면서 마음이 좀 아픈 것도 있었어요. 애가 얼마나 친족에 대한 정이 그리웠으면···”
서정은은 자기 앞의 와인잔 끝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말했다.
그녀의 미처 다하지 못한 말이 무엇일지 능히 짐작되었다.
“저도 겪어보니 태상이라는 이름은 절대 가볍지 않더군요. 그건 어린 소미에게도 마찬가지겠죠.”
“맞아요. 최대한 평범하게 키우고 싶지만··· 그건 그렇고 남편으로부터 도련님에 대해서는 말씀 들었어요. 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혹시 제가 이런 말씀 드리는 게 실례일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저는 그 시절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니까요.”
“역시, 애 아빠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네요.”
“회장님이 저에 대해 뭐라고 말을 하셨길래···”
“남편은 정말 도련님이 마음에 든 모양이에요. 도련님을 만나고 온 날 퍽 기뻐 보였거든요. 그렇게 들떠 있는 모습을 본 것은 오랜만이었어요.”
“그날 만남에서 저는 회장님이 원하는 것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기뻐했다니 조금 의외네요.”
“그 이야기도 들었어요.”
왜일까, 서정은의 얼굴이 조금 쓸쓸해졌다.
“재벌가에 시집온 사람으로서 부끄러운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저는 그냥 우리 가족만 행복하면 그걸로 만족하는 사람이에요. 시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나선 모든 게 혼란스러워요. 밤늦게 집에 들어와서 씻지도 앉고 그대로 곯아떨어지는 저이를 볼 때면 마음 한구석이 아려오고··· 가끔은 겁이 날 때도 있어요. 남편이 이대로 어딘가 멀리 가버릴까 봐···”
서정은과 많은 대화를 나눠본 것은 아니지만, 이제 알 것 같았다.
장은호 회장이 자기 아내를 선택한 이유를 말이다.
여기가 장은호의 베이스캠프구나.
장은호 회장의 당당함은 거대 그룹의 회장이라는 타이틀이 아니라 여기서 나오고 있었구나.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게 어떻게 들리실지 모르지만, 도련님이 남편의 형제가 되어주셨으면 좋겠어요.”
“그 이야기라면 이미 회장님께 못 박아두었습니다. 저는 그런 대단한 일을 도와드릴 깜냥도 안될뿐더러, 자신도 없습니다.”
“아니요.”
서정은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저이가 원하는 걸 이룰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말이 아니에요. 우리 남편은 사실 외로운 사람이에요. 이제 앞으로 더 외로워질 거구요···”
“둘이 나 빼고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고 있어?”
소미를 재우고 내려온 장은호 회장이 우리 곁에 다가와 말했다.
나와 서정은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었다.
“왜들 그래? 내 욕이라도 한 거야? 어쩐지 귀가 간지럽던데?”
“눈치는 참 빠르기도 하지. 집에서 살림이나 하는 여자가 어디 가서 태상 자동차 회장님 욕을 할 수가 있어야죠. 이번 기회에 도련님 상대로 실컷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했지요.”
“그래? 이제 그럼 내가 우리 와이프 흉을 봐야겠네. 영수야, 잠깐 나가자. 나랑 바람이나 좀 쐬자고.”
*
어느새 해는 서쪽으로 지고, 어둠이 찾아왔다.
조명이 켜진 정원을 장은호 회장과 나는 발을 맞춰 느리게 걸었다.
“정실 전자에는 어떻게 투자하게 된 거냐?”
“회사 일을 하다가 알게 된 업체였어요.”
“보는 눈이 있구나. 이왕이면 투자가 아니라 아예 인수해서 경영을 해보지 그랬어. 총알은 충분했을 텐데?”
“아직 사람들을 책임져야 하는 위치에 서는 게 준비가 안 된 것 같아서요.”
“누구나 처음은 있는 법이야.”
처음.
그 말의 울림이 나에게 예사롭게 다가오지 않았다.
나는 걷던 발길을 멈췄다.
“그렇죠.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죠.”
내가 갑자기 멈춰서자 장은호 회장은 앞서 걷던 걸음을 멈추고 나를 의아하게 돌아보았다.
“지금 뭐라고 했니?”
“오늘이 처음입니다. 나와 피가 이어진 사람과 같이 밥을 먹은 건.”
장은호의 가족들은 나를 스스럼없이 그들의 일원처럼 대해주었다.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인 것처럼.
나도 사람인지라 어쩔 수 없었다.
장은호 부부의 장난스러운 대화에, 천진난만한 소미의 행동에, 나도 모르게 어느새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내 형제에 대해 시나브로 마음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새 장은호 회장의 초대에 다른 의도가 없기만을 간절히 바라게 되었다.
어떤 공작도, 음모도 없이 그의 말처럼 그저 날 동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오늘 저녁 식사는 오직 그 이유만 있기를 원했다.
장은호 회장이 나의 결핍을,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영악하게 이용하려는 것이 아니길.
만약 그렇다면 내 안에 있는 작은 아이. 차디차게 버림받았던 그 아이는 영원히 자기의 핏줄을 저주하게 될 테니까.
나는 뜨거운 눈으로 장은호 회장을 바라보았다.
“회장님. 오늘 저를 초대한 진짜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에게 할 이야기가 있으시죠?”
초대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