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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억을 상속받았다-44화 (44/200)

44. 상속자 (3), 그리고···

장은호 회장의 오른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흔한 표현이지만 송충이처럼 굵고 시원하게 뻗은 눈썹.

예전에 백화점에서 장은우의 눈을 보고 내 눈과 닮았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나는 장은호 회장의 눈썹을 보며 마침내 그와 나의 닮은 구석을 찾을 수 있었다.

내가 아무리 외면하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한 핏줄의 증거.

장은호 회장은 분명히 거절이라는 것에 익숙하지 않을 것이다.

태상 자동차라는 거대한 조직의 정점인 그의 주변에는 예스맨들이 한 트럭으로 가득할 테니까.

그런데 이게 무슨 아이러니한 일일까.

지금 이 자리에는 장은호 회장을 거절한 사람이 둘이나 있었다.

변호사 스카우트를 사양한 고윤아. 그리고 동맹 제안을 거절한 바로 나.

오늘은 나에게도 그렇지만, 장은호 회장에게도 익숙하지 않은 하루가 될 것이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건가? 아니면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가. 분명 우리 둘 모두에게 나쁘지 않은 이야기라고 생각하는데.”

“제가 존경하는 분이 있습니다. 아버지 같은 사람입니다.”

장은호 회장은 묵묵히 내 말을 들었다.

“그분이 말씀하시길 적은 돈은 고달프고, 많은 돈은 혼란스럽다고 했습니다.”

“··· 굉장히 현명한 분이시군. 말 한마디에서 철학이 느껴져.”

“회장님과 함께해서 제가 얻는 건 결국 돈 아닙니까.”

단언할 수 있다.

그것도 그냥 돈이 아니다.

활자가 잉크 대신 수많은 사람의 피로 새겨진 욕망과 탐욕의 돈.

“이런 소리, 우습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이미 돈이라면 먹고 살 만큼 충분히 가졌습니다. 그런데 굳이 내 발로 살아 나올 수 있을지 장담 못 하는 가시밭길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습니다.”

재밌게도 결국 나는 장영복 회장의 유지를 따르는 모양새가 되었다.

장 회장은 마치 오늘을 예상하기라도 한 것처럼 나더러 태상과 엮이지 말 것을 당부했다.

그저 자유롭게 살라고 했다.

“그래. 지금 당장 내가 제시할 수 있는 건 돈뿐이지. 하지만 너도 큰돈을 만져보고 깨달은 것이 있을 텐데? 네가 존경한다는 그분의 말을 조금 비틀어보마. 많은 돈이 문제를 일으킬 수 있지만, 적은 돈은 더 많은 문제를 가져온다고.”

“예. 돈이 많은 걸 바꿔주었죠.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회장님은 어떻습니까? 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재산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제 눈에는 왜 그리 목이 말라 보일까요. 저는 그 끝을 모를 레이스에 참가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하하━

별안간 장은호 회장이 우레같은 소성(笑聲)을 터트렸다.

그의 웃음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는 자신이 졌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단지 돈이 아니지··· 아무튼 영수, 너 정말 보통이 아니구나.”

장은호는 커다란 몸을 앉은 자리에서 일으켰다.

그의 몸가짐이 열띤 대화를 나눌 때보다 한결 편안해 보였다.

그 역시도 나처럼 긴장을 놓지 않았던 걸까?

“생각이 짧았다. 예전에 고 변에게도 그렇고, 너에게도 한방 먹었구나. 혹시 내가 너를 돈으로 사려고 했던 것처럼 보였다면 미안하다. 내 의도가 천박해 보였을지 모르지만, 나는 우리 둘 모두에게 좋은 그림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

덩치만큼이나 묵직한 이 남자는 팔을 뻗어 나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이것만은 부정하지 마라. 넌 확실히 아버지와 닮았어. 이제 다른 의미로 네가 탐이 난다.”

고윤아도 예전에 나에게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는 나의 어디에서 장영복 회장의 모습을 찾았다는 걸까.

나는 장영복 회장을 알지 못하니 그것을 쉽게 짐작할 수 없었다.

다만 당차게 그에게 맞선 내가 장은호 회장에게 무언가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무례하게 굴 생각은 없었습니다. 제 입장을 이해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장은호의 손을 잡았다.

“강요는 하지 않는다. 네 선택을 존중하고. 그래도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 말을 해 주었으면 해. 아직 새로운 총수가 결정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남았다. 나는 먼저 일어나지.”

먼저 손을 놓은 장은호 회장은 고윤아를 향해서도 살짝 머리를 숙여보았다.

그는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처럼 당당한 걸음걸이로 현관을 향해 나아갔다.

“영수야.”

신발장 앞에 선 장은호 회장은 문득 걸음을 멈추더니 등을 돌렸다.

그는 나를 뜨거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네가 정말 마음에 든다. 나는 정치적인 인간은 아니야. 이건 거짓이 하나도 없는 순수한 진심이다.”

말을 마치곤 장은호는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너의 확고한 의지는 잘 알겠다. 하지만 오늘 우리의 만남이 그러했듯, 세상은 너를 계속해서 흔들려고 할 거야. 네 의지를 시험하고 속이려 들 거다.”

“살면서 몇 번이고 밟힌 적은 있어도 뿌리까지 뽑힌 적은 없습니다.”

내 말에 장은호 회장은 고개를 끄덕이곤 씩 웃어 보였다.

“그래. 너 운동 열심히 하나 보더라. 실루엣이 좋다. 만약 우리가 또 만나게 된다면 그땐 이런 이야기 말고 운동 이야기 같은 거나 할 수 있다면 좋겠구나.”

해머 사이언스의 이사가 그리도 자랑을 했던 것이 기억난다.

자기가 장은호 회장의 개인 헬스장을 디자인 해주었다고.

“서로의 존재를 확인했으니 그것만으로도 얻어가는 게 있다고 생각한다. 노파심에 다시 한번 말하지만 오늘 있었던 일은 모두 비밀로 하자. 그게 너와 나 둘 모두에게 좋다. 고변과 너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조금 이따가 나오는 게 좋겠다.”

*

장은호 회장이 호텔 방을 나가자 맥이 탁 풀려버렸다.

태상 쪽에서 어떤 접촉도 없었기에 이대로 조용히 넘어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참으로 내가 순진했다.

쓰나미처럼 집채만 한 파도가 또 한 번 내 인생을 휩쓸고 지나갔다.

무려 장은호였다.

태상 그룹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서 있는 인물 중 한 명.

제기랄.

알고는 있었지만, 오늘에서야 새삼 몸으로 체감했다.

500억이라는 돈.

내가 받은 그 돈의 무게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님을.

자신을 제안을 거절한 것에 대해 장은호가 보복을 하려 하진 않을까?

제법 신통한 내 예감을 따르자면 그런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겨우 두 시간 남짓의 대화로 예단할 수는 없지만, 장은호는 꽤 나에게 우호적이었다.

그가 자기 말처럼 정말 정치적인 인간이 아니길 빌어볼 수밖에.

“하아···”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

잠시 시야를 잃었던 두 눈이 초점을 되찾자 내 옆의 고윤아가 보였다.

“이거, 한국을 떠나야 하나요. 어떻게 이민이라도 알아봐야 하나.”

농담이었다. 지금까지도 잔뜩 굳어있는 그녀를 위한.

하지만 여전히 고윤아의 낯빛은 영 좋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스피커가 빈다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어색한 일이었다.

특히나 이렇게 남녀 둘이 덩그러니 호텔 방안에 남겨진 상황에는 더욱더.

“변호사님. 왜 그러십니까.”

그녀는 대답 없이 고개만 푹 떨궜다.

“어디 아파요?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이제 슬슬 그녀가 정말 걱정되기 시작했다.

“나가시죠. 바깥바람이라도 쐽시다.”

“저는···”

긴 침묵을 지키던 고윤아가 마침내 힘없이 입을 뗐다.

속삭이듯 읊조리는 그녀의 말은 참으로 의외의 것이었다.

“저는··· 영수 님의 변호사로서 자격이 없습니다.”

갑자기 왜?

언제나 나에게 물음표를 안겨주곤 했던 그녀지만, 오늘은 더욱더 유난하게 심상치 않다.

고윤아를 알게 된 지 오래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래도 그녀는 내가 살면서 만났던 좋은 사람들의 얼굴 사이에 당당히 끼어있다.

이 유능한 변호사는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내 편에 서주었으며 큰 힘이 되어주었다.

오늘도 만약 그녀가 옆에 없었다면 장은호 회장 앞에서 그렇게 당당하게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자신이 나의 변호사로서 자격이 없다는 그녀의 고해성사는 명백히 잘못되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지금 나한텐 세상 누구보다도 의지가 되는 사람이 고 변호사님인데.”

“아닙니다.”

고윤아는 강한 부정을 몸으로 나타내듯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사실··· 인지 소송에 대해서는 진작 말을 해야지, 하면서도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변호사로서 그래서는 안 됩니다. 당연히 모든 가능성을 알려드렸어야 합니다. 영수 님이 선택할 수 있도록.”

뭐야.

그런 별것도 아닌 이유로 이리도 침울해했단 말이야?

물론 내가 가지고 있는 법률적 지식이라야 평범한 상식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그 상식으로도 이 세상에 친자 확인 소송이란 것이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고윤아가 내게 알려주지 않아서, 몰라서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변호사님. 나 바보 아니에요.”

“예?”

내 말에 고윤아는 놀란 토끼 눈이 되었다.

“저는 단 한 번도 영수 님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농담입니다. 내가 선택한 거예요. 변호사님이 하라고 억지로 등 떠밀어도 사절했을 겁니다. 아시잖아요. 내가 태상과 연관되기 끔찍이도 싫어했단 걸.”

“...”

“아까 장은호 회장이 왜 내게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냐고 해서 그래요? 깜빡할 수도 있지, 그렇게 풀 죽어 있지 말아요.”

“··· 고의와 과실은 명백하게 다릅니다. 제가 말씀드리지 않은 건 고의였습니다. 깜빡하지 않았습니다.”

고윤아의 깊은 눈동자는 나에게 무언가 호소를 하고 있었다.

이쯤 되니 이유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저는 영수 님이 장영복 회장님의 유산을 물려받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옆에서 지켜봤습니다. 상상도 못 할 거액을 손에 쥐었음에도 변하지 않는 영수 님이 보기 좋았습니다. 그게 참 멋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고윤아는 쓸쓸하게 웃었다.

“건방지게도 영수 님이 지금 이대로 쭉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

“참 우습지 않습니까. 변호사라는 사람이 주제넘게도 의뢰인의 사정에 사감을 가지고 행동하다니···”

“그래서 장은호 회장을 만났을 때 그렇게 얼어있었던 건가요? 내가 그와 거래를 할까 봐?”

“장은호 회장님이 영수 님을 뵙자고 했을 때 제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습니다. 영수 님이 피비린내 나는 곳으로 끌려갈까 봐 겁이 났던 것도 같습니다.”

“··· 왜요.”

생각을 하고 내뱉은 말이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왜’라는 소리가 나와버렸다.

“왜 그렇게까지 날 생각해주는 겁니까.”

반쯤 열려 있던 고윤아의 입은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

마치 말하면 이 지구가 멸망해버리는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고윤아는 주저하고, 또 주저했다.

결국 나는 고윤아로부터 '왜'에 대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

다시 다물어진 입은 호텔을 나설 때까지 열리지 않았다.

지구를 공전하는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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