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초대 (1)
“안녕하십니까. 모시러 왔습니다.”
거대한 기함 같은 태상 자동차의 고급 브랜드 ‘TNEXT'의 최고급 세단이 내 앞에서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장은호 회장은 기사 한 명이 나를 픽업하러 갈 것이라고 했다.
차에서 내린 기사는 입고 있는 검은 정장이 터질 정도로 건장한 남자였다.
“회장님의 자택까지는 한 시간 반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편하게 쉬시기를 바랍니다.”
건조한 목소리의 남자는 이 말을 끝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사소한 질문 하나 하지 않았다. 나로서는 그게 오히려 편했다.
내가 지금 타고 있는 차의 이름은 ‘산토샤’.
산스크리트어로 만족을 뜻한다는 네이밍답게 퍼스트클래스에 탑승이라도 한 듯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고급스러운 내장재들은 물론이요, 도로가 아닌 구름 위를 달리는 듯한 승차감도 일품이었다.
태상 자동차 공돌이들의 혼이 담겨있다는 V8 엔진은 강한 출력을 뿜어내면서도 정숙함을 잃지 않는 놀라운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인터넷 댓글들이 으레 그렇기 마련이지만, 국내 완성차 업체를 향한 자동차 마니아들의 시선은 유독 깐깐했다.
정식 사명(社名)보다는 조롱 섞인 멸칭을 쓰는 것이 그들에겐 일상적인 일. 그래도 ‘TNEX’ 라인에 대한 평가는 제법 나쁘지 않았다.
오랜 전통과 기술을 가지고 있는 독일 3사와 같은 위치에 서기에는 아직 이르지만, 그래도 잘 만들었다는 것이 세평이었다.
그렇게 안락한 차 안에서 창밖을 얼마나 멍하니 구경하고 있었을까,
서울을 지나쳐 몇 번의 도심 시가지를 지나는 것 같더니, 어느새 여기가 대한민국이 맞나 싶을 정도의 생경한 풍경들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의 어딜 가나 눈만 돌리면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아파트 단지들.
하지만 내가 들어선 곳은 지중해의 어느 도시에 온 것처럼 화려한 건축양식을 뽐내는 단독 주택들이 드문드문 서 있을 뿐이었다.
마을이라고 표현해도 좋을까.
이 기묘한 마을의 입구에서 300m 정도 더 들어가자 마침내 장은호 회장이 사는 집이 나왔다.
당연히 좋은 곳에 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일반 가정집이라곤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스케일이었다.
멋들어지게 조경된 나무숲 안에 둘러싸여 있는 2층짜리 주택은 마치 유럽의 작은 성과 같았다.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주변에 높은 건물이라고는 하나도 없으니, 사생활을 보호하기에는 제격인 자리였다.
2M는 족히 넘을 것 같은 거대한 철문 앞에서 한 덩치 하는 운전기사는 창문을 내리고 인터폰을 눌렀다.
“예.”
인터폰 건너편에선 장은호 회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회장님. 박 기사입니다. 손님 도착하셨습니다.”
“아, 그래요? 박 기사님 고생하셨어요.”
이윽고 철문이 열리고 주택, ··· 아니 저택이라고 불러야 마땅한 곳의 내부로 차가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넓은 잔디 공원이었다.
와, 놀랍게도 정원 한쪽에는 수영장까지 있었다.
“여기서 내리셔서 안채로 가시면 됩니다.”
박 기사는 차를 세우고 운전석에서 내려 뒷좌석의 문을 열고 나를 배웅했다.
“차는 어디에다 대시나요?”
아무리 둘러보아도 차를 댈만한 곳이 보이지 않아 물었다.
“지하 주차장이 있습니다. 좋은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정원에 서서 저택을 다시 한번 올려다보았다.
웅장하고, 훌륭했다.
상아색과 적갈색이 고급스럽게 섞여 있는 외벽, 아치형으로 크게 낸 창, 담벼락 안을 훔쳐볼 수 없도록 담장 안쪽에 줄이어 서 있는 커다란 식목(植木)들까지.
하기야, 다른 누구도 아닌 장은호 회장의 집인데 대한민국 최고의 건설사인 태상 건설이 혼신의 힘을 기울여 지었겠지.
“영수야.”
그때 현관문을 열리고 누군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장은호 회장이었다.
후드티에 트레이닝복 바지의 소탈한 차림새인 그는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는 발을 떼어 그에게 다가갔다.
“와줘서 고맙다.”
장은호 회장은 다정하게 손을 들어서 내 어깨를 두어 번 툭툭 쳤다.
“정말 멋진 곳이군요.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하,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 삽을 뜰 때 내 의견을 많이 냈었는데, 우리 아내는 별로 마음에 안 들어 하더라고. 너무 과하다고. 자, 들어가자.”
나를 가족에게 소개하고 싶다는 장은호 회장의 제안은 정말 예상 밖의 일이었다.
- 가족이라면 장은수, 장은호 회장에게 절 소개하겠다는 겁니까?
- 설마. 아내와 딸이 있다.
- 하지만 저는···
- 네가 왜? 다른 의도는 없다. 네 생각이 어떻든, 형으로서 동생을 한번 밥 먹이고 싶은 것뿐이야. 사람들 눈이 많은 곳에서 만나기는 서로 불편한 문제가 생길 것 같고··· 우리 집으로 오지 않겠니? 내가 사람을 보내마.
많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왜일까.
장은호 회장의 초대가 싫지만은 않았다.
만약 장은호 회장이 내가 사생아라고, 아버지의 실수이자 부끄러운 존재라고 생각했다면.
자기 집 안으로 날 불러들여 아내와 딸에게 날 소개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유치한 감상에 젖어 마음이 동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살아있는 내 혈족에게 처음으로 인정을 받는 것 같은 기분.
“참, 박 기사에 대해서는 걱정할 것 없다. 너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를뿐더러 원체 입이 무거운 사람이니까. 가끔 이렇게 내 부탁으로 손님을 태우기도 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덕분에 조용하게 잘 왔습니다.”
“그래, 들어가자.”
고풍스러운 저택 외부와는 집안 내부에는 또 반전이 있었다.
마치 미술관에라도 온 듯 현대적인 양식을 자랑하고 있는 실내였다.
그리고···
“도련님. 안녕하세요.”
주방에서 막 나왔는지 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한 여자가 나에게 인사를 했다.
저 사람이 바로 세간의 화제였던 장은호 회장의 부인이구나.
재벌가의 자제가 선택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소리겠지만, 그녀는 대단한 미인이었다.
하지만 뭐랄까, 거리에서 왕왕 볼 수 있는 인조적인 느낌의 얼굴은 아니었으며, 전체적으로 상대에게 편안한 느낌을 주는 외모였다.
“아··· 안녕하세요. 한영수라고 합니다.”
도련님이라···
호칭이 쑥스러웠다.
“그래, 영수야. 이쪽은 우리 아내. 태상의 회장님을 꼼짝 못 하게 만드는 여걸이시지.”
“반가워요. 서정은이에요.”
서정은은 내게 활짝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그녀의 악수에 응하곤, 나는 미리 준비했던 선물을 내밀었다.
“빈손으로 오기가 좀 그래서, 작은 선물을 준비해왔습니다.”
“어머, 감사해라. 뭘까요? 열어봐도 될까요?”
“와인입니다. 제가 좋은 걸 잘 몰라서···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네요.”
“어디 보자.”
장은호 회장은 자기 아내로부터 내가 준비한 선물을 건네받았다.
“케이머스 카르베네 소비뇽이구나. 좋은 와인이지. 지금 식사하면서 같이 한잔하면 되겠다.”
“당신 또 신나셨네요. 교수님이 술 좀 줄이라는 말 기억 안 나세요?”
“하하하, 오늘 같은 날 어떻게 술이 없을 수가 있어. 내 동생이 처음으로 우리 집에 온 날인데. 가만, 소미는?”
“쑥스러운지 제 방에 올라갔어요.”
“저런, 삼촌이 왔는데 인사를 해야지. 소미야!”
장은호 회장의 굵직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무섭게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작은 여자아이가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우리 공주님. 이리 오세요.”
6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는 제 아빠의 부름에 폴짝폴짝 계단을 내려왔다.
“이리와 소미야.”
장은호 회장은 자신의 품 안까지 다가온 딸을 번쩍 안아 들어 올렸다.
“소미야. 삼촌한테 인사해야지.”
“안녕하세요.”
소미는 수줍음을 많이 타는 모양이었다.
개미만 한 목소리로 나에게 인사를 했다.
나는 말없이 아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소미야.”
“응?”
“아빠가 오늘 영수 삼촌이 우리 집에 온 거 뭐라고 했지?”
“우리 가족만의 비밀이라고 했어.”
“그래. 소미는 어떤 아이지?”
“약속을 잘 지키는 어린이.”
“그래, 예쁜 우리 딸.”
장은호 회장은 딸의 볼에 입을 맞추곤 아이를 다시 바닥에 내려놓았다.
“영수야, 식사 준비가 아직 덜 되었다. 잠깐 소미랑 같이 있어 줄 수 있겠니?”
“그렇게 하죠.”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여버렸다.
도련님··· 삼촌··· 내 동생···
약속이라도 한 듯 이 집의 구성원들은 스스럼없이 날 가족처럼 대해주었다.
내게는 익숙한 분위기는 분명 아니었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뭔가 알 수 없는 뭉클함이 있었다.
오늘만큼은 태상이라는 이름에 늘 세웠던 가시를 숙여도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영수 삼촌.”
“안녕. 너 이름이 소미라고 했지?”
“네. 소미예요. 친구들은 절 솜이라고 불러요. 삼촌은 정말 우리 아빠 동생이 맞아요?”
“··· 그래. 맞아.”
아이의 별 뜻 없을 순수한 질문에 긍정을 표했다.
내 입으로 처음 장 씨들과의 관계를 인정해버린 셈이 되어 버린 것이다.
어쩌겠는가. 어른들의 사정을 이 작은 아이에게 설명해 줄 수도 없는 법이니.
“그런데 이상해요.”
“뭐가?”
“우리 아빠는 고릴라 같은데 삼촌은 너무 잘생겼잖아요.”
하하━
소미의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소미는 몇 살이야?”
“저 7살이에요. 내년이면 이제 초등학교 들어가요.”
“그렇구나.”
“삼촌, 밥이 다 될 때까지 저랑 같이 사자 가족 봐주시면 안 돼요?”
“사자 가족이 뭔지 나는 모르는데?”
“제가 제일 좋아하는 방송이에요. 이리로 오세요.”
아이의 작은 손이 내 손을 잡아 거실의 소파 쪽으로 끌었다.
소파 앞쪽에는 영화 스크린 크기만큼이나 커다란 벽걸이 텔레비전이 걸려있었다.
“같이 봐주시는 거죠?”
소미는 리모컨을 손에 쥐고 둥근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래. 같이 보자.”
수줍어하던 것도 잠시.
같은 피가 흐르고 존재에게 자연스럽게 이끌리기라도 한 걸까.
소미는 금세 내게 친근하게 굴었다.
“사자 가족, 용감한 아빠 사자! 다정한 엄마 사자! 그리고 아기 사자인 내가 있지요.”
자기가 좋아한다는 이 만화의 노래를 부르며 작은 율동까지 하기도 했다.
천진난만한 소미의 모습은 내가 알고 있는 여타 아이들과 다를 게 없었다.
나도 모르게 아이의 노랫소리를 따라 작게 손뼉을 쳤다.
소미는 소파 위로 펄쩍 뛰어오르더니 내 곁에 바짝 다가왔다.
그리곤 손나팔을 만들어 내 귀에 대고 대단한 비밀이라도 말한다는 것처럼 작게 속삭였다.
“삼촌. 삼촌은 저 솜이라고 불러도 돼요. 삼촌은 큰아빠랑 고모처럼 무섭지 않아서 좋아요.”
큰아빠라면 장은수 회장을, 고모라면 장은우 회장을 말하는 거겠지.
“큰아빠랑 고모도 집에 자주 놀러 오시니?”
소미는 둥근 머리를 좌우로 저었다.
“우리 집에 한 번도 오지 않았어요. 삼촌은 또 우리 집에 놀러 왔으면 좋겠어요.”
나는 말없이 소미를 바라보았다.
복잡한 감정이었다.
“둘이 벌써 친해진 거야?”
그때 장은호 회장이 나와 소미 옆에 다가와 말했다.
“아빠!”
소파에서 펄쩍 뛰어내린 소미가 장은호 회장의 품에 달려가 안겼다.
“아빠, 삼촌에게 또 우리 집 놀러 오라고 말했는데, 괜찮지?”
“우리 딸, 삼촌 이제 왔는데 벌써 헤어질 걱정하는 거야? 그래. 소미가 아빠랑 한 약속만 잘 지키면 삼촌 또 놀러 올 거야.”
장은호 회장이 딸을 품에 안은 채로 날 보며 눈을 찡끗했다.
“자, 영수가 이리 와라. 같이 밥 먹자.”
초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