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0억을 상속받았다-50화 (50/200)

50. 미래의 대주주

오만하고 고압적인 태도의 김 전무. 그리고 식은땀까지 흘리며 쩔쩔매는 이신재 사장.

그간 이들의 파워게임이 어떻게 흘러왔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자신들도 분명히 어딘가에서는 을의 입장일 것이다.

같은 처지를 이해는 못 할망정 뭐가 잘났다고 이렇게 동냥 그릇까지 깨려 하는가.

“뭐요? 투자자?”

내 말을 듣곤, 화도 테크의 김 전무는 마치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나를 한번, 그리고 고윤아를 한번 흘낏 바라보았다.

“흐━”

그의 입에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명백한 비웃음.

아마도 새파랗게 어린놈이 투자자라고 말하는 꼴이 우습다 이거겠지.

아무리 그래도 비즈니스 자리에서는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어야 하는 법이다.

그런데 김 전무라는 자는 원래 품성이 이 모양인지, 아니면 상대가 정실 전자라 일단 깔고 가겠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지.

나는 그의 무례에 대한 속마음은 감춘 채, 영업 사원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외교적인 말투를 잃지 않았다.

“정실 전자와 꾸준히 거래해주신 것에 대해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간의 두 회사 사이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이신재 사장님으로부터 전해 들었습니다. 정실 전자의 재정 상태에 대해 남다른 걱정을 해주신다고요?”

내가 당돌해 보이기라도 했을까?

김 전무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싹 가셨다.

“이 사장님.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꿀꺽━

내 옆자리에 앉은 이신재 사장을 침을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김 전무님. 한 대표 말이 맞습니다. 한 대표가 우리 회사에 거액의 투자금을 출자하기로 했습니다. 오늘 이 자리도 한 대표가 만들어달라고 요청한 것이구요.”

“어디 사모펀드에서 나오시기라도 했나? 이 사장님. 정신 차리세요. 돈으로 장난치는 사람들이랑 함부로 어울렸다가 정말 큰일 나십니다.”

사돈 남 말하고 있네.

“저는 순수한 개인 투자자입니다. 정실 전자의 재정 리스크는 모두 해결되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제 회사의 이익이 곧 저의 이익으로 직결되는데, 최대 거래처를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는 게 도리라고 생각해서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화도 테크의 김 전무는 그래도 임 차장처럼 최소한의 사리 판단조차 안 되는 자는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최소한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해보려는 시도는 하고 있었다.

턱을 괸 채로 말이 없던 김 전무가 입을 열었다.

“뭐, 좋습니다. 그래요. 저도 정실 전자 상황, 정말 진심으로 안타깝게 생각했었는데. 어떤 연유인지는 몰라도 일단 축하부터 드립니다.”

김 전무는 손에 들고 있던 펜으로 책상을 툭툭 내리쳤다.

“그런데··· 한 대표님이라고 하셨나? 우리 화도 테크와 이신재 사장님이 구두로 합의를 했던 게 있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사장님?”

“아니··· 그건.”

이신재 사장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 당연히 들었습니다. 신형 컨버터 기술 말씀이시죠? 노파심에 말씀드리지만, 그걸 화도 테크에 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앞으로 정실 전자의 주력 판매 상품이 될 거니까요. 조만간 특허 출원을 내고 본격적으로 생산 라인을 가동할 예정입니다.”

일이 자기 뜻대로 안 풀린다고 생각했는지 김 전무의 미간이 구겨지기 시작했다.

“이보세요. 방금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미 구두로 계약을 했다고. 그 기술은 우리가 3억에 사기로 이신재 사장님과 이미 이야기가 끝난 일이에요.”

저렇게 당당한 모습을 보니 문득 김 전무의 양심을 뒤집어 까보고 싶었다.

분명히 그 양심에는 털이 수북하게 나 있을 것이다.

나는 손으로 고윤아를 가리켰다.

“그 구두계약에 대해서는 제 고문 변호사가 답을 해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안녕하세요. 법률사무소 광월의 고윤아 변호사라고 합니다.”

“광··· 월?”

김 전무의 안색이 변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국내 최대 로펌의 이름이 나왔다는 것에 그는 당황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내용을 증명할 수 있는 간단한 메모나, 녹취, 메시지가 있습니까?”

“저기 우리 같은 작은 회사들은 그렇게 일 안 해요. 무슨 변호사까지 끼고 그런 거창한 문제가 아닙니다만. 상호 간에 이해만···”

“그렇다면 화신 테크에서는 정실 전자에 기술 이전의 대가로 가계약금을 지급하셨습니까?”

“...”

김 전무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변호사로서 제가 보기에 구두계약이 문제가 아닙니다. 귀사는 정실 전자의 신형 컨버터 특허 출원을 아무런 권리 없이 방해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는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제 3조의 2, 3항에 저촉되는 행위입니다.”

“이신재 사장님!”

김 전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이글거리는 눈은 이신재 사장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아니, 지금 원청업체를 상대로 소송이라도 하시겠다는 겁니까.”

김 전무는 나나 고윤아에게는 이빨이 박히지 않는다고 판단했는지, 이신재 사장을 노리고 덤벼들었다.

우리 중 가장 취약한 부분을 파고들어 이 상황을 타개하겠다는 그야말로 유아적인 전략.

“그렇게 윽박지르지 마세요.”

이신재 사장은 얼굴을 들어 김 전무를 마주 바라보았다.

테이블 아래의 그의 두 손은 주먹이 꽉 쥐어져 있었다.

“예. 해야 한다면 소송 할 겁니다. 그 컨버터 기술 개발에 10억이 넘는 돈, 그리고 무엇보다 5년이 넘는 시간이 들었습니다. 제 자식 같은 그 기술 3억이라는 헐값에 절대 못 넘깁니다.”

오호라.

다 죽어가던 이신재 사장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늘 주눅 들고, 작아 보였던 그.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내 눈에 이신재 사장은 거인으로 보였다.

“허, 참. 이런 황당한 경우를 다 봤나. 다 쓰러져가는 회사 도와주려다가 오히려 이런 봉변을 당하네.”

되지도 않는 소리.

“김 전무님. 정실 전자를 돕고 싶었다면 미수금부터 처리를 해주셨어야죠. 그것도 금액이 상당하던데, 기술을 사들이겠다는 것보다 도의가 있다면 그걸 먼저 해결해 주는 게 당연한 거 아닙니까?”

화도 테크는 애초에 명분도 없는 패악질을 하고 있었기에 지금 이 자리에서 김 전무가 내뱉는 말은 얼마든지 논리로 반박할 수 있었다.

“이제 막 투자를 시작한 입장에서 회사가 소송에 얽매이게 되는 건 저도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화도 테크는 받아야 할 것 받고, 주실 것만 주시면 됩니다. 이신재 사장님은 회사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끝까지 화도 테크의 발주 물량을 모두 책임지려고 애쓰셨습니다. 부디 화도 테크에서도 계약을 끝까지 책임지는 신의를 보여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니면 화도 테크,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전무님에게 법률적인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야기는 그걸로 끝이었다.

화도 테크를 벗어나자 이신재 사장은 마음속에 있던 짐을 모두 내려놓았다는 듯, 크게 숨을 내쉬었다.

“한 대표가 정말 은인이야··· 이렇게 말 몇 마디로 저쪽을 꼼짝 못 하게 만들 줄은 생각도 못 했어.”

? “사장님도 잘 말씀하셨어요. 그 자식 같은 기술이라고 말할 땐 정말 멋있었습니다.”

“바보같이 그동안 할 말 못 하고 왜 속앓이만 했나 싶어.”

“이제 같이 회사 한번 키워보시죠. 당당히 상장 기업으로 자라날 때까지요. 저 미래의 대주주인 거 아시죠? 지분율 20%입니다.”

허허━

이신재 사장은 잔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래. 한 대표랑 함께라면 왠지 꿈같은 이야기는 아닐 것 같아. 내가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게.“

*

이것은 한영수가 정실 전자에 투자를 하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의 일.

무대는 장은호의 회장 집무실이었다.

장은호는 자신의 책상에 보고서들을 쌓아놓고 하나하나 읽어보는 중이었다.

최근에 전기차 사업에 사활을 걸고 있는 장은호.

그가 보고 있는 보고서들에는 차량 내외장재의 원자재는 물론 핵심 소재들을 생산하는 기업들의 프로필이 적혀있었다.

글자들을 들여다보느라 눈이 뻐근해진 장은호가 손가락으로 미간 사이를 주물렀다.

장은호는 태상 자동차의 사내 문화를 바꿔보려고 공을 들이고 있었다.

상명하복이 아닌, 수평적인 조직체계로.

그러기 위해서 자신부터 의사 결정자가 아닌 의사 참여자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회장의 자리에 있지만, 장은호는 일반 사원들보다도 더 많은 것을 공부했다.

잠시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푼 장은호는 다시 서류를 집어 들었다.

“흠.”

- 정실 전자

그가 막 집어 든 서류에 쓰여 있는 사명(社名)이었다.

“LED 램프 생산 업체인가?”

다음 분기부터 생산될 태상 전기차의 헤드램프는 모두 LED 램프가 기본 옵션으로 장착될 예정이었다.

때마침 이 같은 결정이 최근의 일이었기에, 관심이 생긴 장은호는 유심히 정실 전자의 프로필을 살펴보았다.

“이건 꽤 괜찮은데? ··· 아니야. 정말 괜찮아.”

장은호는 즉시 집무실의 전화기를 들었다.

“예. 회장님. 전화 받았습니다.”

“예. 공 팀장님. 팀장님이 올려준 보고서 중에서 정실 전자 있지 않습니까. 그거 좀 더 알고 싶은데요. 라인 타서 올릴 필요 없고, 팀장님이 직접 들어오세요.”

공 팀장이라는 사람은 회장이 직접 업무 관련해서 전화를 걸었음에도 크게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마치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라는 듯.

“예. 30분 안으로 보고드리겠습니다.”

“알겠어요.”

약속한 시간이 채 되기 전에 집무실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회장님.”

장은호의 전화를 받았던 공 팀장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와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보고서 보니까, 여기서 수명을 대폭 늘린 컨버터라는 걸 개발했다고 하더라구요?”

“예. 최근에 특허 출원을 냈다고 합니다.”

“이 컨버터가 LED 램프에 중요한 부품인가요?”

“맞습니다. LED 램프에 전력을 공급해주는 핵심 부품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요···”

장은호는 잠시 말없이 공 팀장이 건넨 추가 보고서를 훑어보았다.

“그런데, 굉장히 영세하네요. 매출이 100억도 안되니.”

“예. 확인해본 바로는 최근까지 부도 직전이었다고 합니다.”

“괜찮은 기술을 보유했던데 아쉽게 되었네.”

“그런데··· 최근에 한 개인 투자자로부터 자금을 투자받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모양입니다. 그래서 특허 출원도 낼 수 있었구요.”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다는 말이 진짜인가 보네. 혹시 접촉해볼 수 있을까요? 쓸만한 기술이면 아예 우리가 사버리는 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회장님, 해당 업종은 중소기업 지정 산업으로 저희가 직접 참여는 조금 어렵습니다.”

“허, 뭐 안된다는 게 이렇게 많은지.”

장은호는 입맛을 다셨다.

“만약 제조 부품으로 납품받는다면 정실 전자에서 물량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당장은 아마 힘들 것 같습니다. 회장님 말씀처럼 너무 영세합니다. 대신 예비부품으로 소량만 발주해보는 건 어떠신지요? 사용해보고 괜찮으면 협력업체에 사용을 권유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장은호의 속내를 눈치챈 공 팀장이 재빨리 말했다.

“그래요. 회의 한번 해보고 결과 알려주세요.”

“예, 회장님.”

‘개인 투자자라, 설마하니 전문 기업 사냥꾼은 아니겠지. 누군지 몰라도 만약 진정으로 투자를 할 요량이라면 아주 좋은 시기에 들어갔어. 진흙 속에 진주를 알아보는 눈을 가졌군.’

잠시 생각에 잠겼던 장은호는 정실 전자의 보고서를 덮고 또 다른 회사의 프로필을 읽어 내려갔다.

태상 오토비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