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0억을 상속받았다-41화 (41/200)

41. 네가 영수로구나

김포공항에서 주차장에 세워둔 차에 올라탔다.

곽지해수욕장에서 고윤아와 전화 통화를 끝나기가 무섭게 숙소로 돌아가 짐을 싸서 가장 빠른 비행기에 올라탄 나다.

짧았던 휴식을 제대로 끝내지도 못한 채, 다시 세상의 소음으로 가득한 반도(半島)로 돌아왔다.

차에 시동을 걸며 머릿속으로 고윤아와의 통화를 복기해보았다.

“무슨 일이에요.”

고윤아의 목소리는 낮게 깔려 있었다.

내가 아는 그녀답지 않았다.

“휴가 중이신데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변호사님이 내가 여기 있는 걸 알았던 것도 아니고.”

“영수 님이 꼭 아셔야 할 일이 생겨서 이렇게 전화를 드렸습니다.”

대체로 이런 식으로 시작되는 대화에 좋은 소식이란 없는 법이다.

과연 그녀의 입에서는 내가 마음 한구석에 깊게 묻어두었던 불안감, 그것을 풀어헤치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태상 쪽에서 저를 통해 연락을 취해왔습니다.”

“태상이라면 어떤···”

“장은호 회장님입니다.”

허━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같은 풍경이라도 내 기분에 따라 이리 달라 보일 수 있단 말인가.

조금 전까지 그리도 아름다워 보였던 푸른 바다가 모든 것을 집어삼킬 깊은 심연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무슨 내용입니까.”

“장은호 회장님이 영수 님을 한번 만나고 싶다고 합니다.”

마침내 올 것이 온 건가.

뚝···

머리카락에서 바닷물이 한 방울 눈으로 떨어졌다.

시큰한 따가움이 몰려와 질끈 눈을 감았다.

나는 태상에 빚이 없다.

그들에게 어떤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도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그저 조용히, 나만의 행복을 찾으며 살고 싶었다.

내가 그렇게 살아주기를 간절히 원하는 건 오히려 그쪽 아닌가?

“··· 영수 님?”

“예. 너무 갑작스러운 소리라 할 말을 잃었네요. 왜 나를 만나고 싶답니까?”

“죄송합니다. 장은호 회장님은 영수 님을 대면해 직접 말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날 보고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

입 닫고 조용히 살라는 경고를 하려고?

하지만··· 과연 그런 협잡질이나 하겠다고 장은호 회장이 직접 나선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다.

생각이 계속 꼬리를 문다.

짙은 안개를 헤치며 걷는 것처럼 모든 것이 흐릿하다.

“영수 님. 원치 않으시면 만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전달하겠습니다.”

이 일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내 속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여자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그런 거물이 날 만나길 원한다면 내가 피할 방법이 있을까.

나에게 선택지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고윤아를 통해서 정식으로 만남을 요청했다는 게 의아할 지경이었다.

“일단 만나서 이야기하시죠. 지금 올라가겠습니다. 혹시 오늘 시간 되시나요?”

“예. 오시는 시간에 맞춰 일정 조율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서울에서 뵙죠.”

과연 운명은 또 나를 어디로 끌고 가려고 이런 장난질을 하는가.

나는 발에 힘을 주어 액셀을 밟아 차에 속도를 붙였다.

*

“영수 님.”

고윤아는 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여행은 즐거우셨습니까.”

“예. 잘 다녀왔어요.”

고윤아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아마 그녀의 눈에 비친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돌이켜보면 요즘 들어 우리 둘의 만남에는 항상 웃음이 있었다.

의뢰인과 변호사라는 고용자와 피고용자의 위치를 떠나 제법 인간적인 교감을 쌓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여느 때의 분위기와 절대 같을 수 없었다.

“여기가 고 변호사님 사무실이군요.”

오늘 만남은 고윤아의 개인 사무실 안에서였다.

여자 혼자 쓰는 공간이라는 게 무색할 정도로 책과 서류들이 각을 잡고 잘 정돈되어 있었다.

“네. 조용히 대화 나누기에는 여기가 괜찮을 것 같아 말씀드렸습니다. 영수 님 차는 어떤 걸로?”

“아무거나 편하실 걸로 주세요.”

고윤아는 잘 우려내 향이 좋은 차를 내 앞에 내어주고 나와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았다.

“로펌에서 개인 사무실공간도 내주고, 제가 건방지게 깜빡깜빡하는데 역시 고 변호사님은 능력이 있는 사람이군요.”

“아닙니다. 로펌은 업무 특성상 사기업보다는 조직 문화가 제법 수평적인 편입니다. 시니어급이나 저와 같은 신입에 가까운 변호사나 다 똑같은 사무실을 하나씩 쓰고 있습니다.”

나와 고윤아의 말은 본론을 겉돌기만 했다.

내가 지금 그렇듯 고윤아도 머릿속으로 할 말들을 정리하고 있으리라.

우리가 입을 다물자 사무실 안에는 가습기가 쉭쉭 대며 숨을 뿜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장은호 회장은 어떤 사람입니까.”

포문이 열렸다.

물론 장은호 회장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만큼은 나도 모르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들보다 조금은 더 관심 있게 장은호 회장을 지켜봤을지도 모른다.

내가 다니던 회사가 다름 아닌 태상 자동차의 밑도급이었으니까.

물론 그때는 설마 내가 태상과 어떤 연관이 있을 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태상의 전면에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 장은호 회장.

그는 등장과 동시에 모험적인 기업인으로 그 이름을 재계에 알리고 있었다.

모험적이라는 것은 이중적인 의미다.

반드시 긍정적인 의미만을 내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태상 자동차의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은 후 시작된 그의 도전은 아직 충분한 결실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장은호 회장에 대한 평가를 유보하고 의구심 어린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태상 자동차는 이미 국내 시장에서 업계 1위를 자리를 단 한 번도 놓치지 않은 기업.

장은호 회장은 뱀의 머리보다는 용의 어딘가쯤이 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의 눈은 내수가 아닌 세계 시장을 향했다.

국내 자동차 업계들이 그러하듯이, 태상 차 역시 가장 거대한 시장인 미국과 유럽에서 ‘가성비’로 살아남았다.

하지만 장은호 회장의 취임 태상 자동차를 독일 3사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브랜드로 만들겠다는 허언에 가까운 포부를 밝혔다.

그저 허울 좋은 말뿐이 아니었다.

그는 공격적인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포르*와 BM* 출신 디자이너들을 영입해 태상 자동차 기존의 라인과 별도로 프리미엄 브랜드를 런칭했으며, 미국 슈퍼볼에 할리우드 유명 감독이 제작한 광고를 수백억을 쏟아부어 송출하기도 했다.

최근에 장은호 회장이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분야는 전기차.

내연기관 차량에 비하면 역사가 짧은 전기차 분야를 가장 앞서서 선도하겠다며 야심 차게 언론과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내가 일전에 정실 전자를 회사에 추천했던 이유도 그런 기류를 읽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장은호 회장의 그런 일화들이 아니었다.

인간적으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었고, 고윤아에게 그걸 묻고 싶었다.

상대를 알아야 대응도 가능하다.

내게 적이 될지 아군이 될지 최소한의 가르마라도 타 놓고 싶었다.

“일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어떤 분이다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외견상으론 호방한 기질이 있다고들 합니다. 미국 생활을 오래 하신 탓인지 합리적인 성향과 자유로운 기질이 복잡하게 섞여 있습니다. 그래서 더 알기 어려운 분인 것 같습니다.”

“뉴스에서 봤습니다. 태상의 총수 자리를 두고 진통이 예상된다고. 장은호 회장도 태상의 정상을 노리고 있습니까?”

혹시라도 장은호가 나를 접선하려는 의도 속에는 저 문제도 엮여있지 않을까?

설마.

나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내 처지를 스스로 비하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하지만 저 거대 공룡 기업에 비교하면 나는 장영복 회장의 서자(庶子)에 불과한 무력한 개인일 뿐이다.

500억이라는 큰돈을 가지고 있지만, 태산의 운명을 흔들기에는 보잘것없은 액수일 뿐이다.

“태상의 후계자에 대해서는 장영복 회장님으로부터 저도 들은 것은 없습니다. 회장님과 제가 친분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런 이야기는 친분만으로 흘릴만한 것이 아닐뿐더러, 회장님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은퇴 생각은 없으셨으니까요.”

“지금 상황으로서는 장은수 회장이 제일 유리한 고지에 있는 것 아닙니까? 장남이라는 위치도 그렇고··· 장 회장으로부터 받은 유산분도 가장 크다고 하던데요.”

“맞습니다. 대체로 태상 내부에서도 그렇게 눈치를 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태상 건설의 회장이 총수가 된다는 건 그들의 전통입니다. 태상 그룹의 시작이 태상 건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고윤아의 이맛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장은수 회장님의 지금 자리가 콘크리트처럼 단단한 것은 아닙니다. 당장 태상 건설만 놓고 보아도 복잡한 지분 관계만 보아도 얼마든지 뒤집힐 수 있는 위치입니다. 장은수 회장님이 내세우는 명분은 선대 총수가 생전에 자신을 그 자리에 앉혔다는 건데···"

고윤아는 잠시 머뭇거렸다.

"제 사견을 조금 섞어 말씀드리자면 장 회장님은 장은수 회장님이 태상 건설 회장 자리에 앉은 뒤 보인 행보에 굉장히 불만스러워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굳이 날 보겠다는 이유가 짐작이 안 가는군요. 지금 같은 상황에서 저는 그들에게 골칫거리만 늘려주는 존재 아닌가요.”

“죄송합니다. 저 역시 많은 생각을 해보았지만, 딱히 이거다 싶은 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항상 현명한 대안을 제시해주던 고윤아조차도 이번 문제의 판단에 대해선 난감한 기색이었다.

이마를 쓸며 머릿속을 정리했다.

그래. 어차피 장 회장의 돈을 받는 순간, 이 모든 것은 예정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답을 알 수 없는 것을 미리 고민하며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태상의 회장이니, 뭐니해도 결국엔 나와 똑같은 인간일 뿐이다.

장은호 회장은 선의와 적의의 경계 어딘가에 이미 자신의 위치를 박아놓았을 것이다.

얼굴을 보고 말을 섞으면 분명히 그의 의도 몇 개쯤은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래, 좋다.

내 몸 안에 흐르는 끈적한 피가 동족을 끌어들였다면 한번 부딪쳐보겠다.

“··· 고 변호사님. 장은호 회장의 연락처가 어떻게 됩니까.”

고윤아는 둥근 눈을 들어 잠깐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괜찮겠습니까?”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하겠습니다. 변호사님은 옆에서 스피커 폰으로 같이 들어주세요.”

“··· 알겠습니다.”

고윤아는 펜을 들어 쪽지에 어떤 번호 하나를 내게 적어주었다.

뚜르르··· 뚜르르···

“여보세요.”

신호음이 세 번 정도 울리고 통화가 연결되었다.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저 동굴 깊은 곳에서 울리는 듯한 깊은 저음이었다.

“장은호 회장님이 맞으십니까.”

“예. 제가 장은호입니다. 어디십니까.”

“저는··· 한영수라고 합니다.”

“...”

장은호 회장은 잠시 말이 없었다.

나도, 고윤아도 입을 다문 채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어느새 손바닥이 땀에 흥건히 젖어 있었다.

“그래, 반갑다. 연락해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네가 영수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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