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정실 전자의 직원들
“아니, 한 대리님. 갑자기 여기를 어떻게 왔어요?“
이신재 사장은 로봇처럼 딱딱하게 굳은 채로 나에게 어색하게 말했다.
그의 태도는 반가움도 불편함도 아닌 그 중간 어딘가쯤에 자리 잡고 있었다.
“사장님,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뵙고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아아··· 아니 먼저 전화를 주시지 않고.”
잠시 고개를 끄덕인 이신재 사장은 아직도 코너에 몰려있는 우디트를 불렀다.
“우디트야! 이리 와봐, 이거 가져가라.”
이신재 사장은 우디트를 불러 손에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건네주었다.
사장의 부름에 후다닥 나를 스쳐 지나가면서도 그의 눈에는 여전히 불안함과 경계심이 가득했다.
“사장님, 이게 뭐예요?”
“응. 이거 붕어빵. 날이 추워지니까 붕어빵 가게가 슬슬 나오더라고. 가지고 가서 직원들이랑 나눠 먹어.“
”붕어··· 빵? 먹어?“
우디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찌푸린 얼굴로 비닐봉지 안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사장님! 이 안에 붕어 들어있는 겁니까? 머리 채로 먹는 겁니까?”
“허허, 우디트 너 한국 온 지 벌써 2년이 넘었다면서 붕어빵을 몰라? 가지고 가서 먹어봐.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예. 그런데 저는 안 먹겠습니다.”
우디트는 이신재 사장을 향해 꾸벅, 그리고 나를 향해서는 슬쩍 인사를 하고 달음박질을 치며 공장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사장님, 잘 지내셨어요?”
사실 잘 지냈냐고 물어보는 것이 무색했다.
내 눈 앞의 이신재 사장은 마치 흔들리는 촛불, 살아있는 시체 같았으니까.
그런 모습을 보고도 괜히 염장 지르는 것 같아 무안할 지경이었다.
푸석푸석한 얼굴로 내가 내민 손을 힘없이 잡곤 이신재 사장은 기운 없이 웃었다.
“그럭저럭입니다. 사실 조금 힘드네요. 한 대리님, 여기서 이렇게 아니라 일단 같이 사무실로 가시죠.”
*
“사장님. 다녀오셨어요.”
“그래. 김 주임, 어디서 전화 온 데는 없었어?”
“없었어요··· 그런데 일은 어떻게 되셨어요. 잘 해결되셨나요?”
경리 직원의 물음에 이신재 사장은 고개를 천천히 좌우로 저었다.
뒤에서 그의 굽은 등을 바라보고 있자니, 가뜩이나 왜소한 그가 땅속으로 꺼져 사라져버리는 것 아닐까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정말 삭막한 분위기였다.
경리 직원도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앉아요. 그런데··· 혹시, 전에 납품 건 때문에 오셨나요.”
그는 아직도 내가 정식 모터스의 사원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기사 내가 회사에 다니고 있는지, 그만두었는지 그로서는 알 도리가 없을 것이다.
내가 뭐라고 답하기도 전에 이신재 사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렇게 우리 회사를 기억해주시고 찾아와주신 건 고맙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추가로 수주를 받을 여력이 없네요. 직원 수가 좀 줄었습니다. 사실 우리 회사가 사정이 좀 그래요. 기존 납품 계약 물량을 채우는 것도 버겁네요. 허허.”
허탈하게 웃으며 더 이상 숨길 것도 없다는 듯 김신재 사장이 말했다.
직원들까지 내보내야 할 상황이라고?
정실 전자의 상황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사장님, 많이 힘드십니까?”
“책임져야 할 자리에 있으니 어떻게든 감당해야지요. 제가 뭐가 힘들겠습니까. 못난 사장 만나서 고생하는 직원들에게 미안할 뿐입니다···”
“죄송합니다. 그때 계약만 잘 되었으면 다만 얼마라도 힘이 되셨을 텐데.”
“허허, 이해합니다. 이미 지나간 일 아닙니까. 이거 손님이 오셨는데 이렇게 피로한 모습만 보여드려서 미안하네요.”
반쯤 남아있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며 이신재 사장이 말했다.
“가만, 내 정신 좀 봐. 김 주임. 손님께 커피 좀 내드릴 수 있겠어?”
“아닙니다. 마시고 왔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그보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컨버터를 새로 개발하셨다고요. 어려운 여건 속에서 대단하십니다.”
“몇 년 동안 그거에 온갖 정성을 기울였죠. 자금도 엄청나게 쏟아부었습니다. 이제 겨우 완성품이 나왔는데, 그것도 이젠···”
“사장님. 혹시 그 컨버터 좀 제가 볼 수 있겠습니까?”
“예?”
“한번 보고 싶습니다. 사장님께서 그렇게 공을 들이셨다니.”
“뭐, 보여드리는 게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아까 말한 것처럼 우리 회사가 지금 당장 어디에 납품을 할 만한 처지가 아니라···”
“사장님.”
나는 멸망해버린 나라의 왕처럼 무력하고, 지쳐있는 중년 남자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 진 아무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는 내 말속에 숨겨진 의미를 짐작조차 못 했으리라.
*
“오른쪽이 이번에 새로 개발한 컨버터이고, 왼쪽은 우리가 기존에 판매하던 구형 모델입니다.”
20cm가량의 길쭉한 네모 모양의 부품.
그게 바로 컨버터였다.
이신재 사장은 두 개의 물건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이것저것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겉모양만 봐서는 뭐가 다른지 전혀 모르겠는데요?”
“그렇죠?”
이신재 사장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신형 컨버터를 이리저리 쓰다듬어보는 것이 물건에 대한 애착이 느껴졌다.
“기존 것이 수명이 4년에서 5년이었다면, 요놈은 7, 8년은 너끈히 버티지요.”
“수명이 무려 40% 이상은 늘어난 셈이네요. 원리가 뭔가요?”
“이 컨버터 안에 부품들 중에는 전해 콘덴서라고 전류를 일정하게 만드는 부품이 있습니다. 조명을 사용하면 이 콘덴서의 전해액이 계속 증발하면서 고장이 납니다. 그래서···”
열심히 설명하던 이신재가 갑자기 말을 멈췄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조심스럽게 말문을 다시 열었다.
“자세한 원리까지는··· 내가 전부 다 말하기가 조금 그래요. 아무튼 이 전해질의 증발을 더디게 하는 기술이라고 보면 될 거예요.”
이신재 사장이 주저하는 이유를 이미 알고 있었기에, 나는 기술의 원리에 대해서는 더 묻지 않았다.
“어차피 들어도 저는 무슨 소리인지 모를 겁니다. 생산 단가는 어떻습니까? 만약 단가가 기존 제품보다 많이 소요된다면 마진에서 크게 재미를 못 보실 텐데요.”
“어디요! 개발연구비를 생각하지 않고 순수한 공정 과정에서 드는 비용은 기존 것과 유의미한 차이는 없어요. 아직 생각을 더 해봐야겠지만 납품가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 물론 무사히 시판된다면 말이지만.
생각보다 알짜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허로 기술을 독점하고 상품을 내면 안 팔릴 이유가 없었다.
전기차도 전기차지만, LED 전등은 어디에서나 쓰고 있다.
수요가 확실하다는 말이다.
기껏해야 LED 램프에 들어가는 부품의 일부.
어떻게 보면 정말 하찮은 것이기에 아무도 이 작은 물건을 개량하는데 관심을 안 가졌을 것이다.
그런데 이신재 사장은 그걸 묵묵히 해냈다.
기름때가 낀 손과 장인정신으로 무장한 채.
물론 그의 경영 능력에 대해서는 의문부호가 남아있지만.
그때였다.
“저, 사장님.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
한 남자가 나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대략 15명 정도 되는 외국인 근로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 역시 그들처럼 외국인으로 보였는데, 아까 우디트라는 사람이 좀 젊은 축이라면 이 남자는 대략 40대 중반쯤 되었달까.
“제 이름은 벙넷이라고 합니다. 캄보디아에서 왔고요.”
벙넷은 불쑥 나에게 자기소개부터 했다.
“예, 저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이것 좀 봐주세요.”
그는 주머니를 주섬주섬 뒤져 지갑을 꺼내더니 그 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보였다.
내 눈앞에 척 내민 사진 속에는 모녀로 보이는 사람들이 서로를 끌어안은 채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우리 가족입니다. 제 딸과 아내예요. 한국에서 열심히 일해서 보낸 돈을 캄보디아로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 가족 계속 이렇게 웃게 해주고 싶습니다.”
“아··· 그래요. 고생 많으시네요.”
“회사가 지금은 어렵지만, 새로 만든 제품만 팔 수 있으면 다시 예전처럼 공장 돌아갈 수 있습니다. 한국 직원들이 말하는 거 들었습니다. 다른 회사에서 우리 기술을 빼가려고 한다고. 정실 전자가 난파선이나 다를 게 없다고. 여기서 계속 일하게 해주세요. 젊은 사장님, 우리 회사를 그냥 내버려 두시면 안 되겠습니까.”
계속 일하게 해달라.
아까도 들은 말이다.
이 벙넷이라는 사람 역시 아까 봤던 우디트라는 남자와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잠시 작은 군중들 사이를 훑어 무리 안에 섞여 있는 우디트를 찾아냈다.
우디트가 동료들에게 나를 뭐라고 이야기했을지, 그리고 어떻게 오해하고 있는지 능히 짐작되었다.
우디트는 눈이 마주치자 내 눈을 피하기는커녕 사람들을 헤치고 나와 벙넷 옆에 섰다.
“예전에 다니던 공장에서 여권도 뺏긴 적 있습니다. 날 때린 사장님도 있었습니다. 좋은 사람들도 많았지만, 나 무시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 나 네팔에서 대학교도 나왔어요. 바보 아닙니다.”
공손한 자세로 말하고 있었지만, 그의 어조는 한이라도 실린 듯 격앙되어 있었다.
“우리 사장님은 내가 한국 와서 만난 사람 중에서 제일 좋은 사람입니다. 회사에 돈이 없는데도 월급 한번 안 주신 적 없습니다. 한국 사람들 사표를 내고 나갈 때도 사장님 빚내가면서 퇴직금 챙겨준 거 우리 다 압니다. 꼭 돈 때문이 아니라 사장님 우리 사람들 다 자식같이 생각해요. 생각 다 똑같아요. 우리 계속 정실 전자 다닐 겁니다.”
“아니, 나는···”
당신들이 지금 오해하고 있는 거라고 말해야 하는데, 이 오해 덕분에 회사와 이신재 사장을 생각하는 직원들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마음이 너무나 훈훈하고 보기 좋았다.
그래서 차마 말을 끊을 수 없었다.
“맞아요. 우리 사장님 괴롭히지 마세요.”
“우리 여기 있을 거예요.”
“나는 다른 공장도, 회사도 싫습니다. 정실 전자가 좋아요.”
곧이어 무리 안에서도 우디트와 같은 목소리들이 하나둘씩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까 내가 이신재 사장의 경영 능력에 의문부호를 가지고 있다고 했던가?
그건 순전히 나의 건방진 착각이었다.
이렇게 자기 직원들의 사랑을 받고 있지 않은가.
책임감이라는 덕목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이미 훌륭한 경영자였다.
“이 사람들아··· 아니야. 여기 있는 사람은 그 사람들 아니야···”
중얼거리듯 읊조리는 이신재 사장의 눈두덩 주변이 잔뜩 붉어져 있었다.
“사장님. 인복이 있으시네요.”
“다들 빨리 제 살길 찾아가라니까··· 나같이 무능한 사장 옆에 뭐하러···”
이신재 사장이 고개를 떨궜다.
여우비처럼 눈물 몇 방울이 그의 눈에서 바닥으로 툭툭 떨어졌다.
비로소 나는 마음의 가닥을 잡을 수 있었다.
어떤 예감이 들었다.
기가 막히게 잘 들어맞는 나의 예감은 이번만큼은 승부사 기질을 발휘해보라고 등을 떠밀고 있었다.
단순히 감정적인 결정은 아니다.
분명 좋지 않은 상황이지만, 숫자의 세계 속에서 희망의 불씨도 분명 찾았다.
이 회사 한번 살려보자.
물론 내가 직접 전면에 나설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내 돈이 날 대신해 움직여줄 테니까.
감사하다는 말은 제가 듣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