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곰의 탈을 쓴 여우
“회장님, 이종현 전무입니다.“
”예. 들어오세요.“
장은호 회장의 집무실.
집무실 문을 열고 말쑥한 차림의 두 남자가 들어와 장은호에게 고개를 숙였다.
사업전략실장 이종현 전무 그리고 전략 3팀장 공진모 부장.
장은호에게 있어 그들은 자신의 비전을 공유하고 있는 핵심 참모들이었다.
“어떻게 전무님이 직접 오셨습니까. 이쪽으로 앉으시죠. 공 팀장도 이리로 오세요.”
장은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응접실 소파로 이종현과 공진모를 안내했다.
먼저 말을 연 것은 이종현 전무였다.
“오토비스 쪽에는 저희 의사를 전달했습니다. 바로 정실 전자 쪽에 컨텍을 했다고 하더군요. 우선 소량 발주부터 넣어볼 예정이랍니다.”
평소 같으면야 이 전무가 고만고만한 회사와의 계약에 대해 신경을 쓸 하등의 이유가 없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장은호 회장이 직접 골랐다지 않나.
정실 전자에 대해 공 팀장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이종현 전무는 바짝 더듬이를 내밀었다.
“그렇군요. 잘 되었네요. 그런 중소기업을 발굴하는 것도 대기업들의 사회적 책무 아니겠습니까.”
“자갈밭에서 옥석을 골라내시다니, 역시 회장님의 혜안은 대단하십니다.”
“제가 한 게 뭐가 있겠습니다. 공 팀장의 보고서가 좋았습니다.”
“저도 공 팀장 보고서 꼼꼼히 다시 봤는데, 아이템이 훌륭하더군요. 그런 작은 회사에서는 거의 기적 같은 일 아니겠습니까?”
장은호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기존 협력 업체에는 섭섭한 이야기일지 몰라도, 앞으로는 그래야 합니다. 태상 차, 특히 전기차에는 아주 작은 부품조차 최고만 쓸 겁니다.”
“예, 그렇지 않아도 전기차 관련해서 말씀 좀 드리려던 참입니다.”
이종현 전무는 미리 준비해 온 전기차 사업 관련 현안 보고서를 장은호에게 내밀었다.
장은호의 구미를 자극할 수 있는 이슈이기도 하거니와, 요즘 들어서 장 회장의 총애를 받는 공진모 팀장을 견제하려는 다소간의 정치적 의도도 있었다.
“글로벌시장에서 태상 전기차 점유율이 전년 대비 실적이 좋습니다. 8.4%입니다.”
“2% 넘게 상승했군요. 의미있는 숫자입니다. 다들 고생해주신 덕분입니다. 그래도 아직 갈 길이 머네요.”
“중국 전기차 업체들로부터 점유율을 뺏는 게 쉽지 않습니다. 뭐 거기야 내수 시장도 엄청나지만, 국가적인 차원에서 전기차를 육성하고 있으니···”
“내연기관에서 축적된 기술력은 그네들보다 우리가 훨씬 우위입니다. 그 부분을 잘 살려서 계속 가야겠죠.”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거시적인 이슈가 나오자 입방아에 올랐던 정실 전자는 금세 세 사람의 머릿속에서 휘발되어 날아갔다.
이종현 전무의 예상대로 전기차 이야기가 나오자 장은호 회장은 눈을 반짝이며 새로운 대화 주제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한동안 회사의 방향성에 관해 대화를 나누곤,
“··· 그럼 회장님, 그만 일어나보겠습니다.”
“예. 전무님 말씀 잘 들었습니다. 공 팀장도 수고했어요.”
서로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려는 때였다.
갑자기 공진모 팀장이 무언가 생각이 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회장님. 하마터면 깜빡할 뻔했네요. 하나 더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예? 뭡니까?”
“일전에 궁금해하셨던 것 같아서··· 정실 전자의 투자자 말입니다. 100억 규모의 출자금을 내었더군요.”
“그래요? 회사 규모에 비교하면 굉장한 거금이 들어왔네요.”
장은호 회장은 다소 심드렁하게 말했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세계 시장에서 어떻게 하면 가장 높은 곳에 깃발을 꽂을 수 있을까에 대한 구상이 가득 차 있었다.
“이제 갓 서른 넘은 젊은 투자자라고 합니다. 정확히 확인된 건 이름이랑 나이 정도인데, 이름이 한영수라고 하더군요. 투자은행 소속은 아니고 순수한 개인인 것 같습니다.”
“잠깐만, 지금··· 한영수라고 했어요?“
”예. 맞습니다.“
하하하━
장은호의 입에서 파안대소가 터져 나왔다.
모르긴 해도 이 대한민국 땅 안에 수많은 한영수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공 팀장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오는 순간 장은호 회장은 확신했다.
그 한영수는 틀림없이 자신이 알고 있는 단 한 명의 한영수일 거라고.
‘이런 기막힌 일이 있나. 영수야. 내가 말하지 않았니. 운명이 너를 가만히 두지 않을 거라고.’
이종현과 공진모는 자신들의 보스가 저렇게 크게 웃는 이유를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따라서 같이 웃지도 못한 채 그저 눈만 껌뻑일 수밖에 없었다.
“혹시 회장님이 아시는 분입니까.”
“아, 내가 실례를 했네요. 아는 사람일 리가요. 그저 젊은 친구가 배포가 보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을 뿐입니다.”
“예. 회장님. 그럼 나가보겠습니다.”
살면서 몇 번쯤은 자석의 반대 극을 찾은 것처럼 강하게 끌리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비단 남과 여의 이성적인 호감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장은호에게 있어 한영수가 그랬다.
우습게도 그는 장은수와 장은우에게도 가져본 적 없는 형제의 정을 지난 만남에서 진하게 느꼈었다.
한영수의 패기 있는 모습을 보며 아버지를, 그리고 자신의 젊은 시절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던 장은호였다.
총수 자리싸움 때문이 아니더라도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한영수를 자신의 가까운 곳에 두고 일을 시키고 싶었다.
‘안 되지. 안 돼. 그 녀석은 최대한 숨기고, 보호해야지. 내가 들고 있는 가장 강력한 카드니까.‘
장은호는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다.
‘내가 먼저 연락해볼까?’
장은호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건 모양새가 좋지 않다.
자칫 한영수에게 자신을 포섭하기 위해 정실 전자 건을 진행했다고 괜한 오해를 심어줄 수도 있다.
단 한 번의 만남이었지만, 그런 식으로는 한영수를 잡을 수 없다는 걸 대번에 알아챈 장은호였다.
‘그 녀석은 해가 질 때까지 기다리는 타입이 아니야. 눈치가 제법이니까 분명 먼저 연락해 올 거다.’
장은호는 손에 쥐었던 휴대전화를 다시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
“너구나.”
장은호 회장은 말투는 내가 전화할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만 같았다.
“예. 회장님, 잠깐 통화 괜찮으십니까.”
“물론이지. 영수, 네가 먼저 어쩐 일이냐. 설마 일전에 하지 못한 운동 이야기를 하겠다는 건 아닐 거고.”
장은호 회장은 수화기 건너편에서 쿡쿡 작게 웃었다.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 전화했습니다.”
“뭐든지 말해라.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것이라면 숨기지 않을 테니.”
장은호 회장은 여전히 호방했다.
마치 나에게 자신의 흉금을 아낌없이 내보여줄 수 있다는 말투였다.
“혹시 정실 전자라고 들어보셨습니까. 회장님이 알기엔 영세한 업체이긴 하지만···”
“정실 전자. LED 제조 회사가 맞지? 최근에 컨버터 기술을 특허 출원 신청했고.”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이번에도 내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정실 전자가 최근에 태상 오토비스로부터 연락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거래를 터보자고.”
“그래. 그것도 알고 있다. 태상 오토비스는 우리 그룹의 주요 회사 중 하나니까.”
“··· 그럼 제가 정실 전자에 최근 투자한 것도 역시 잘 알고 계시겠군요.”
빙빙 돌려 말할 것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불에 달군 칼로 무른 버터를 찌르자는 심산이었다.
“글쎄. 어떨 것 같으냐?“
사실 전화상으로 몇 마디 나누었을 뿐이지만, 장은호 회장에 대해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고작해야 7억짜리 계약이다.
그 정도 자잘한 계약을 거대 기업의 우두머리가 알고 있다는 건 그가 회사의 전반적인 일 모두에 관심을 가지고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심지어 태상 자동차 그룹과 비교하면 먼지와 다름없는 정실 전자가 뭘 하는 업체인지 이미 정확히 알고 있지 않은가?
장은호 회장의 곰 같은 외형 속에는 집요함이 느껴질 정도의 꼼꼼함이 숨어 있구나.
첫 만날 때도 느꼈지만 역시 쉽지 않은 사람이다.
그런 그가 정실 전자의 뒷배경인 나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이미 질문 속에 답이 있군요. 만약 몰랐다면 놀라는 시늉이라도 하셨겠죠.”
“말이 재밌구나. 그래, 알고 있었어. 그럼 이번에는 내가 네 속마음을 한번 맞춰볼까?”
장은호 회장은 잠깐 말이 없었다.
수수께끼의 정답을 맞히는 통쾌함을 최대한 오래 즐겨보겠다는 듯.
“혹시라도 이 건이 성사된 이유가 너 때문이 아닐까 지레짐작하고 있겠지. 내가 널 회유하기 위해서 선심을 썼다고 말이야.”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틀리지도 않습니다.”
하하━
정은호의 웃음소리가 수화기를 너머 차 안에 울려 퍼졌다.
“네 오해다. 이거 섭섭한데. 난 그렇게 얄팍한 남자가 아니야. 일단 일의 선후관계가 잘못되었다. 정실 전자라는 회사를 알게 된 것이 먼저였고, 그다음이 너다. 정실 전자라는 회사만 봤어. 어쩌다 보니 너라는 병풍이 있었던 셈이지.”
“...”
“무엇보다도 돈으로 널 어떻게 해볼 생각이라면 굳이 내가 이런 번거로운 방법을 택할 필요가 있었을까?”
반박할 구석을 찾을 수 없는 말이었다.
“회장님 말이 맞다면 그야말로 엄청난 우연이네요.”
“이왕이면 인연이라고 하자.”
전화기 너머에서 빙글거리며 웃고 있을 장은호 회장의 얼굴이 선하게 그려졌다.
“왜, 태상 자동차 그룹과 납품 계약을 하게 된 게 못마땅하기라도 한 거야?”
사실 입장만 따지고 보면 지금 그와 나의 줄다리기가 게임이 되는 상황인가.
내가 저쪽에 엎드려 절을 해도 모자랄 판이지.
그래, 지금 장은호 회장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어서 내가 손해를 볼 것이 뭐가 있는가.
감정에 치우쳐 대형 호재를 망쳐버리는 것이야말로 정말 바보 같은 짓이다.
“그럴 리가요. 투자자로서 말씀드리자면 정실 전자의 컨버터, 정말 괜찮은 물건입니다. 기존 제품보다 수명이 월등합니다. 오토비스에서 원하는 단가가 얼마일지는 모르지만, 결코 불만족스러운 거래는 아닐 겁니다.”
“하하, 지금 태상 자동차의 회장을 상대로 영업이라도 하는 거냐?”
“제 말에 흔들릴 분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저라는 배경을 지우시고 객관적으로 평가해달라고 말하는 겁니다.”
“뭐, 좋다. 회장이라고 해서 모든 걸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야. 하지만 관심은 가지고 지켜보마. 네 말처럼 객관적인 시선으로. 기회는 한 번뿐이야. 물건이 시원치 않으면 우리 둘 사이에 다시는 이 이야기가 나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네. 저 역시 일이 앞으로 어떻게 진행되든 간에 회장님이 했던 제안에 대한 의사는 변함없습니다.”
“너, 한마디를 안 지는구나.”
말과 달리 장은호 회장의 목소리에선 불쾌한 기색을 느낄 수 없었다.
장은호 회장과의 전화로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되었다.
어차피 나의 존재를 누구보다도 숨기고 싶은 것은 다름 아닌 장은호 회장.
내가 굳이 태상이라는 이름 앞에 몸을 숨기려 하지 않아도 그는 기꺼이 나를 가리는 은막(銀幕)이 되어줄 것이다.
장은호 회장 본인의 필요 때문이라도.
“알겠습니다. 바쁘실 텐데 실례가 많았습니다.”
“잠깐만.”
전화를 끊으려는 내 말을 장은호 회장이 급하게 잘랐다.
그리고 그는 내가 생각지도 못한 제안을 했다.
“영수, 너 같이 밥 한번 먹자. 우리 가족에게 널 소개하고 싶다.”
초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