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0억을 상속받았다-40화 (40/200)

40. 제주도에서 (3)

그 이후로 오세영과 박용호를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숙소를 옮긴 것인지, 아니면 여행을 마치고 제주도를 떠난 것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물론 알 필요도 없는 일이다.

그 후로도 며칠간 제주도를 신나게 돌아다녔다.

사람들이 제주도 한달살이를 하는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동서남북 곳곳에 절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호텔 방에서 계속 묵는 것도 답답해서, 애월읍에 있는 돌담집에서 이틀 밤을 민박하기도 했다.

날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것도, 출근해야 할 직장이 있는 것도, 머리 싸맬 고민이 있는 것도 아니니 매 순간 여행 자체를 100% 즐길 수 있었다.

오늘은 성산 일출봉에서 해돋이를 보기 위해 일찌감치 길을 나선 참이다.

동쪽 해안도로를 타고 가다 보면 나오는 성산 일출봉은 제주도의 10경 중 으뜸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위풍당당한 자태를 뽐냈다.

성산 일출봉의 정상은 해발 200m가량이었다.

기껏해야 동네 뒷산 정도의 높이지만, 계단으로 만들어진 코스는 제법 가팔랐다.

“아··· 제주도 와서 너무 먹기만 했더니 몸이 무거워졌나.”

오르다보니 숨이 차 쉬엄쉬엄 걸음을 떼고 있는데, 아까부터 다람쥐 산에 오르듯 잽싸게 나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던 꼬맹이 두 녀석이 내 지척으로 다가왔다.

7살쯤 되었을까? 바가지 머리의 두 녀석은 서로 맞네, 아니네 하고 떠들면서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얘들아, 너희 진짜 씩씩하게 잘 올라간다. 둘이 형제야?”

“아니에요. 우리 쌍둥이예요!”

“바보야, 쌍둥이라는 말이 형제라는 말이랑 똑같은 거야. 아저씨, 내가 형이고 얘는 동생이에요.”

“저는 진수고 얘는 진우예요.”

“야, 너 형한테 얘라고 하지 말랬지.”

경상도에서 왔는지 사투리가 진하게 묻어있는 말투로 툭탁거리는 모습이 너무나 귀여웠다.

둘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절로 아빠 미소가 지어졌다.

“그런데 무슨 이야기 하고 있었던 거야? 뭐가 맞고, 아니야.”

“아저씨 서울에서 왔어요?”

“서울? 아니··· 뭐, 서울 근처에서 오긴 했는지.”

“거봐라! 내 말이 맞지?”

진수라는 아이는 쌍둥이 형 진우를 바라보며 손뼉까지 치면서 자기 말이 맞다고 좋아했다.

진수는 눈을 다시 내게 돌려 엉뚱한 질문을 했다.

“아저씨, TV에 나온 사람 맞지요?”

“TV?”

“드라마에서 아저씨 본 것 같은데···”

“잘못 봤네. 아저씨는 TV에 나간 적이 없거든.”

“거봐라! 내가 아니라고 했지?”

이제 기세가 당당해진 쪽은 진우였다.

동생이 틀렸다는 걸 알자마자 진수를 향해 혓바닥을 빼쭉 내밀었다.

“근데 아저씨 TV는 아니지만 유튜브에는 나온 적 있는데.”

“유튜브요? 우와.”

쌍둥이 아니랄까 봐 두 아이는 동시에 한목소리로 감탄을 뱉고는 새삼 반짝이는 눈을 깜빡였다.

자랑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저 애들이 귀여워 한번 던져본 말.

그런데 반응이 이리 좋으니 오히려 민망해질 지경이었다.

“아저씨, 저랑 사진 같이 찍어주면 안 돼요?”

“나도! 나도!”

“사진?”

아이들은 대단한 스타라도 만난 것처럼 내 손을 잡아 흔들어보더니 사진을 찍어달라고 성화였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엄마! 엄마! 핸드폰 좀 주세요.”

뒤를 따라온 아이들의 부모는 제 자식들이 실례라도 하고 있다고 오해를 한 모양이었다.

부부가 각자 한 명씩 쌍둥이를 재빠르게 검거했다.

“엄마, 저 아저씨! 유튜브에 나오는 유명한 사람이에요!”

“너희들 조용히 해라.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 애들이 사내 애들이라 좀 극성이라서···”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엄마와 아빠는 나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하곤 아이들의 손을 잡고 사이좋게 나를 앞질러 올라갔다.

보기 좋았다.

언젠가 나도 가정을 꾸릴 수 있을까?

남들처럼 아이도 낳고, 그 아이들과 손을 잡고 여행도 다니고.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내가 누리지 못한 유년 시절의 행복까지 모두 베풀어주리라.

정상에 오르자 성산 일출봉을 가득 채우고 있는 너른 억새밭이 한눈에 보였다.

우선 눈이 즐거웠고,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은 시원함이 있었다.

아직 여섯시 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제법 많은 사람이 오늘의 해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그렇게 얼마 동안 서 있었을까.

누군가의 입에서 장탄식이 터져 나왔다.

금빛 하늘 속에서 아침 해가 얼굴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정말 멋진 풍경이었다.

여명을 이겨내고 떠오르는 해는 내 가슴에 벅찬 감동을 심어주었다.

내 인생도 저 붉은 해처럼 어둠을 모두 살라내게 되길.

마음속으로 남몰래 소망을 빌었다.

*

다음 일정은 버킷리스트라고까지 말하긴 좀 거창했지만, 꼭 한 번쯤 해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바로 서핑.

11월에 웬 서핑이냐고, 정신 나간 소리 한다고 누군가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거 기왕에 꼭 체험해보고 싶었다.

까짓것 뭐 감기 한번 걸리고 말지.

다행히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이 나뿐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서핑 강습은 12월까지 1월, 2월을 제외하고 계속 있었다.

근처에 유명하다는 해물라면으로 첫 끼니를 대충 때우고 서핑 샵에 예약한 시간이 될 때까지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시간을 죽였다.

따로 일정을 정해놓고 제주도에 온 것은 아니었지만, 생각보다 체류 기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혼자서 이렇게까지 잘 놀고 잘 돌아다닐 거라고는 나도 알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제주도 여행을 통해 미처 몰랐던 내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달까.

서핑 샵은 제주도 서쪽에 있는 곽지 해수욕장 인근에 있는 곳이었다.

처음에는 중문 쪽 바다에 서핑족들이 모인다고 해서 거기로 가려 했는데, 중문은 파도가 높아 초보자에겐 쉽지 않다는 말에 수심이 얕은 이쪽으로 예약을 했다.

“안녕하세요. 오늘 예약한 한영수라고 합니다.”

“예. 강습 포함해서 예약하신 거 맞죠?”

“네. 맞아요.”

“알겠습니다. 서핑은 해보신 적 있나요?”

“아니요. 처음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같은 시간에 서핑을 예약한 사람은 나까지 포함해 총 3명.

남자는 나 하나였고, 친구인듯한 여자 두 명이 일행이 되었다.

“보드의 앞부분은 노스, 뒷부분은 테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테일에는 리쉬라고 끈이 있어요. 리쉬는 생명줄이에요, 생명줄! 발목에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꽉 조여 매셔야 합니다. 여기 노란색 보드 여자분. 왜 바깥쪽일까요?”

태닝이라도 한 듯 온몸이 검게 탄 빡빡머리의 서핑 강사는 이 일에 제법 경력이 있는 듯 재치가 있는 남자였다.

“글쎄요···”

강사의 지목을 받은 여자는 수줍게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내 강사의 눈은 나를 향했다.

“우리 잘생긴 형님이 한번 말씀해 보실까요. 왜 바깥쪽일까요.”

“음··· 위급한 상황이 되었을 때 한번에 당겨서 풀어야 해서 아닐까요?”

운동을 할 때 항상 차는 손목 스트랩을 생각하며 말했다.

“오, 정답! 맞습니다. 박수!”

강사는 내가 뭐 대단한 답을 말하기라도 한 것처럼 넉살 좋게 말했다.

강사는 15분 정도 서핑의 기초이론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이론 수업이 끝나고 모래사장 위에서 몇 번의 반복 연습을 하고 나서야 마침내 나와 일행들은 어미 오리를 따르는 새끼들처럼 강사의 뒤를 따라 바다를 향해 나가게 되었다.

래시가드에 서핑복까지 입었지만, 확실히 바닷물은 차가웠다.

하지만 새로운 걸 도전한다는 기분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Take me to the ocean'

노즈 부분에 적혀있는 영문구는 파도를 가르며 서프보드를 타고 날아오르는 내 모습을 상상하게 만들었다.

“엇!”

하지만 역시 인생은 실전.

운동 신경만은 자신 있다고 생각했는데, 서프보드 위에 가만히 서 있는 것조차 쉽지가 않았다.

보드 위에서 몸을 일으키면 3초도 못 버티고 몇 번씩이나 바다에 빠지기 일쑤였다.

“아, 형님. 진짜 잘하실 것처럼 생기셔서 의외로 허당이시네요.”

파도에 맞춰 서프보드를 밀어주던 강사는 날 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러게요. 생각보다 이게 진짜 어렵네요.”

“무게 중심이 너무 앞으로 쏠려 있어서 그래요. 노즈가 물 안으로 가라앉으니까 서프보드가 뒤집혀 버리는 거예요. 균형 유지를 잘하셔야 합니다. 그렇다고 또 너무 몸을 뒤로하면 브레이크 걸리니까. 어! 파도 좋은 거 온다. 형님, 이번에는 성공 한번 해보시죠. 자 패들링!”

강사의 신호에 맞춰 보드에 몸을 납작 엎드리고 양손으로 물을 저었다.

“푸쉬!”

이건 몸을 세우기 전 상체만 들고 준비 자세.

“업!”

마지막 테이크아웃 신호에 맞춰 재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어···”

강사가 말했던 것처럼 서프보드의 앞 대가리는 또 물속으로 슬슬 잠기기 시작했다.

영수야. 너 혹시 지금 겁먹은 거야?

가슴까지밖에 오지 않는 물에 빠질까 봐 겁나서 미리 앞으로 몸을 던질 생각을 하는 거냐고.

균형, 균형, 균형!

무릎을 살짝 굽힌 자세를 유지한 채 몸의 무게 중심만 살짝 뒷발에 가져갔다.

물에 잠겼던 노즈가 서서히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지금 자세 그대로!”

뒤쪽에서 강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마침내 서프보드 위에 우뚝 서는 데 성공했다.

파도는 내 보드를 부드럽게 밀어주었다.

몸의 긴장을 풀고 균형만 유지하자 어느새 나는 해변까지 한 번도 보드 위에서 자빠지지 않은 채 완주를 할 수 있었다.

“이야!”

보드에서 내려온 나는 신이 나서 환호성을 지르며 두 손을 번쩍 들었다.

“그렇지! 잘했어요. 그거에요, 형님!”

저 바다 안쪽에서 강사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나의 성공을 축하해주었다.

한번 방법을 알게 되고 몸에 익으니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무게 중심을 바꿔가며 속도도 내보고, 방향도 이리저리 틀어보았다.

추운지도 모르고 정말 재미있게 탔다.

“이러다가 여름만 기다리게 생겼는데?”

웨이트 트레이닝 이후로 새로운 취미가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잠시 몸도 말릴 겸 보드를 들고 모래사장으로 나왔다.

수건으로 물기를 대충 털어내고 휴대전화를 들어 잠금을 풀었다.

“응···?”

부재중 전화가 네 통이나 와 있었다.

발신자는 모두 고윤아.

고윤아의 이름 위로 손가락을 올려 전화를 걸었다.

고윤아는 통화연결음이 걸리기가 무섭게 전화를 받았다.

“영수 님. 고윤아입니다.”

“예. 변호사님. 잠깐 뭐 좀 하느라 전화를 못 받았네요.”

“지금 혹시 어디 계십니까?”

“저 제주도인데. 왜 그러십니까?”

고윤아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랐다.

다급함이 느껴졌다.

무슨 일이 있구나.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목울대로 꿀꺽 넘겼다.

네가 영수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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