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0억을 상속받았다-48화 (48/200)

48. 감사하다는 말은 제가 듣고 싶습니다

“저···”

이신재 사장은 불안한 눈을 굴리며 낡은 사무실을 훑었다.

“아이고! 고객님, 돈 빌리러 오셨어요?”

사무실 안에는 불량한 얼굴의 사내들이 넷.

음지의 세계에서 산다는 기운을 팍팍 풍기는 자들이었다.

지독한 담배 연기에 이신재 사장은 잠시 얼굴을 찌푸렸다.

사무실 안에는 그저 끼익하며 힘없이 돌아가는 환풍기 하나뿐.

이곳에 배어있는 지독한 쩐내는 억겁 년의 시간이 지나도 빠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믿음 캐피탈>>

- 고객님이 힘드실 때 큰 힘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 자영업자/시장상인 대출

- 개인 대출

- 무담보/무보증

- 원하시는 금액보장

이신재 사장은 손안에는 명함이 한 장 쥐어져 있었다.

그 명함은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야, 뭐해! 고객님한테 자리 안내해주지 않고.”

뭐라 불러야 할까, 이 대부업체의 사장, 혹은 대장으로 보이는 두꺼운 입술의 남자가 사무실의 막내로 보이는 녀석의 뒤통수를 후려치며 말했다.

“이리로··· 이리로.”

뒤통수를 맞은 막내는 짜증이라도 났는지 인상을 잔뜩 쓰고선 반말 조로 이신재를 응접 소파로 안내했다.

“자··· 고객님, 얼마가 필요해서 오셨을까?”

두꺼운 입술은 비릿하게 웃으며 이신재를 마주 보고 앉았다.

그저 눈길만 스쳤을 뿐인데 이 분위기가 너무나도 불편했던 이신재 사장은 몸을 움찔거렸다.

“저기요··· 혹시 은행에 대출이 있어도 돈 빌려주십니까?”

“아이고! 그럼요. 말씀만 하세요. 필요한 만큼 가져다 쓰세요.”

“한 2억쯤···”

이신재 사장에게는 만기가 코앞에 닥친 대출이 있었다.

은행은 대출금 일부라도 갚지 않으면 더 이상 연장을 해줄 수 없다고 했다.

“2억? 하도 망설이시길래 난 또 몇십억쯤 되는 줄 알았네. 필요하시면 빌려드려야죠. 그런데 고객님, 여기가 뭐 하는 곳인지는 알죠?”

“예. 사채···”

“고객님, 사채라뇨. 말씀 그렇게 하시면 안 되죠. 우리 3금융권이에요.”

3금융권이나 사채나 다를 게 없는 말임에도 두꺼운 입술은 갑자기 열을 내었다.

남자가 윽박지름에 이신재 사장은 거북이가 목을 숨기듯 몸을 움츠렸다.

“거, 사람들이 하도 영화나 드라마 같은 걸 너무 많이 보고선 우릴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데, 우리도 다 법 테두리 안에서 떳떳하게 밥 벌어먹는 사람들이라 이겁니다.”

“혹시··· 돈 빌리면 이자가 얼마나··· 될까요.”

“법에서 정한 대로 받는 거죠. 연이율 20%. 양심적이죠? 요즘은 은행가도 막 10% 그렇잖아요.”

욕이 절로 튀어나오는 금리.

이신재 사장의 눈앞에 이제 막 대학교에 들어간 둘째 아들의 얼굴이, 그리고 정실 전자의 직원들이 아른거렸다.

“야, 약정서 한 장 뽑아와. 그리고 고객님은 신분증 가셔오셨죠? 신분증 좀 주시고요.”

“...”

“고객님. 신분증이요.”

“저··· 죄송합니다.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

이신재 사장은 두꺼운 입술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 뒤, 발을 빠르게 놀려 대부업체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사장님. 간만에 큰돈이었는데 그냥 보내시려고요?”

“다시 온다잖아.”

두꺼운 입술은 혀를 날름거렸다.

“저 아저씨 눈 봤냐? 회 쳐지기 전에 도마 위에 올라와 있는 생선 눈깔이지. 우리 같은 사람들을 다시 찾든, 밧줄에 목을 매든 둘 중 하나야. 저런 인간들은.”

*

정실 전자 직원들의 작은 시위는 나의 신분에 대한 이신재 사장의 해명이 있고서야 비로소 진정되었다.

마음의 결정을 내렸으니, 이젠 본격적인 이야기가 필요하다.

나는 이신재 사장에게 사무실로 가자고 말했다.

“직원들이 사장님과 회사를 생각하는 마음이 참 애틋하네요. 저러기가 쉽지 않은데. 사장님이 평소에 직원들을 어떻게 대하셨는지 알 것 같습니다.”

“남은 직원이 이제 22명입니다. 제가 먼저 권유하기도 했고, 알아서 나간 직원들도 있구요. 회사를 지키겠다며 남은 직원들의 마음은 고맙지만··· 지금 형편엔 월급을 챙겨주기도···”

이신재 사장은 쓸쓸하게 웃었다.

정작 자신의 봉급은 제대로 챙기고 있을까?

이렇게 좋은 사람이 고난을 겪어야 한다는 건 세상이 완벽하지 않다는 증거겠지.

“사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혹시 저와 단둘이서만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등을 돌리고 앉아있는 경리 지원은 무언가 열심히 타자를 치고 있었다.

흘낏 모니터를 훔쳐보니 단가표의 숫자를 몇 번이나 지웠다 다시 쓰고 있었다.

어떻게든 숫자에서 희망을 찾아보겠다는 듯.

“저기, 김 주임. 미안한데 잠깐 자리 좀 비켜주겠어?”

자기 사장의 말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의자에 걸쳐놓았던 외투를 집어 들었다.

“사실 저는 오늘 정식 모터스 직원으로서 여기에 온 것이 아닙니다.”

그녀가 나가고 난 뒤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예? 이직이라도 하신 모양이네요. 축하합니다. 축하드릴 일 맞지요?”

“사장님은 정실 전자를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혹시 회사를 포기하실 생각은 아니겠죠?”

내 말이 정곡을 찌른 것 같았다.

이신재 사장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더니 통곡 같은 한숨을 입으로 뱉었다.

조용히 기다렸다.

그가 무언가를 털어놓길.

“그래요. 이젠 다 포기하고 싶네요. 허허··· 내가 한 대리님 앞에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말씀해보세요.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데 같이 머리가 하나라도 더 있으면 뭔가 해결책이 나올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해결책이고 뭐고 다 끝났습니다. 지금 회사의 기술을 사겠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 새 컨버터 말씀이시군요.”

“예. 그 돈으로 남은 직원들 챙겨주고 회사를 정리할까 생각 중입니다.”

“얼마를 제시하던가요?”

허허허━

이신재 사장은 그저 자포자기한 듯 망연자실하게 웃기만 했다.

“사장님. 사실 일부러 숨긴 것은 아닙니다. 저도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화도 테크라는 곳이죠? 얼마를 주겠다고 하던가요. 기술을 사는데.”

“··· 3억을 주겠다더군요.”

3억? 겨우?

터무니없는 금액이다.

기술 사용에 따른 로열티도 아니고 기술의 소유권 자체를 사들이는데 겨우 3억을 쓰겠다고?

그야말로 칼만 안 들었지, 강도가 따로 없다.

남의 어려운 사정을 철저하게 이용하려는 그 음험함에 내 기분까지 불쾌해졌다.

3억으로 남은 직원들 퇴직금 챙겨주고 회사 정리하면 남는 게 뭐가 있을까.

그야말로 언 발에 오줌 누기와 다름이 없다.

장부상으로만 빚이 60억이었다.

정실 전자를 문 닫고 나면 한 인간으로서 이신재 사장은 완전히 파산이다.

평생을 숨어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한 대리님. 이제 제 사정 들었으니 아시겠죠? 대리님이 다른 회사로 이직을 하셨다고 해도 똑같습니다. 여기서 뭐 얻어가실 거 없을 겁니다. 이제 공장 돌릴 여력도 없습니다.”

그는 거의 울부짖고 있었다.

누구를 단 한 번도 해친 적 없는 힘 없는 짐승.

그 가여운 짐승이 몰이사냥을 당하는 광경을 보는 것 같아 그 비참함에 나도 모르게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

더 이상 내 의도를 숨기지 말자.

1초라도 빨리 이신재 사장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저는 오늘 여기 영업사원으로 온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가치가 있는 회사가 문을 닫아서는 안 됩니다. 저는 개인 자격으로 정실 전자에 투자하고 싶습니다.”

“··· 예?”

이신재 사장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총금액 100억을 투자 하겠습니다. 우선 그걸로 부채부터 해결하고 신형 컨버터를 핵심으로 새로운 파이프를 찾으세요.”

“농, 농, 농담하지 마세요. 한 대리님.”

“농담 아닙니다. 투자의 세부적인 사항은 다음에 제 개인 변호사와 동석한 자리에서 같이 조율해 보시죠.”

“한 대리님··· 진짜입니까?”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했다.

얼마간 내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이 사장은 그 눈 안에서 진심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진심에 큰 충격이라도 받은 듯 그의 입술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100억이라니··· 그런 거금을 어떻게 이런 젊은 분이···”

“운이 따라줘서 선물 시장에서 큰돈을 벌어들였습니다. 이제 막 자금을 모두 현금화한 참이고요.”

선물이니 뭐니 그런 것을 잘 알지도 못하지만, 이신재 사장에게 최소한의 납득은 시켜줘야 했기에 그렇게 얼버무렸다.

얼떨떨한 행운에 사고가 마비되기라도 했는지 이 사장은 그저 고개만 주억거렸다.

“제 돈의 출처가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이제 회사 살릴 생각만 하셔야죠.”

이신재 사장의 눈에서 구슬 같은 눈물이 갑자기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거 오늘 굉장히 귀한 날인데?

중년 남자의 눈물을 이렇게 많이 볼 수 있다니.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한 대리님··· 아니, 이제 뭐라고 불러야 할지···”

“저 기부하는 것 아닙니다. 투자에요. 이제 제가 사장님에게 감사하다고 말씀을 드릴 수 있도록 회사를 잘 꾸려가셔야죠.”

“예··· 그럼요. 맞습니다.”

이신재 사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등을 돌리더니 몇 번 크게 심호흡했다.

그렇게 몇 번 숨을 내쉬고 들이마신 후 다시 나를 보고 마주 앉았을 때, 그의 눈엔 더 이상 물기가 없었다.

“잠깐 화도 테크 이야기 좀 하시죠. 그쪽이랑 체결한 거래가 덩치가 어느 정도입니까.”

“자잘한 것들을 빼면 지금 회사에 유일하게 남은 거래처입니다.”

“정확히 액수가 얼마인가요.”

“12억 정도 됩니다. 납품 물량만 모두 처리하면 이제 회사를 정리하려고 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사장님. 울지 마세요. 투자자 앞에서 그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면 어떡하십니까.”

또다시 축축한 목소리로 말을 더듬거리는 그를 향해 나는 웃으며 말했다.

“일단 신형 컨버터 특허부터 출원하시죠.”

“하지만 화도 테크 쪽에서 우리가 특허를 내면 당장 납품 계약을 끊어버리겠다고 협박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 미수금도 많이 남아있는데.”

“그런 말도 안 되는 어깃장에 휘둘리면 안 되죠.”

나는 이신재 사장의 주름진 손 위에 내 손을 올려놓았다.

“이제 사장님은 혼자가 아니십니다. 화도 테크 쪽은 함께 고민해보시죠. 그쪽에서 더 이상 헛소리 못 하게 만들어보겠습니다. 절 믿어 보세요.”

나의 호언장담에는 이유가 있었다.

내겐 고윤아가 있다. 그녀가 내 뱃심이다.

분명히 고윤아라면 법으로 속이 시꺼먼 상대를 꼼짝 못 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리라.

“일단은 오늘은 이렇게 제 의사만 전하겠습니다. 가까운 시일 내 다시 찾아뵙도록 하시죠.”

사무실 문을 열고 나가자 정실 전자의 직원들이 모두 앞에 모여있었다.

경리 직원이 뭔가 심상치 않은 낌새를 직원들에게 전한 모양이었다.

“이 사람들아. 여기 서서 뭐 하고 있어? 공장 안 돌릴 거야?”

나를 뒤따라 나온 이신재 사장의 말이었다.

그는 너무나 환하게 웃고 있었다.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해지도록.

투자 양해각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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