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0억을 상속받았다-51화 (51/200)

51. 태상 오토비스

“흡━”

마음의 각오를 다지고 근육의 텐션을 유지하면서 슬링렉에서 바벨을 뽑아 들었다.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고통의 역치는 한계에 달해 당장이라도 이 바벨을 던져버리라 계속 명령했다.

데드리프트.

흔히 사람들은 벤치프레스, 스쿼트, 데드리프트를 3대 웨이트 운동으로 꼽는다.

그중에서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운동 종목은 단연 데드리프트라고 할 수 있다.

바벨 양쪽에 꽂혀 있는 원판의 무게는 무려 180kg.

조상님이 들어주신다는 봉 무게까지 포함하면 도합 200kg에 달하는 중량.

마침내 몸이 정점에 이르자 팔의 전완근부터 시작해서 등과 허벅지까지 묵직한 타격감이 느껴졌다.

슬링렉 건너편의 거울 속 나는 잔뜩 찡그린 얼굴이었다.

얼굴은 터질 듯이 붉었고, 이마에는 시퍼런 핏줄이 섰다.

마치 도깨비 같았다.

“후━”

최대한 네거티브를 유지하며 바벨을 다시 내려놓았다.

1 RM.

단 한 번 운동 동작을 반복했을 뿐이다.

하지만, 중력을 이겨내며 보통 인간이라면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를 들었다 내려놓자, 망막에 모자이크라도 씌운 것처럼 잠시 눈앞이 뿌예졌다.

그리고 동시에 몸 안에서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며 기분 좋은 만족감이 내 육체를 스멀스멀 자극했다.

500억을 받고 계절이 한번 바뀌었다.

일본에 갔을 때만 해도 완연한 가을이었는데, 기상청은 이제 첫눈 소식을 알리고 있었다.

소박하게는 닭가슴살로 때우던 단백질을 소고기로 채우게 되었고, 조금 크게는 억 소리 나오는 새 차를 알아보는 중이다.

매달 통장에는 일반 직장인의 연봉 수준의 돈이 때 되면 꼬박꼬박 들어오고 있고.

더 이상 노동이라는 것에 시간을 바칠 필요가 없어지니, 가장 좋은 것은 그 잉여 시간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보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내 경우에는 운동.

회사 다닐 때는 한 시간 겨우 짬을 내서 후다닥 운동했었는데, 지금은 내가 계획했던 세트를 단 한 개도 빠짐없이 수행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내 몸의 상태는 그 어느 때보다 최상.

사실, 물질적인 것보다 나를 더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것은 정신적인 만족이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마음이 설렜다.

오늘은 또 뭘 해볼까.

완벽한 선순환.

마치 세상의 비밀이라도 알게 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요즘이었다.

하루하루가 인생 최고의 날이었다.

“우와, 대표님. 이걸 어떻게 들어요? 무슨 역도 선수 같아요.”

내가 운동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최예리가 토끼 눈이 되어서 말했다.

헬스장은 여전히 문전성시였다.

보통 헬스장에는 암묵적인 룰이 있기 마련이다.

회원 간의 티칭 금지라든지, 하루에 2번 운동 금지라든지.

자애짐에는 그런 얄팍한 규칙 따위는 없었다.

애초에 돈만 보고 차린 게 아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점들이 운동인에겐 큰 매력으로 다가오는 모양이었다.

최예리도 자기의 몫을 충분히 다하고 있었다.

그녀는 매니저로서의 역할을 기대 이상으로 잘 해내고 있었다.

최예리 이야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축하할 소식 하나 더.

최예리는 최근에 자신이 구상 중이던 웹소설을 드디어 연재 시작했다고 한다.

그것도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아는 플랫폼에.

비록 부끄럽다며 나에게 소설 제목을 알려주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잘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요즘 들어서 그녀는 항상 달뜬 표정에 행복의 기운이 넘쳐흘렀으니까.

나와 연을 맺은 이들이 각자의 방식대로 길을 찾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그러게. 항상 이 무게가 벽이었는데 신기록 세웠다. 그나저나 내가 요즘 자주 못 왔지? 매출은 좀 어때?”

“유튜브에 우리 헬스장 처음 나왔을 때만큼은 아니지만, 꾸준히 늘고 있어요. 이번 주에만 20명이 새로 회원으로 등록하셨어요.”

“그래. 다 예리 씨가 잘해주는 덕분이지. 관리하는 데 힘들지는 않아? 직원들은 말 잘 듣고? 글 쓰는 데도 시간이 부족할 텐데.”

“네. 다 좋아요. 소설은 비축분이 제법 여유가 있게 쌓아놓아서 아직 괜찮아요. 솔직히 회사 다닐 때랑 비교하면 지금이 훠얼씬 바쁜데, 저 너무 즐거워요.”

최예리는 배시시 웃었다.

그녀의 미소에는 어떤 거짓도 없어 보였다.

“다행이네. 그건 그렇고 나 얼마 전에 영하 만났어.”

“김 주임님이요? 와, 대박! 저도 불러주시지.”

“그러게. 그때는 그 생각을 못 했네?”

최예리는 장난스럽게 입술을 삐죽대었다.

“다음에는 꼭 저도 끼워주세요.”

그때,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이신재 사장의 전화였다.

“예리 씨, 미안한데 나 전화 좀 받아야겠다.”

“알겠어요. 대표님, 저 카운터에서 일 보고 있을게요.”

전화기를 들고 비상계단으로 나가 통화버튼을 눌렀다.

“사장님.”

“어! 한 대표, 지금 바빠? 통화 괜찮은가?”

“네. 괜찮아요. 바쁘지는 않고 그냥 운동 중이었어요.”

“지금 회사에 난리가 났어!”

이신재 사장의 목소리는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난리라니, 또 무슨 문제가 생기기라도 한 걸까?

“태상 오토비스! 태상 오토비스!”

“사장님, 숨넘어가시겠어요. 천천히 말씀하세요.”

“아이고···”

수화기 건너편에서 이신재 사장이 헉헉,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태상 오토비스에서 연락이 왔었어. 우리한테 납품을 받아보고 싶다고!”

“··· 예?”

태상 오토비스는 태상 자동차 그룹의 중추 회사 중 하나.

완성차 제조업체인 태상 자동차의 그룹 내 1차 벤더로 핵심 부품들을 생산하고, A/S 모듈 사업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무려 태상 자동차의 임원 출신이라고 그렇게 자랑을 하던 정식 모터스의 김정식 씨조차도 모든 인맥을 동원해 뚫어보려고 해도 줄을 잡을 수 없었던 곳.

뭐, 그건 김정식 씨의 인품 문제도 있었던 것 같지만.

아무튼.

“태상 오토비스라니··· 그쪽에서 원하는 물건이 혹시···”

“그래! 역시 신형 컨버터지. 인생사 새옹지마라더니 이게 무슨 일이야, 한 대표.”

“계약 규모는요?”

“아직 정확하지는 않아. 미팅을 해봐야 정확한 견적이 나올 거 같아. 일단 구두 상으로 그쪽에서 내년 반기 동안 7억 수준으로 납품할 수 있냐고 묻더라고. 나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니까.”

··· 테스트구나.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졌다.

액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지금 이신재 사장이 흥분하는 것도 거래 대금이 아니라 태상 오토비스라는 이름 때문일 것이다.

태상 자동차의 연 매출이 100조, 태상 오토비스의 매출액은 30조 정도.

나 역시 관련 업종에서 일해보았기에 정확히 알고 있다.

특히나 태상 오토비스는 수많은 협력 업체들간의 거래대금이 연간 2조원에 달한다.

그런데 7억이라면 태상 자동차, 그리고 오토비스 정도의 회사가 원하는 물량이라기엔 사이즈가 너무 작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명확하다.

그쪽에서는 이 조그만 회사가 얼마나 물량을 소화해내는지 가늠해보려는 것일 터.

“사장님, 혹시 기존에 오토비스에 콘덴서 부품 납품하는 업체는 몇 개 정도 됩니까. 확인해 보셨나요?”

“응. 로일 라이트라는 제조업체가 거의 독점에 가깝고, 그 외 4개 정도 더 끼고 있고.”

제품에 대해서는 자신이 있었다.

이신재 사장이 나에게 호언장담했듯이, 생산단가는 기존 제품 수준을 유지하면서 성능은 월등하니까.

오토비스의 시험을 통과한다면 장차 독점 벽을 멋지게 허무는 일도 결코 불가능하지 않으리라.

그렇게 되면 정실 전자의 매출액이 10배 이상 폭발적으로 성장할 것은 세 살배기 아이도 알 일이다.

더불어서 총매출의 2%에 해당하는 내 몫의 수익금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겠지.

혹여라도 태상 차 그룹이 헤드라이트를 제조하는 2차, 3차 하청업체들에게 우리 콘덴서를 표준 제품으로 선언하기라도 한다면?

조금 앞서 나가는 가정이긴 하지만, 그때는 그야말로 돈 밭에 구르는 일만 남았다.

“한 대표··· 왜 그래? 별로 안 기뻐?”

내가 한동안 말이 없자, 이신재 사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물론 대단한 호재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기뻐할 수도 없었다.

역시나 마음에 걸리는 건 ‘태상’이라는 이름.

장은호 회장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세상에는 일어나지 못할 일 따위란 없다는 걸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다.

이번 일도 그저 단순한 우연일까?

낙관적으로 생각하면 말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나는 같은 업계에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기술력이 있는 회사에 투자한 것뿐이다.

마찬가지로 같은 업계에 있는 오토비스의 지주회사인 태상 자동차가 기술력이 있는 회사를 알아보고 발주를 하는 것일 수 있다.

어쩌면 이 정도쯤의 납품 계약쯤이야 장은호 회장 손을 거치지 않고 결정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익명의 투자자가 다름 아닌 한영수라는 걸 장 회장이 이미 알고 있다면?

그가 내 이름을 듣고도 OK를 했다면, 그걸 순수한 선의로 받아들여도 될까.

“아닙니다. 잠깐 생각이 많아져서요.”

“역시 한 대표야. 이런 상황에서도 침착을 잃지 않는구만.”

희망에 가득 차 있는 이신재 사장은 내 복잡한 속마음을 침착함이라는 미덕으로 해석했다.

그래. 일단은 좋은 방향으로 해석하자.

장은호 회장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해도 나에게 지금 총구를 들이대고 있는 건 아니니까.

“축하드립니다. 사장님. 회사가 크게 성장할 거라는 건 믿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기회가 빨리 찾아왔네요.”

“다 한 대표 덕분이지··· 이거 참 믿기지 않네.”

“미팅 날짜는 언제인가요.”

“2주 뒤에 우리 회사로 그쪽 담당자들이 찾아오기로 했어.”

“빨리 사람부터 구하셔야겠네요. 우리가 충분히 그쪽에 물건 댈 여력이 있다는 모습을 보여줘야죠.”

“그래. 그렇지 않아도 전에 일하던 직원들한테 연락 돌리고 있어.”

“예. 시간이 촉박하네요. 빠르게 움직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어, 한 대표. 나 지금 전화 들어온다.”

“예. 전화 끊겠습니다. 또 연락 주고 받으시죠.”

일이 또 이렇게 되는구나.

잠잠했던 삶의 궤적이 또 한 번 급물살을 타는 느낌이었다.

“대표님? 무슨 일 있으세요?”

카운터에서 일을 보던 최예리가 내 표정이 심상치 않게 보였는지 한마디를 했다.

“아니야. 예리 씨, 나 오늘은 이만 들어가 볼게. 고생하고.”

짐을 정리하고 최예리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헬스장을 나왔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온 나는 차에 올라탔다.

차에 시동도 걸지 않은 채 시트에 몸을 깊숙이 파묻고 숨을 크게 내쉬었다.

정실 전자··· 오토비스··· 태상 자동차··· 장은호 회장···

수많은 단어가 뉴런을 타고 반짝였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차라리 이쪽에서 먼저 쳐볼까?

가만히 앉아 모든 것이 잘 풀리기만을 기다리며 희망 회로를 돌리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다.

예측 가능한 시나리오를 모두 떠올려보았다.

어떤 경로가 되었건 태상 자동차와 정실 전자가 연관을 맺게 된 이상 나의 존재를 완벽하게 숨기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휴대전화를 꺼내 연락처에서 장은호 회장의 이름을 찾았다.

통화버튼 위에 손가락을 올려놓고 몇 분 동안 고민을 했다.

꾹━

장고 끝에 통화를 걸었다.

그에게 정실 전자를 잘 봐달라고 청탁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단지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싶을 뿐이다.

몇 번의 통화연결음이 가는 중에도 장은호 회장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하긴 워낙에 바쁜 사람일 테니 아무 때나 전화를 한다고 통화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닐 터.

그렇게 빨간색 수화기 모양 아이콘을 누르려고 할 때,

“너구나.”

굵직한 저음의 장은호 회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곰의 탈을 쓴 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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