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부끄러움을 아는 이가 드문 판
정실 전자.
내 기억 속에서 아쉬움으로 남아있는 이름이다.
사장도 참 마음에 들었고, 앞으로 성장 가능성이 큰 회사라고 생각했었는데.
자연히 그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지 호기심이 생겼다.
“정실 전자가 왜? 잠깐 사이에 사정이 더 안 좋아졌나?”
“참 안타깝게 되었죠. 형, LED 램프에 들어가는 부품 중에 컨버터라고 아시죠?”
당연히 알고 있다.
안정기라고도 불리는 컨버터는 회로 소자의 하나로, LED 램프에 시동 전압을 주는 필수 부품.
가만···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정실 전자를 방문했을 때가 기억난다.
영화가 재생되듯 머릿속에서 이신재 사장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정실 전자의 사장인 이신재 씨는 컨버터의 중요성에 대해서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했던 말도 똑똑히 기억난다.
나는 그 말을 내 입으로 옮겨 김영하에게 전했다.
“LED 램프의 수명을 결정하는 게 컨버터잖아. LED 등 자체는 5년 넘게 써도, 컨버터가 그 전에 망가져 버린다고.”
“맞아요. 저도 이번에 알게 된 건데, 보통 컨버터 수명이 3년이고, 고급형이 5년 정도라고 하더라구요. 근데 이번에 정실 전자에서 7년까지도 쓸 수 있는 컨버터를 개발했다는 거예요. 지금 특허출원 준비 중이고.”
“뭐야. 그럼 호재잖아. 그런데 무슨 문제가···”
말을 하다 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정실 기업의 재정 상태는 그야말로 바람 앞에 촛불.
뭔가 숨구멍을 찾지 못하면 장기적으로 어려운 국면에 처할 수도 있다는 건 정식 모터스에서 보고서를 쓸 때도 알고 있었다.
만약 그때 정식 모터스와의 납품 계약이 성사되었더라도 그 물량 자체는 기껏해야 년에 2억 내지는 3억 원 수준 정도에 미쳤을 것이다.
정실 전자보다 규모가 크다 뿐이지, 정식 모터스 역시도 그저 그런 중소기업 중의 하나니 새로운 파이프를 늘리는 데 보수적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 사안 자체가 사장이 즉흥적으로 오케이 사인을 낸 것이기도 했고.
하지만 그런 소소한 계약이 빠개졌다는 것만으로도 이신재 사장은 큰 좌절에 빠졌었다.
내가 그에게 죄송하다고 말할 때 그는 의사로부터 ‘당신은 이제 1년 밖에 살지 못합니다.’ 따위의 시한부 선고라도 듣는 얼굴이었다.
당장 내일을 기약하기도 어려운 회사.
그렇다면 그들에게 신기술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더군다나 그 신기술의 장점이 단지 제품의 수명을 늘려주는 것이라면 원청 업체들에게 크게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을 것 같았다.
분명히 직원 50명 남짓의 회사에서 이뤄낸 놀라운 쾌거지만, 물건을 받는 업체 쪽에서는 단가를 얼마나 싸게 후려치는지가 훨씬 더 중요할 테니까.
그 새로운 컨버터라는 것의 생산비용이 기존보다 더 비싸다면 신기술은 정실 전자에게 축복이라기보단 차라리 재앙에 가까울 지도 모른다.
“돈이 문제죠, 뭐. 형, 한잔해요.”
김영하는 내게 잔을 내밀었다.
꼴깍―
내가 그리도 좋아하는 목 넘김 소리였으나, 술맛이 결코 개운하지만은 않았다.
“크.”
알코올 향이 잔뜩 머금어진 감탄사를 내뱉곤 김영하는 계속 말을 이었다.
“남의 일이니까 쉽게 이야기하는 거지만. 정말 안되긴 했다니깐요. 뭐 이런 경우가 있나 싶고. 원청 업체 중에서 양아치 같은 놈들이 붙었나 봐요.”
“양아치?”
“들어보면 형도 깜짝 놀랄걸요? 거기 사장님 얼마나 순박해요.”
“뭔가 오너라기 보다는 물건 만드는 장인 같은 느낌이었지.”
“그러니까요. 화도 테크라고 정실 전자하고 거래하는 고만고만한 업체 하나 있어요. 그래도 거기가 지금으로선 정실 전자가 잡은 줄 중에 가장 덩치가 있다죠? 그런데 참··· 상도덕이라는 것도 없는 건지.”
김영하는 질린다는 듯이 혀를 내둘렀다.
“새 컨버터 기술의 특허출원을 그 업체에서 못하게 막고 있다는 거예요. 특허 내면 납품 끊어버리겠다고. 완전히 미쳤죠?”
“허.”
헛웃음이 나왔다.
김영하가 구체적인 상황을 설명해 주지 않아도 그 판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을지 눈에 선하게 보였다.
화도 테크라는 회사는 정실 전자가 어려운 상황인 걸 이용해서 신기술을 거저먹으려는 심산일 것이다.
이신재 사장을 휘둘러 특허출원을 막고 간사한 혓바닥으로 구슬려 헐값으로 기술을 사들이려고 하는 거겠지.
아무리 부끄러움을 아는 이가 드문 것이 이쪽 세계라지만, 참 더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상황까지 갔으니까 너도 회사에 정실 전자에 관해서 한 번 더 이야기해보기가 좀 부담스러웠겠다.”
“맞아요. 그냥 갈아버렸어요. 괜히 이야기 꺼내 봐야 좋은 소리 못 들을 거 같아서.”
“그렇구나.”
쓸쓸한 기분이 들어 술잔을 괜히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그래도 의미 있는 정보다.
한번 알아볼 필요가 있다.
“형, 헬스장 하면 한 달에 얼마나 벌어요? 회사 다니는 것보단 확실히 낫죠?”
내 속마음을 모르는 김영하는 정실 전자는 금방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화제를 돌렸다.
나는 그를 보며 그저 웃기만 했다.
*
“당기 매출액이 73억에, 영업이익은 6억 5천이라.”
컴퓨터 앞에 앉아 정실 전자의 재무제표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숫자들의 세계에서 의미를 찾아내려는 노동을 하다보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단순히 자본의 흐름만 보자면 매출액이 작기는 했지만, 그래도 영업이익률이 거의 10%에 달하고 있었다.
이건 정실 전자가 제법 물건은 잘 팔고 있다는 소리였다.
굉장히 긍정적인 신호였고, 결코 매력이 없는 투자처라고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문제는 있었다.
회사의 규모 대비 어마어마한 정실 전자의 부채.
무슨 이유인지 내부사정까지야 모르겠다만, 이 회사의 부채는 계속 늘어가고 있었다.
이자만 해마다 무려 3억.
이것도 작년 12월까지의 이야기이다.
올해 정실 전자의 상황은 더 악화일로를 걸을 것이다.
지금 시기가 어떤가.
금리가 정말 무섭게 오르고 있다.
부채도 계속 늘어났으니 그만큼 신용도도 많이 떨어져 있을 것이다.
“최악의 상황이라면 순이익이 마이너스가 될지도 모르겠는데···”
하지만 반대로 장부 상에 드러나 있는 60억 규모의 대출금 문제만 해결된다면?
정실 전자는 신기술을 바탕으로 새로운 활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책상에 올려져 있는 차 열쇠를 챙겼다.
직접 정실 전자에 가서 다시 한번 확인해야겠다.
숫자로는 볼 수 없는 것을 찾아내러.
만약 이 회사가 충분한 가치가 있다면 기꺼이 구세주가 되어 볼 요량이었다.
*
“혹시 사장님 계십니까.”
“어··· 어디서 오셨나요?”
정실 전자의 사무실.
이전에 방문했을 때처럼 오늘도 이 안에는 경리로 보이는 여직원 한 명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 직원은 내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예전에 정식 모터스에서 인사드린 적이 있었죠. 혹시 사장님은 공장에 계신가요?”
“아··· 정식 모터스.”
내 예전 회사의 이름을 듣자, 회색빛으로 축 죽어있던 직원의 얼굴에 살짝 화색이 돌았다.
“사장님은 잠시 출타 중이셔요. 전화를 드릴까요?”
“아, 아닙니다. 들어오시려면 오래 걸릴까요?”
“잠시만요.”
잠시 자신의 휴대전화를 들어 시간을 확인 한 직원이 내게 말했다.
“아마 두 시가 지나기 전에는 들어오실 거예요.”
지금 시간은 1시 20분.
충분히 기다려줄 수 있는 시간이다.
“알겠습니다.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차에서 기다리고 있을 생각으로 주차장으로 나왔을 때였다.
사무실과 거의 붙어 있는 공장에서 정실 전자의 로고가 새겨진 점퍼를 입은 직원 한 명이 문을 밀고 밖으로 나와 구석으로 발길을 옮기는 것이 보였다.
자리를 잡은 그는 담배를 손가락에 끼워들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외국인 근로자인가?”
전에 왔을 때 이미 눈으로 본 것이지만 여느 작은 공장들처럼 정실 전자에도 외국인 근로자의 비중이 꽤 높은 편이었다.
젊은 사람들이 중소기업을 꺼리는 현상에 대해서는 이해가 안 가는 것이 아니었다.
코인으로 대박 나서 몇억을 벌었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려오고, 도대체 어디서 뭘 하는지 짐작조차 안 되는 몇 다리 건너 친구는 SNS에 외제 차를 타고 다니는 사진을 올린다.
어디 그뿐이랴, 자기가 구독하는 스트리머는 단지 음식을 먹는 영상을 업로드할 뿐인데 돈을 갈퀴로 긁어모은다.
직장 다니며 꼬박꼬박 월급을 받아 살면 마치 바보가 되는 것 같은 게 요즘 세상이다.
더 이상 학벌도, 성실함도 성공을 담보해주지 않는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제대로 터지면 그걸로 평생을 먹고 살 수 있다.
이것이 아마도 요즈음 젊은 세대의 머릿속에 잡혀 있는 인생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눈은 잔뜩 높아져 있는데 열악한 복지에 짜기만 한 급여를 받으며 일을 하라고 하면 인상부터 찌푸릴 것이다.
더욱이 중소기업도 덩치가 천차만별인데 영세한 축에 속하는 정실 전자로서는 내국인 근로자를 구한다는 것이 하늘의 별만큼이나 힘들었을 것이다.
“안녕하세요.”
나는 그 외국인 근로자에게 다가가 인사를 했다.
담배를 피우고 있던 구릿빛 피부의 남자는 쭈그려 앉아있다가 나를 보곤 벌떡 일어나 담뱃불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저런 쓸데없는 예절은 누가 가르쳤을까.
“안녕하세요. 사장님.”
발음이 좀 어눌하긴 했지만, 그는 비교적 또박또박 우리말을 했다.
“담배 편하게 피우세요. 여기서 일하시는 분인가 봐요.”
“예. 저 여기서 일합니다.”
“저는 한영수라고 합니다.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내 이름은 우디트입니다.”
우디트는 내 눈치를 보며 경계의 기색을 보였다.
“아··· 놀라실 거 없어요. 저는 사장님 아는 사람인데, 지금 자리에 안 계시네요.”
“사장님이요?”
사장을 만나러 왔다고 하자 그 외국인 근로자는 눈치를 보는 것을 넘어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제가 불편해요? 그냥 잠깐 회사에 대해 좀 물어보고 싶은데.”
“무슨 이야기요.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아니, 그게 아니라···”
나쁜 의도는 전혀 없었는데 뒷걸음질을 쫓다 보니 어느새 우디트를 몰아넣는 모양새가 되었다.
쿵━
뒷걸음질 치던 우디트의 등에 에어컨 실외기가 부딪쳤다.
“우리 사장님 좋은 분이에요! 나 여기서 계속 일하고 싶어요! 우리 사장님 괴롭히지 마세요.”
이거 뭔가 단단히 오해를 산 모양인데···
그래도 우디트의 말에서 바로 이상함을 감지했다.
“우디트 씨. 무슨 말이에요? 누가 이신재 사장님을 괴롭혀요?”
“사장님도 나쁜 회사에서 나온 거잖아요. 우리 사장님 아버지 같은 분이에요. 우리 회사 것 뺏지 마세요. 저 여기 계속 다닐 거에요.”
“우디트! 무슨 일이야!”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검정 비닐봉지를 들고 있는 이신재 사장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몇 달 사이에 십 년은 늙어 있는 것 같았다.
잠이라도 잘 못 잔 건지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으며, 안면에 주름살은 호미로 갈기라도 한 듯 더 깊어져 있었다.
“아니··· 정식 모터스 한 대리님 아니세요? 갑자기 여기를 어떻게.”
내 얼굴을 알아본 이신재 사장의 동공이 커졌다.
정실 전자의 직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