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상속자 (2)
“1,000억, 아니지. 세금을 떼고 나면 500억 정도가 남았을까? 그건 온전한 네 몫이라고 할 수 없다. 내가 도와주겠다. 네가 가져야 할 것을 모두 가질 수 있게.”
뭐라고?
야심한 밤에 쏟아지는 적군의 총탄처럼 예상치 못한 기습이었다.
벼락이 뇌리에 꽂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뜻밖의 소식에 놀랐는지 눈가가 갑자기 씰룩거리기 시작했다.
한번 시작된 경련은 내 마음대로 어쩔 수 없었고, 쉬이 멈추지도 않았다.
“···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내 육체의 이상징후.
그것이 장은호 회장에게 혹시라도 나약함으로 보일까 나는 퍼뜩 자리에서 일어났다.
쏴아아━
화장실로 간 나는 세면대에 찬물을 틀고 손바닥으로 그 물을 받아 얼굴을 거칠게 때렸다.
냉수가 내 얼굴을 몇 차례 훑고 지나간 후에야 떨림이 비로소 멎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어 거울 속의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물기에 젖은 앞머리가 이마 위로 몇 가닥 흘러내렸다.
내가 장영복 회장의 아들이란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그의 자식으로서 응당 받아야 할 유산을 허락하겠다?
현실적인 암초들, 실현 가능성은 둘째치고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도 될 것이 없다.
친자확인 검사라든지 절차 따위는 일단 접어두더라도 나에겐 명백한 증거가 있다.
내가 자기 아들이라고 못 박은 장영복 회장의 유서가.
내 출생에 대해 소상히도 적어놓은 그의 편지가.
하지만, 세상이 어떤 곳인가.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 남겨진 자식들은 재산은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가지려, 빚은 어떻게든 피하려고 원수가 되는 일이 들판에 널린 초개보다 더 흔한 게 바로 이 세상이다.
그런데 내가 전 세계에서 손꼽는 부호의 막대한 유산을 나눠가질 수 있게 돕겠다고?
그것도 저들의 눈에는 사생아에 지나지 않을 나를?
내가 상속을 받게 된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장은호 회장의 몫이 줄어듦을 의미한다.
뺄 것이 있어야 더할 것도 있는 법이니까.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 아니고서야 그가 나에게 그럴 이유가 무엇이 있단 말인가.
장은호 회장이 무슨 성자(聖者)라도 된단 말인가.
거울 속의 또 다른 나를 향해 마음속으로 말했다.
정신을 바짝 단도리쳐서 잡아야 한다. 영수야.
지금 장은호 회장의 혀는 춤을 추는 칼이다.
그것도 보통 날카로운 물건이 아니다.
네가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순식간에 네 머리를 목 위에서 뚝 떨어트릴 칼이다.
수건으로 얼굴을 훔치고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평정심을 되찾은 나는 원래 자리로 돌아가 장은호 회장에게 말했다.
“절 도와서 제가 받아야 할 유산을 받게 해주겠다고요? 사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소리입니다. 절 만나자고 한 것만큼이나 뜻밖이네요.”
“뜻밖일 것도 없지.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오히려 네가 조용히 있었다는 게 더 놀라웠다. 태상과 장영복이라는 이름에 겁이라도 먹은 것인가 생각했는데 그건 나의 완전한 오판이었어. 만나자마자 알았다. 영수, 너는 그런 심약한 사람이 아니야.”
장은호의 갈색 눈동자가 고윤아를 향했다.
“아니면 혹시 방법을 몰랐던 것이냐? 고윤아 변호사는 이런 부분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을 텐데.”
고윤아는 왜인지 한일(一)자로 입을 꾹 다문 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사실 장은호의 등장 이후 고윤아의 태도에는 어딘가 이상한 것이 있었다.
일단,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래. 말 나온 김에 고 변, 내가 설명을 좀 부탁해도 될까요. 영수, 저 친구가 어떻게 정당한 상속인이 될 수 있는지.”
장은호 회장이 재차 물었지만, 고윤아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 변호사님.”
보다 못한 내가 나지막하게 부르고 나서야 고개만 숙이고 있던 고윤아가 얼굴을 들었다.
나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내 의사를 확인하곤, 자물쇠라도 채워놓았던 것 같은 그녀의 입이 마침내 열리기 시작했다.
“··· 장은호 회장님이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영수 님에게는 분명히 유산을 상속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먼저 인지 청구 소송이 필요합니다.”
법률적 용어로 ‘혼인 외의 자’로 표현되는 나는 우선 인지 청구 소송을 통해 장영복 회장의 친자로 인정을 받아야 한다.
그 후에야 상속회복청구권을 비롯한 상속자의 권리들이 생긴다는 것.
고윤아가 조문들을 섞어가며 말한 것들의 요약이다.
사실 어려운 말은 아니었다.
내가 몰랐던 사실도 아니고.
하지만 중요한 건 법조문이 아니라 의도다.
지금 이 판을 만든 사람 속에 숨겨진 의도.
제대로 된 유산을 상속받게 된다면 그 금액은 수조 원, 어쩌면 수십조 원이 될지도 모른다.
500억이라는 돈이 푼돈처럼 하찮아 보일 지경이었다.
평생 사치와 향락을 누려도 마르지 않을 것이며, 원한다면 작은 나라 하나쯤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말 장은호라는 남자에게 내가 그만한 가치가 있단 말인가.
“회장님이 뭘, 어떻게 저를 돕겠다는 겁니까.”
“너 혼자의 힘으로 나의 형, 그리고 누이와 싸우는 건 정말 쉽지 않을 것이다. 또 그들의 뒤에는 태상이라는 거대 기업도 있지. 소송 자체가 진행되지 못하도록 방해 할 거다. 생각하기 싫지만 어떤 음험한 수를 쓸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가 물심양면으로 돕는다면 이야기가 완전히 다르다.”
“제 든든한 빽이 되어주시겠다는 말이군요.”
“그래. 그렇게 생각해도 좋아.”
“좋네요. 정말 대단해요. 조 단위의 재산을 거머쥐게 된다는 거잖아요. 지금 회장님의 손을 잡으면.”
나는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는 소식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과장되게 말했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겠죠? 회장님은요. 저에게 공짜 점심을 주겠다는 건 아닐 거고. 물심양면으로 힘을 써줘서 회장님이 얻게 되는 건 무엇입니까.”
“새로운 형제를 한 명 얻게 되겠지.”
이 상황에서 농담한다는 것은 여유일까, 아니면 오만일까.
“그렇게 무섭게 노려볼 것 없다. 방금 말한 것은 어느 정도는 진심이니. 물론 나도 가지고 싶은 것이 있다.”
장은호 회장은 천천히 입을 열어 드디어 자신의 본심을 드러내었다.
“나는 태상의 총수가 되고 싶다.”
그의 의지가 온전히 실린 짧은 몇 마디 말에 호텔 방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래. 알겠다.
이제야 머릿속에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그림이 그려진다.
여기에 오기까지 눈앞을 흐리던 안개가 사라지며 마침내 모든 풍경이 훤히 보였다.
나를 조커로 쓰겠다는 심산이구나.
태상의 꼭대기에 오르기 위해.
“솔직히 말하겠다. 이대로 있으면 태상 그룹 총수의 자리는 나의 형 장은수의 것이 될 거야.”
장은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로 다가가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속 쓰린 이야기에 목이라도 탔는지, 생수를 하나 꺼낸 그는 단번에 반 이상을 들이켰다.
“하지만 너라는 존재 덕에 새로운 판을 짜볼 수 있게 되었다. 나도, 형도, 그리고 내 누나까지. 아버지의 상속인은 네게 유산의 일정부분을 공평하게 내놓아야 할 테니까. 한 가지 더 말해주자면 아버지의 유산 대부분은 태상 그룹의 주식이다.”
“··· 그 주식으로 장 회장님이 총수가 되도록 지지해달란 말이군요.”
“그래. 역시 눈치가 제법이구나.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그렇다.”
장은호는 몸을 돌려 마치 내가 아까 그랬듯, 창가 앞에 섰다.
그는 나와 고윤아를 등진 채 창밖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태상을 단순히 돈을 잘 버는 기업이 아니라 도덕성까지 갖춘 초일류로 만들고 싶어. 그리고 그 태상으로 세상을 좋은 방향으로 바꾸고 싶다. 단순한 이상론이 아니다. 태상의 총수는 그걸 해낼 수 있는 자리야.”
묵묵히 얼마간 창밖을 바라보던 장은호는 몸을 빙글 돌렸다.
“우리 형으로서는 안 돼. 형은 도미노를 밀듯이 태상의 모든 것을 무너트릴 거야. 나를 도와다오. 유산으로 너 하고 싶은 대로 편하게 살아도 좋다. 만약 경영에 참여하길 원한다면 적절한 자리를 내어주마.”
“그래요. 다 좋습니다. 무엇하나 저에게 해가 될 이야기가 없네요. 하지만···”
지금은 변주(變奏)가 필요하다.
허를 찔러 장은호 회장을 흩트려놓고 싶었다.
그러면 무언가 더 보일 것 같았다.
“저는 태상의 총수가 누가 되든 관심이 없습니다. 총수의 자리에 회장님의 형님이 더 가깝다고 하셨죠? 그럼 제가 왜 회장님과 한배를 타야 합니까? 더 가능성이 있는 쪽에 서는 것이 현명하지 않겠습니까.”
자, 이제 질문은 이쪽에서 한다.
대화의 주도권은 내가 잡겠다.
소기의 성과가 있었다.
날 만난 이후에 처음으로 장은호 회장의 얼굴에서 흔들림을 찾을 수 있었다.
아주 잠시였지만 그의 표정에 당황의 낯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건 네가 나의 형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제게 있어 모르는 건 회장님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누가 되었건 전부 완벽한 타인입니다.”
“나뿐만 아니라 너에게도 그건 치명적인 악수(惡手)야. 형은 널 용납하지 않을 거다. 움켜쥐려고만 할 뿐 놓을 줄 모르는 사람이야.”
“회장님은 이 상황이 정상적이라고 보십니까? 친형을 잡기 위해, 일면식도 없는 사생아의 손을 잡으려고 하는 게. 그런 사람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장은호 회장은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가 숨을 쉼에 따라 툭 튀어나온 목울대가 오르고 내렸다.
“나의 형 장은수는···”
다시 시선을 앞으로 한 장은호 회장은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본인은 틀림없이 부정하겠지만, 아버지의 그림자에서 단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 억눌렸던 콤플렉스를 엉뚱한 방향으로 분출하고 있고. 형도 분명히 불쌍한 사람이야.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형은 모든 걸 망쳐버릴 거야.”
불쌍하다고?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해 망가졌다고?
그늘이 있다는 건 적어도 어딘가에 태양이 떠 있다는 소리다.
당신들은 누릴 수 있는 것은 모두 누리지 않았는가.
당신들과 달리 나는 그 씨가 같음에도 빛 한점 들지 않는 지하에 있었다.
그럼에도 삶에 대해 불평하지 않았고, 최선을 다해 살았다.
당신들은 무언가를 가지려고만 하지만, 나는 지금 가진 것을 모두 잃는다고 해도 내 자리로 돌아가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자신이 있다.
당신들과 나는 다르다.
“한 번 더 부탁하마. 영수야, 날 도와다오. 그리고 내 아버지가 해야 했을 일을 내가 하게 해다오. 네가 원래 있었어야 할 자리로 내가 끌어주마.”
“지금 답을 드려야 합니까.”
“속내는 알고 싶다.”
“그렇다면···”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하게 말했다.
“거절하겠습니다. 저는 누군가의 도구로 살고 싶지 않습니다.”
상속자 (3), 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