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0억을 상속받았다-42화 (42/200)

42. 상속자 (1)

장은호 회장은 영수라는 내 이름을 거부감없이 불렀다.

마치 예전부터 나를 알고 있기라도 했다는 양.

거기다 기다리기까지 했다니.

저 먼 곳의 진동까지 감지하는 지진계처럼 오감을 날카롭게 가다듬어 보았지만, 아직은 짚어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여전히 안개 속이었다.

다행히 고윤아라는 한 줄기 빛이 옆에서 길을 밝혀주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한 치 앞을 내딛기가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절 보자고 했다는 말은 고윤아 변호사에게 전해 들었습니다.”

“그래. 너에게 직접 연락하는 것보다 그편이 나을 것 같았다. 모르긴 해도 네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필요했지. 생각할 시간.

비록 물음표밖에 남지 않았지만.

“··· 전화상으로 할 이야기가 아니겠죠? 바쁘신 분께서 절 직접 만나겠다고 하시는 것 보니.”

“그래. 아마도 너에게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될 것 같구나. 그리고, 나에게도.”

전화기 건너편 이 사내는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미지의 상대지만, 그렇다고 내가 지레 겁먹고 움츠리고 있을 이유는 없다.

나는 의표를 찔러보기로 마음먹었다.

“솔직하게 이야기하겠습니다. 만남의 필요성이 있을까요. 저는 태상 그룹과 어떤 연도 맺고 싶지 않습니다.”

“영수, 너의 속내를 어떻게 다 알겠냐만, 개인적으로는 네 출생에 대해 알게 되고도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는 것은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장은호 회장의 목소리 톤이 묵직해졌다.

그는 무슨 선언이라도 하듯 무게감 있게 말했다.

“장영복이라는 사람의 피를 타고 태어난 이상 원치 않아도 마주치게 되는 것들이 있을 거야.”

“원치 않아도라, 재밌네요. 마치 저한테는 선택의 자유가 없다는 것처럼 들리는군요.”

나도 모르게 공격적인 말투가 튀어나왔다.

왜 깜빡이도 켜지 않은 자들이 불쑥 들어와 내 인생을 마음대로 재단하려 한단 말인가.

불과 몇 달이다.

내 삶에 격풍이 몰아친 것은.

나는 절대 이 거센 바람에 32년간 꿋꿋이 세워온 내 삶이 무너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지 않을 것이다.

그때,

응접 테이블 위에 올려둔 내 손 위로 고윤아의 손이 겹쳐 올라왔다.

- 침착하셔야 합니다.

고윤아는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또다시 나를 어지러운 감정의 굴레에서 건져내었다.

그녀는 내게 흥분을 가라앉히라며 소리를 내지 않고 입을 움직였다.

“그렇게 들렸다면 사과하마. 너의 경계는 충분히 이해해. 그래도 만나길 바란다. 어떤 제안을 하고 싶어. 결코 네게 나쁜 이야기가 아닌.”

나쁜 이야기가 아닐 거라고?

모두에게 선한 사람은 자신에게만은 악마라고 했다.

완전한 선의라는 것은 그만큼 흔치 않은 것이다.

그 귀한 것을 장은호 회장이 내게 쉽게 나눠줄 이유가 없다.

그 제안이란 아마도 나보다는 장은호 회장, 본인을 위한 것이리라.

하지만 나에게 나쁜 이야기가 아니라는 건 적어도 그와 내가 모두 윈윈할 수 있는 종류일 텐데 우리 둘 사이에 의견의 합치를 이룰 가능성이 존재하는가?

“··· 좋습니다. 만나시죠. 대신 저는 혼자 나가지 않겠습니다. 고윤아 변호사와 함께 자리하겠습니다.”

동의를 구하는 의미에서 고개를 들어 고윤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눈도 나를 향하고 있었고, 고윤아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다. 나도 조건을 하나만 걸자. 그런 경솔한 행동은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만남을 너와 나, 그리고 고윤아 변호사 세 사람 말고는 누구도 몰랐으면 한다. 나 역시 너를 만나는 일은 태상과는 별개로 조용히 행동하는 것이니까.”

*

“고객님. 저희 호텔을 방문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예약은 하셨습니까.”

“네. 한영수 이름으로 예약했습니다.”

“한영수 님··· 예, 예약자 명단 확인되었습니다. 23층 2309호입니다.”

장은호 회장은 서울의 한 호텔 룸으로 약속 장소를 잡았다.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요즘은 어디를 가도 날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더구나. 고 변호사가 불편해하지만 않는다면 밀실이 좋겠다. 내가 너의 이름으로 적절한 곳을 예약하고 연락을 주마. 시간을 달리해서 거기서 만나자.”

덜컥━

23층은 이 호텔의 가장 높은 층이었다.

객실 문에 카드키를 대고 출입문의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어두운 객실 안에는 적막함만이 들어차 있을 뿐이었다.

불을 켜자 웅━ 하며 전자 기구들에 전력이 도는 소리와 함께 누구 하나 사용한 적 없는 것처럼 잘 정돈된 방안의 모습이 보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올 때만 해도 사시미를 품은 조폭이라도 기다리고 있는 거 아닌가, 슬쩍 걱정되기도 했다.

마치 싸구려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다행히 그건 바보 같은 기우에 불과했다.

객실 안으로 들어온 고윤아는 테이블 의자에 다소곳하게 자리를 잡았다.

장소가 장소다 보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기가 괜히 민망스러워졌다.

나는 고윤아로부터 등을 돌려 통유리창 앞에 서서 커튼을 걷고 야경을 내려다보았다.

빼곡한 건물들은 등대처럼 도시를 밝히고 있었고, 도로의 차들은 유성처럼 빛의 꼬리를 단 채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호텔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남산타워는 하늘에 떠 있는 달을 찌르기라도 할 듯 푸른 빛을 내뿜고 있었다.

심사가 복잡한 나와는 다르게 서울의 밤은 여느 때와 다를 것 없이 어지러웠고, 또 아름다웠다.

똑똑-

30분쯤 지났을까.

누군가 출입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꿀꺽, 침을 삼켰다.

내가 털북숭이 동물이었다면 모든 털이 바짝 섰으리라.

“제가 나가보겠습니다.”

고윤아는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다가섰다.

그녀가 문고리를 잡아당기자 현관 앞으로 우리가 기다리고 있었던 그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장은호.

나처럼 운동을 좋아했다고 했지.

생각보다 훨씬 더 덩치가 좋은 그였다.

“고변. 오래간만이에요.”

“회장님. 잘 지내셨습니까.”

이미 서로 안면이 있는 장은호 회장과 고윤아는 서로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슬로비디오를 재생하는 것처럼 장은호 회장의 눈이 천천히 나를 향했다.

웃었다.

나를 발견한 장은호 회장은 양쪽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두어 번 끄덕거렸다.

내가 보기에 그의 미소에는 다정함과 사려깊음, 그리고 우월감이 한데 뭉쳐 있었다.

장은호의 발걸음은 망설임이 없었다.

그는 창가에 서 있는 나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왔다.

“반갑다. 나 장은호야. 이런 말, 내 입으로 말하기 어색하다만 너의 형이기도 하고.”

장은호 회장은 내게 손을 척 내밀었다.

빈손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 역시 오른손을 올려 그와 악수했다.

“한영수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그래. 너 외탁했구나. 정말 다행이네, 인물이 참 좋다.”

장은호 회장의 농담에도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서서 이러지 말고 앉을까? 고변, 고변도 이리에 와서 같이 앉아요.”

자리에 앉은 장은호 회장은 핏줄이 툭툭 튀어나와 있는 두 손을 깍지 껴 모으곤 입을 열었다.

“묻고 싶은 게 많겠지. 그건 나도 다르지 않다. 어떻게 살아왔니?”

“회장님 정도 되는 힘이 있는 분이라면 직접 묻지 않아도 쉽게 알 수 있으셨을 텐데요. 제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회장님이라. 좀 더 친근한 호칭을 기대하는 건 역시 무리겠지. 네가 날 가시 돋친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거 이해한다. 그래, 알려고 하면 알 수 있었겠지. 하지만 일부러 사람을 시켜 네 뒷조사 같은 건 하지 않았어.”

장은호 회장의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적어도 거짓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태도였다.

“부족한 것이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평범한 삶이었습니다. 남에게 해 안 끼치면서 노력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이번엔 제가 물어보고 싶네요. 회장님은 제가 회장님의 아버지로부터 어떻게 버려졌는지 알고 계십니까?”

“너의 아버지이기도 하지.”

“핏덩이를 버리셨습니다. 30년이 넘도록 단 한 번도 찾지 않으셨고요.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제게 쉽지 않은 일입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 같구요.”

당돌하다고 생각했을까?

장은호 회장의 동공이 커졌다.

“그럼 왜 장 회장님이 남긴 돈을 넙죽 받았냐고 물을 수도 있겠죠. 그건 유산이 아닙니다. 장 회장님은 모종의 부탁을 저에게 했습니다. 그리고 전 그 부탁을 충실하게 지킬 생각입니다. 돈은 그 대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장은호는 짙은 갈색의 눈동자로 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에서 행간을 읽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영수, 너. 심지가 단단하구나. 보통이 아니야. 그래. 네가 어떻게 버려졌는지는 들었다. 장씨 성을 가진 사람의 한 명으로서 너에게 우선 사과부터 하마.”

장은호 회장은 앉은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향해 깊게 머리를 숙였다.

그의 그런 모습에 고윤아조차도 꽤 놀란 표정이었다.

만만치 않은 사람이구나.

내가 상대해보았던 그 어떤 사람보다 쉽지 않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래도 이제 한 가지만은 분명해졌다.

이 남자는 결코 태상과 나의 관계를 부정하기 위해 여기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 아니다.

장은호 회장의 안에는 그보다 훨씬 거대한 무언가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회장님은 내가 밉지 않습니까?”

“내가 널?”

“나는 부정(不貞)의 증거이지 않습니까. 장영복 회장님의.”

다시 자리에 앉은 장은호 회장은 이번엔 팔짱을 끼더니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거렸다.

“하지만 그건 우리··· 그래 내 아버지의 문제이지 너의 잘못이 아니지 않니. 너에 대해 알게 되고 오히려 궁금하기까지 했다. 내가 전혀 모르는 아버지의 단면이기도 했으니까. 그 호기심은 너라는 사람에게로 자연스럽게 옮겨갔고. 다른 이유는 차치하고라도 같은 핏줄로서 네 얼굴이 한번 보고 싶기도 했다.”

장은호는 고개를 돌려 고윤아를 바라보았다.

“고변, 이거 미안하네요. 영 어색한 해후지요?”

“회장님, 괜찮습니다. 저는 자리에 없다고 생각하셔도 됩니다.”

장은호의 시선이 다시 나를 향했다.

“고윤아 변호사는 정말 훌륭한 법조인이야. 결코 돈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지. 사실 내가 스카우트하려고 했었어. 하지만 단호하게 거절하더군.”

“장은호 회장님.”

나는 나지막하게 그를 불렀다.

가만히 앉아 대화의 주도권을 빼앗길 순 없다.

이제는 내 머릿속의 물음표를 지워야 할 때다.

“밤은 짧습니다. 왜 저를 보자고 하셨습니까. 갑자기 형제의 정이 샘솟아 만나고 싶었다기엔 우리는 서로를 너무 모르지 않습니까. 진짜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나에게 뭘 원하시는 겁니까.”

흠.

장은호는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래. 본론을 말하마. 나는 네가 가졌어야 할 몫을 찾았으면 한다.”

“내 몫이라고요?”

그의 말은 내가 상상한 것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래. 아버지가 남겼다는 천억은 진짜 네 몫이 아니지. 네가 당연히 가졌어야 할 것을 되찾도록 내가 도와주겠다.”

상속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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