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0억을 상속받았다-49화 (49/200)

49. 투자 양해각서

- 투자자 한영수(이하 “갑”이라고 칭한다)와 정실 전자(이하 “을”이라 칭한다)는 상호 간에 다음과 같이 투자 양해각서를 작성 교환한다.

평생을 을로 살아왔다.

그게 당연한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내 이름 옆에 달린 ‘갑’이라는 칭호가 붙어있다.

어색하고, 쑥스럽기까지 하다.

투자의사를 밝힌 뒤 며칠 뒤, 나는 고윤아와 함께 다시 정실 전자를 방문했다.

고윤아는 기꺼이 내 수행비서가 되기를 자처했다.

내 머릿속에 있던 생각들을 그녀는 훌륭하게 정리해냈고, 무게감이 느껴지는 활자들로 문서를 만들었다.

“미리 말씀드렸던 것처럼 1차 투자금으로 정실 전자의 부채액 전액에 해당하는 63억을 방금 입금했습니다.”

“예. 금액 확인했습니다.”

고윤아는 확실히 프로였다.

나와 정실 전자 사이에 합의된 양해각서를 조목조목 짚어 나갔다.

그에 비해 이런 일에는 아마추어나 다름없는 이신재 사장은 순박한 눈을 끔뻑거리면서, 이 믿기지 않는 행운에 감사해할 뿐이었다.

“1차 투자금 63억은 정실 전자의 대출금 상환을 조건으로 입금한 것입니다. 이번 주 중으로 상환 증빙서류를 준비해주세요.”

“네. 아무렴요.”

“2차 투자금 37억은 정실 전자에서 특허 출원을 진행하는 날 지급합니다.”

내가 투자의 대가로 요청한 것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20년 동안 매년 총매출의 2%를 지급할 것.

올해만 생각하면 정실 전자의 총매출액이 73억이었으니, 나에게 일억 오천만 원 정도의 수익금이 돌아오는 셈이다.

정실 전자야 더 많은 돈을 끌어다 쓰고도 이자 부담은 절반으로 줄어드는 셈이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반면 정작 나로서는 그렇게 재미가 좋은 조건은 아니었다.

투자라는 것은 위험부담을 안고 가는 것인데, 지금 당장은 정실 전자에서 예금이자만큼의 수익도 나오지 않는 셈이니까.

물론 내가 정실 전자에게 더 높은 숫자를 불렀다 하더라도 이신재 사장은 거절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에겐 지금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식으로 이 회사의 새로운 암운(暗雲)이 되고 싶지 않았다.

곤궁한 처지를 이용해 내 이득만 쥐어 짜내려고 한다면, 내가 저 화도 테크라는 작자들과 다를 게 뭐가 있겠는가.

두 번째는 추후 정실 전자가 주식회사로 전환될 시 발행 주식의 20%를 지급할 것.

사실 내 진정한 바로 노림수는 바로 이것이었다.

아직은 구멍가게 수준인 정실 전자에겐 아직은 요원한 이야기.

하지만 나는 이 회사가 틀림없이 큰 성장을 해낼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때가 되면 자본금의 충당을 위해 정실 전자가 주식회사로 새롭게 태어나는 건 당연한 수순.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그날이 오면 정실 전자의 대주주로서 위치를 공고히 할 생각이었다.

사실 다른 길도 생각 안 해본 것은 아니다.

정실 전자를 아예 인수해서 직접 회사를 굴려보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내 직감이 고개를 끄덕여주지 않았다.

경영이라는 건 나에겐 미지수의 영역.

내 예감은 아직은 시기가 이르다며 계속해서 경고등을 울려대었다.

“투자금의 반환은 양해각서가 체결된 날부터 10년 뒤부터 순차적으로 시작됩니다. 매년 10억 반환입니다.”

투자금 반환 시한은 이신재 사장이 유일하게 요구한 조건이었다.

이번에 은행 빚에 쫓겨보고 뭔가 깨달은 것이 있는지, 그는 넉넉한 기한을 요구했다.

나로서는 수용 가능한 범위 안이었다.

마침내 모든 협의가 끝났다.

나와 이신재 사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양해각서를 한 부씩 나눠 가지곤 악수를 나누었다.

“사장님,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한 대리님. 우리 회사를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제나 공장 잠바 차림이던 이신재 사장은 오늘만큼은 말쑥한 정장 차림이었다.

그는 나에게 온갖 호칭을 붙이려고 했다.

대표님부터 시작해서 이사님··· 사장님···

다 나에게는 맞지 않는 옷이었다.

그래서 이참에 아예 호칭 정리를 하기로 했다.

“사장님, 이제 저한테 그냥 말씀 편하게 해주세요. 이젠 정식 모터스의 사원도 아닌데, 한 대리라고 불리는 것도 조금 이상하구요.”

“아니··· 그래도 은인 같은 분에게 어떻게···”

내가 거액을 투자했다고 그걸 빌미 삼아 오만방자하게 굴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그런 것은 내 스타일이 아니다.

“사장님, 저 선의로 투자한 것 아닙니다. 저도 계산기 두들겨보고 결정한 거예요. 앞으로 회사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것 같으면 따끔한 소리도 아끼지 않을 생각이고요. 그런데 그 이전에 사장님과 저, 한배 탄 거잖아요. 자꾸 이러시면 오히려 제가 불편합니다.”

되네, 안되네 하며 얼마간의 실랑이를 거듭하고 나서야 이신재 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내가 은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는 없어. 한 대표라고 할게.”

“참 사장님도··· 정히 그게 편하시면 그렇게 하세요. 그런데 아까 들어올 때 보니까, 주차장에서 직원들이 바쁘게 움직이던데 무슨 일 있어요?”

이신재 사장이 무언가 부끄러운 고백이라도 하듯 머리를 긁적거렸다.

“아··· 그게, 우리 직원들이 한 대표 덕분에 회사 계속 다닐 수 있게 되었다고 고맙다고···”

고맙다라···

사실 500억이 생긴 뒤로 나를 위해서 돈을 써왔을 뿐이다.

그런데도 나에게 감사한다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생겨나고 있다.

얼마나 다행인가.

아직 내 돈이 그 누구도 불행하게 만들지 않았다는 것이.

“식사 자리를 마련하겠다고 하더라고. 바쁘겠지만 혹시 시간이 되면···”

“식사요?”

“그래. 그렇게라도 자기들의 마음을 보여주고 싶다는 거야.”

“그래서, 준비는 다 되었답니까?”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들의 초대에 응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신재 사장은 자신의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음식은 미리 준비했다고 했고, 자리만 만들면 될 테니 준비는 다 끝났을 거야.”

”그래요? 고 변호사님, 변호사님은 어때요? 시간 되세요?“

”영수 님이 계시면 저도 함께 있고 싶습니다.“

*

“영수! 영수! 영수!”

사무실 문을 열고 나오기가 무섭게 정실 전자의 직원들이 내 이름을 연호했다.

마치 슈퍼스타라도 된 기분이었다.

머쓱하네.

제일 앞에서 가장 목청 높여 내 이름을 부르짖는 건 우디트였다.

나를 오해한 것에 대해 사죄라도 하듯이 그는 영. 수. 영. 수. 를 또박또박 발음하며 주먹을 들고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저분들이 왜 저렇게 영수 님의 이름을 부르는 겁니까?”

고윤아는 정실 전자의 직원들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글쎄요. 아마도 내가 자기들의 회사를 구해주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재밌네요. 처음에 저 사람들 내가 회사 뺏으러 온 줄 알고 엄청나게 경계했었거든요.”

“회사를 자기 집처럼 아끼는 분들인가 봅니다.”

“맞아요. 사실 투자를 결정하는 데 한가지 요소이기도 했어요, 그게.”

놀랍게도 정실 전자의 주차장은 그럴듯한 출장 뷔페처럼 변해있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자리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자기 아내와 딸을 계속 웃게 만들어줘야 한다고 말하던 남자 벙넷.

그는 고급 레스토랑의 웨이터처럼 멋들어진 손동작으로 나와 고윤아, 그리고 이신재 사장을 안내했다.

테이블을 이어붙인 식탁 위에는 낯선 음식들로 잔칫상이 차려져 있었다.

아마도 정실 전자의 다국적 직원들이 각자 자기 고향의 음식들을 준비해놓은 모양.

“영수 사장님, 이거 드셔보세요.”

이름 모를 한 남자가 쭈뼛대며 나에게 다가왔다.

그는 커다란 접시에서 넓적한 튀김만두 같은 걸 내 앞접시에 덜어주었다.

“만두인가요? 와··· 무슨 만두가 이렇게 크지?”

“이건··· 호쇼르이군요. 영수 님, 이분은 몽골에서 오신 것 같습니다.”

남자를 대신해서 고윤아가 내게 음식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여자 사장님! 호쇼르를 아십니까? 몽골을 가보셨습니까?”

”예. 게르에서 잠도 자봤습니다. 사막에서 올려다본 밤하늘은 아마 평생 잊을 수 없을 겁니다.”

고윤아가 남자를 향해 싱긋 웃어주자 그의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벌어졌다.

몽골을 안다는 말에 그는 마치 동향 사람을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반가움을 숨기지 못했다.

“혹시 수테차는 없습니까?”

“수테차 있어요! 있어요!”

“실례가 아니라면 제가 맛 좀 볼 수 있겠습니까?”

“예. 그럼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남자는 우리 앞에서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이곤 재빠르게 발을 놀려 사라졌다.

“몽골도 가보셨나 보네요. 고 변호사님.”

“예. 변호사가 된 후 처음으로 휴가를 갔던 곳입니다. 하늘과 바람과 초원이 너무나 멋진 곳입니다.”

“고 변호사님 이야기 들으니까 저도 한번 가보고 싶네요.”

“마음이 힘들 때면 항상 그때 여행했던 걸 기억합니다. 영수 님도 한번 가보시면 좋을 겁니다. 시간이 맞으시면 함께···”

고윤아는 말을 하다가 아차 싶었나 보다.

그녀는 내 눈을 피해 급히 자기 앞에 차려진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 그래요. 언젠가 같이 가요. 몽골.”

나는 무안해하는 그녀를 보며 웃으며 말했다.

고윤아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없었지만, 분명히 볼 수 있었다.

그녀의 귀 끝이 복숭아색으로 물들어 가는걸.

몽골인 남자가 처음으로 스타트를 끊기가 무섭게 줄이어 내 앞에는 이국의 음식들이 코스처럼 차려졌다.

이렇게 대접을 받자니, 왕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고윤아도 스스럼없이 직원들과 어울리며 이 음식은 뭔지, 혹은 조리법이 무엇인지 물어보곤 했다.

“저기, 한 대표.”

“예. 사장님 말씀하세요.”

“화도 테크 말이야.“

배가 어느 정도 찼을 때쯤, 이신재 사장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래, 아직 화도 테크가 남아있었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그 목을 치고 가야 한다.

내가 이신재 사장에게 주문한 것 중 하나는 최대한 빨리 특허 출원을 하는 것.

그러다 보니 자연히 걸리는 것이 화도 테크였다.

나는 이신재 사장에게 화도 테크의 관계자와 미팅 일정을 잡을 것을 주문했다.

물론 그 자리에 나도 동석할 생각이었다.

“일정 잡으셨나요?”

“그래. 그쪽 전무랑 만나기로 했어.”

”알겠습니다. 같이 동행하시죠.”

”괜찮을까? 그쪽에서 강하게 나온다면 차라리 납품을 포기하는 것이···”

“무슨 말씀이세요? 안되죠. 12억짜리 계약이라면서요.”

“방법이 있을까?”

이신재 사장은 이제 나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 같았다.

벼랑 끝까지 몰려있던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준 이 젊은 구원자라면 세상의 어떤 문제라도 뚝딱 해결할 거라고 믿는 눈치였다.

“화도 테크 쪽에는 아무런 명분도 정당성도 없어요. 제 변호사와 이야기 해봤는데, 법적으로도 걸고넘어질 수 있는 부분이 있고요.”

“소···송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사장님. 전 앞으로 정실 전자를 키우기 위해서라면 소송이든 뭐든 필요한 조치를 다 취할 겁니다. 요즘 느끼신 것이 많을 거예요. 사장님도 독해지셔야 합니다.”

이 사장은 내 말에 혼자 속으로 무언가 굳게 마음이라도 먹은 듯 입술을 앙다물었다.

*

“사장님. 요즘 정신없으실 텐데··· 일단 앉으세요.”

화도 테크의 임원실.

약속한 날이 되어 나를 비롯한 정실 전자의 대표단은 화도 테크의 실권자라는 전무이사를 만나러 왔다.

화도 테크가 얼마나 대단한 회사인가 보았더니 직원 수 70명에 연간 매출액 130억 정도의 정말 고만고만한 회사였다.

굳이 비교하자면 정식 모터스보다도 작은 정도.

과부 사정은 홀아비가 알아줘야 한다는데, 외려 더 박하게 구는 이들이 몹시나 괘씸해졌다.

여하튼 우리를 보자마자 다리를 꼬며 자세를 고치는 김 전무라는 사람은 원래 성격이 그런 것인지, 정실 전자를 우습게 보는 것인지 아주 고압적인 태도로 나왔다.

“아니, 그런데 사장님, 옆에 직원들은 누구예요? 중요한 자리에 저렇게 새파랗게 어린 친구들이 와도 되는 겁니까?”

“저, 김 전무님··· 그게 아니고.”

그동안 가스라이팅을 얼마나 심하게 당했는지, 이신재 사장은 식은땀까지 흘렸다.

김 전무의 얼굴을 보니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임홍빈 차장.

그래, 임홍빈 같은 인간이 여기도 또 하나 있구나.

“안녕하세요. 김호식 전무님이라고 하셨죠? 저는 직원이 아닙니다. 인사드리겠습니다. 한영수라고 합니다. 이번에 정실 전자에 연이 닿아서 투자를 좀 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신재 사장을 대신해서 김 전무에게 나를 소개했다.

더할 나위 없이 아주 당당하게.

미래의 대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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