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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억을 상속받았다-45화 (45/200)

45. 지구를 공전하는 달

강남의 한 오피스텔.

여기가 바로 고윤아의 보금자리였다.

그녀의 집안 인테리어는 조금 특이했다.

복층 구조로 1층은 주거 공간이 아니라 마치 사무실의 연장 같았다

벽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책장에는 법전과 법률 관련 서적들이, 책상에는 메모지가 잔뜩 붙여진 서류들이 잘 정리되어 쌓여있었다.

1층과 달리 천장과 가까운 2층은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넓은 공간은 아니었지만, 예쁜 카페처럼 아늑하게 잘 꾸며져 있었다.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그녀만의 작은 공간이랄까.

고윤아는 걸치고 있던 겉옷을 옷걸이에 걸어 옷장에 잘 넣어놓고는 집 안에서 입는 편한 실내복으로 갈아입었다.

조금 의외였다.

평소 그녀의 이미지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연노란색의 실내복 상하의.

상의에는 꼬리를 세우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어딘가에 몸을 비비고 있는 고양이 한 마리가 프린팅되어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책장 근처에 있는 1인용 소파에 털썩 엉덩이를 대고 주저앉은 고윤아.

그녀는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아까는 내가 무슨 소리를 한 거지.’

고윤아의 양쪽 귀 끝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해보자.

고윤아가 살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목석같다는 소리였다.

10대 시절, 남들과는 다른 독특한 캐릭터 때문에 고윤아는 알게 모르게 또래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었다.

아마 예쁘장한 얼굴과 더불어 고윤아가 항상 1등을 놓치지 않는 수재가 아니었다면 그 따돌림은 결코 ’알게 모르게‘가 아니었을 것이다.

영민한 고윤아가 그 사실에 대해 모를 리 없었다.

아마도 어린 시절부터 입에 밴 특유의 말투가 원인일 거라 스스로 진단을 내려보기도 했다.

그래서 한때는 평범한 젊은 사람들의 말투를 일부러 따라 해보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게 어찌나 맞지 않는 옷 같던지 금방 포기해버린 그녀였다.

어떨 때는 자신의 감정을 더 잘 보여주는 게 입보다는 손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그녀의 수어(手語)를 알아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니, 수어라면 얼마든지 속마음을 편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의외로, 고윤아의 이런 모습은 자신의 커리어에 있어선 장점이 되어 주었다.

쉽게 동요하지 않는 그녀의 모습은 일상에선 차갑다는 인상을 심어주었지만, 재판장 안이라면 오히려 신뢰감을 증폭시켜주었다.

우웅━

그때, 고윤아의 휴대전화가 몸을 털었다.

그녀는 얼굴에서 손바닥을 떼고 자신의 옆에 놓아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문자메시지.

그녀의 어머니였다.

- 딸, 오늘 중요한 일 있다고 하더니 잘 해결한 거야?

어머니의 문자를 보자 고윤아의 얼굴에 꾸미지 않은 미소가 올라왔다.

누구보다도 고윤아에게 힘이 되어주는 사람은 다름 아닌 그녀의 부모였다.

만약 자신이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꼭 아버지와 어머니 같은 사랑을 하고 싶다고 늘 생각해왔던 그녀다.

사랑이라.

이 추상적인 단어가 뇌리에 새겨지자 고윤아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너,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자신의 머릿속에 자리를 잡은 한영수를 강제로 빼내기라도 하겠다는 듯 고윤아는 세차게 고개를 털었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녀가 한영수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지게 된 것은.

물론 처음 만났을 때부터 한영수의 외모에 호감을 느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이성적인 끌림 같은 것이 아니었다.

비유하자면 좋은 풍경, 혹은 잘 빚어진 예술품을 보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었다.

처음엔 그저 일의 연장이었다.

자신이 존경하는 사람의 마지막 유지(遺志)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일적으로, 혹은 사적으로 그와 시간을 보내면서 한영수의 건강한 정신과 이따금 보여주는 다정함에 마음을 빼앗기기 시작했다.

마치 빗속에서 우산 아래 어깨가 서서히 젖어 들어가는 것처럼.

스스로 웃음이 많은 편이 아니라고 생각했건만, 어느새 한영수와 있을 때면 편안하게 미소짓는 자신을 발견하고 고윤아는 몇 번이나 깜짝 놀라곤 했다.

그리고, 오늘 장은호 회장과의 만남에서 고윤아는 비로소 자신의 마음에 대해 확신할 수 있었다.

고윤아는 한영수가 저 멀리,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널까 봐 두려웠다.

태상의 고위층들과 자주 접했기에, 누구보다도 그들이 품고 있는 이리 같은 성정을 잘 알고 있는 그녀였다.

한영수가 부디 그 세계를 몰랐으면 하는 것이 고윤아의 간절한 바람이었다.

그리고,

한영수는 너무나 당당하게 장은호 회장과 맞섰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며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보아도, 고윤아는 한영수의 그 모습에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토도 도도 독-

고윤아의 손가락 움직임에 따라 휴대전화는 타자 음을 뱉어냈다.

- 엄마, 나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것 같아.

그녀는 자신이 타이핑한 문자를 한참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곤 손가락을 조금만 움직이면 보낼 수 있었을 그 메시지를 모두 지워버렸다.

자신을 바라보며 “왜?”라고 묻던 한영수에게 아무 말도 못 했듯이.

‘그 사람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어.’

설령 그와 내가 이어지지 않아도 좋다.

그저 지구를 공전하는 달처럼 그의 곁을 지켜주겠다고 다짐하는 고윤아였다.

*

“형! 영수 형!”

장은호의 회장과 만남이 있고 며칠 뒤.

오늘 나는 김영하를 만나러 나왔다.

김영하는 엊그제 내게 전화를 걸어, 주말에 약속이 있냐고 채근을 해대었다.

대리 승진을 기념해서 거하게 한턱내겠다는 것이었다.

사실 직장에서 만난 인연이라는 것은 헤어지면 금세 잊히기 마련.

그런데도 잊지 않고 날 생각해주는 영하의 마음이 고마웠다.

김영하가 제안한 메뉴는 참치.

간단하게 저녁이나 먹고 동표 포차로 넘어가자는 내게 김영하는 꼭 이 정도는 대접하고 싶다고 말했다.

식당 안으로 들어선 나를 발견한 김영하는 벌떡 일어나 익살스럽게 경례를 올려붙였다.

바로 어제 헤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영하는 여전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따듯해져 빙그레 웃음이 나왔다.

“잘 지냈어?”

“그럼요. 형! 그나저나 어떻게 된 거예요. 진짜 깜짝 놀랐어요. 헬스장을 차렸다면서요?”

“그래. 예리한테 들었구나?”

“네. 형이 헬창인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무려 사장님이라니··· 와! 진짜 믿기지 않네.”

“그냥 이왕 회사 나온 거,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 해보자는 마음이었지.”

“부럽다. 그런데 그거 차리는 데도 돈 꽤 많이 들지 않아요?”

그렇지, 당연히 이 질문이 나올 줄 알았다.

나는 최대한 처연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회사 다니면서 모은 돈 조금에, 나머지는 빚이지 뭐. 은행이 차려줬어.”

간단하고 짧은 해명에도 김영하는 충분히 납득이 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 얼마 전만 해도 내 앞자리에서 일하고 있던 사람이 모든 직장인의 꿈을 이루다니··· 이거 슬슬 배가 아파지는데요. 오늘 밥은 내가 아니라 형이 사야겠네.”

“그러지 뭐. 내가 살게. 주문은 했어?”

“에이, 그렇게 바로 받아버리면 내가 뭐가 돼요. 오늘은 내가 삽니다. 선배님을 모시는 자리인데 당연히 주문은 미리 해놨죠.”

얼마 지나지 않아 도자기에 올려진 참치회가 우리 테이블 위에 올라왔다.

활짝 핀 붉은 꽃처럼 탐스러운 색을 자랑하는 참치회는 먹어보지 않아도 싱싱함을 알 수 있었다.

“안주 좋고! 내일은 일요일이고! 예전처럼 달려봐요, 형.”

우리는 술잔을 높게 부딪쳤다.

“일단 대리 진급 축하한다. 고생 많았어.”

나는 미리 준비했던 선물을 김영하에게 내밀었다.

영하는 예상치도 못했던 선물에 입이 헤벌쭉 이었다.

“와, 이게 뭐예요. 지금 뜯어봐도 돼요?”

녀석은 내가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얼른 포장지를 뜯었다.

“어?”

김영하의 눈이 똥그래졌다.

“형, 이거 에르*스 잖아요.”

“비싼 거 아니야. 거기서 살 수 있는 것 중에 제일 싼 거. 그냥 넥타이다.”

“그래도 이거 20만 원 넘을 텐데!”

지금이야 같은 추억을 공유하는 전우에게 더 좋은 것을 못 해줄 이유도 없다만, 김영하가 부담을 느끼지 않을 적절한 선에서 골라본다고 제법 고심을 했었다.

“너 대리 달았으니까 앞으로 거래처 더 자주 만나게 될 거 아니야. 네 돈으로 사긴 그렇고, 있으면 요긴할 것 같아서 선물한다.”

“형, 형! 이럴 게 아니네. 우리 소주 치워버리죠. 사장님!”

김영하는 목소리를 높여 종업원을 불렀다.

“여기, 사케 뭐 있어요!”

*

좋은 안주와 술은 기분 좋은 취기가 올라오도록 만들었다.

“형. 이거 먹어요. 가마살, 참치회는 이게 최고죠.”

“그래. 참 고소하고 맛나네. 그런데 너 여자친구랑은 잘 지내고 있냐?”

여자친구 이야기가 나오자 김영하의 얼굴이 급 침울해졌다.

“헤어졌어요.”

“갑자기? 왜?”

“요즘 술자리가 좀 잦았거든요. 그러다 보니 다툴 일도 많아지고, 홧김에 그냥 질러버렸어요.”

김영하는 혼자 잔을 들더니 술을 쭉 들이켰다.

“내가 뭐 놀러 다닌 것도 아니고, 승진해보겠다고 상사들 술자리 쫓아다닌 건데 이해 좀 해주지.”

“그래도 너 오래 만났는데···”

“에이, 차라리 잘되었어요. 이제 눈치 볼 일도 없고, 싸우느라고 전화기 붙잡고 있을 일도 없고. 속 시원해요.”

그럴듯한 말과 달리 김영하의 표정은 영 좋지 않았다.

흔한 일이다.

무언가 하나를 정신없이 쫓다 보면 내 손에 쥐어져 있던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리게 되는 건.

인생이란 참으로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갈림길에서 기적처럼 모두가 행복해지는 그런 선택이란 것이 존재하기는 할까?

“다른 이야기 해요. 오랜만에 형 만나면 참 할 말이 많았는데··· 아 참 임홍빈 차장 회사에서 쫓겨나듯 짐 싸서 어떻게 되었는지 아세요?”

임 차장이라···

그래. 그런 사람이 있었지.

워낙에 나에게 많은 일이 일어났으니, 임 차장과 갈등을 빚던 시절이 너무나 먼 과거의 일 같다.

조금 우스웠다.

그때만 해도 제법 심각한 사건이었는데,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작은 촌극에 지나지 않았다.

“영업소에서 한 달도 못 버티고 사표를 냈다는 거예요. 그러고선 자기 사업하겠다고 뛰쳐나갔다죠? 그런데 동업자가 투자금을 홀랑 들고 튀었대요. 지금은 완전 반폐인 되었다고 하던데. 그쯤 되니까 좀 안됐다는 생각까지 들더라고요.”

“참 끝까지 답답한 사람이네. 좀 잘 알아보고 시작을 하던지.”

“그렇게 얼레 벌레였는데 자기 사업한다고 사람이 뭐 변했겠어요.”

나는 술잔을 들어 꼴깍 목으로 넘겼다.

“아, 그리고 또 뭐가 있었더라··· 아, 맞다!”

김영하는 손뼉을 치며 뭔가 생각났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형, 정실 전자 기억나시죠?”

“당연히 기억하고 있지. 너랑 나랑 마지막으로 같이 했던 일인데.”

“그게··· 저도 그냥 포기하기엔 너무 아까운 아이템이라고 생각해서 최근에 한 번 알아봤거든요. 그런데 정실 전자, 요즘 상황이 많이 안 좋더라고요.”

문득, 기름때가 잔뜩 끼어있던 정실 전자 사장의 손이 떠올랐다.

부끄러움을 아는 이가 드문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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