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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억을 상속받았다-39화 (39/200)

39. 제주도에서 (2)

“어떻게 여기서 또 뵙게 되네. 마치 누가 짜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지 여보?”

하하, 하하.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박용호는 연신 웃으며 말했다.

“자기야, 우리 가자. 선배 식사 맛있게 해요.”

미간이 잔뜩 찌푸려진 오세영은 푸른 핏줄이 다 비치는 하얀 손으로 박용호의 긴팔 소매를 잡아끌었다.

“잠깐 놔봐. 영수 씨랑 이야기 좀 하게.”

박용호는 팔은 흔들어 제 아내의 손을 떨쳐냈다.

마치 형편없는 배우들의 연기를 보는 것 같았다.

부부의 행동은 어색했으며,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감정은 촌스러웠다.

무엇보다도 지금 이 순간 제일 속 터지는 건 바로 나였다.

이들의 조잡한 무대에 강제로 초대된 관객.

“영수 씨. 나 잠깐만 앉아도 되죠?”

“아, 정말 창피하게 왜 이래, 당신.”

박용호는 내 입에서 허락이 나오지 않았음에도 자연스럽게 의자를 끌어서 내 앞에 앉았다.

그는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아내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오세영은 날 ‘선배’라고 부르고 있었다.

오세영은 대학 시절부터 단 한 번도 나를 선배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갑작스러운 호칭의 변화.

나와 호텔에서 헤어지고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지 선하게 그림이 그려졌다.

“여기 조금 비싼데. 낭만과 분위기를 즐기실 줄 아네요. 영수 씨가.”

은근슬쩍 존대와 반말을 오가는 내 앞의 남자.

“음식 맛이 괜찮더군요.”

“나랑 와이프는 제주도 올 때마다 여기 꼭 들려요. 이야, 시계도 로렉* 차시네? 아, 하긴 로렉*가 요즘 예전 그게 아니긴 하죠. 젊은 친구들이 이미지 다 버려놨어. 내가 데리고 있는 애들 중에서도 짭퉁인지 진짜인지 서브다이버 차고 다니는 애들 천지라니까요.”

남자의 입은 망치였다.

지금 그의 눈에 나는 틀림없이 못으로 보이리라.

어떻게든 나를 한번 두들겨보겠다는 심산인지 적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상대할 가치도 없다.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부족한 사람은 세상 모두가 적으로 보이는 법이다.

내 앞의 박용호가 딱 그런 케이스로 보였다.

짐짓 내가 너보다 높은 곳에 있다는 것처럼 늘어놓는 허세 가득한 말들.

그건 명백히 자기가 갖지 못한 아내의 과거와 나의 젊음에 대한 질투가 섞인 일그러진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얼마나 자기 여자에 대해 확신이 없기에 이런 추태를 부릴까.

그렇지 않아도 볼품없는 남자가 더 작아 보였다.

“우리 와이프랑 대학 선후배라니까··· 영수 씨 정도면 학교 다닐 때도 여자들이 아주 줄을 섰겠어. 혹시 우리 와이프랑도 뭐 있고 그런 거 아니에요? 하하하━”

나는 대답 없이 박용호를 한번, 그리고 오세영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오세영은 체념이라도 한 듯이 팔짱을 낀 채 먼 곳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나 엄청 쿨해. 신경 하나도 안 쓰니까.”

“지금 남편분께서 오해를 단단히 하시는 것 같은데···”

냅킨을 들어 입가를 쓱 닦았다.

오세영.

너 참 우습고, 또 가엾다.

분명히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겠지.

의처증에 걸린 것처럼 벌벌 떠는 이 남자의 옆에서 행복의 답을 찾았니?

뭐,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다.

그저 이 무대에서 빨리 퇴장하고 싶을 뿐.

“세영이랑 저는 그저 대학 선후배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제는 서로 연락처도 없는 아무 사이도 아니고요.”

“그래요···? 우리 아내 말로는 꽤 친한 사이였다고 하던데.”

“세영이가 그렇게 생각해줬다면 고맙지만, 지금 굉장히 불편하네요. 왜 내가 몇 년 만에 우연히 만난 후배 때문에 귀중한 시간을 방해받아야 하는지.”

그만 좀 꺼져달라는 눈빛과 함께 내 진심을 담아 말했다.

“아, 이거 내가 눈치가 없었습니다. 아니, 저 사람이 내가 대학 시절 좀 물어봤다고 그렇게 짜증을 내지 않습니까. 영수 씨 실례했습니다.”

아무 사이 아니라는 내 답변을 듣고서야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진 모양이다.

박용호는 처음으로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을 내게 보여주고는 오세영과 함께 자리를 벗어났다.

*

식사를 마치고 차를 몰아 협재 해변으로 이동했다.

11월의 밤바다는 고요했다.

부서지는 파도는 달빛 아래서 형형한 에메랄드빛을 뽐냈다.

모래사장에 앉아 바다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뜻하지 않은 만남 때문에 다소 불쾌해졌던 기분이 파도와 함께 쓸려나갔다.

중고차 사업을 한다고 했으니, 벌이는 괜찮을 것이다.

오세영이 선택한 남자니 틀림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행복할까?

뭔가에 쫓기듯 불안해 보이는 오세영의 얼굴 속에서 나는 행복의 그림자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 어차피 오세영은 사랑이 아니라 다른 걸 쫓은 거겠지.

저렇게 몇 마디 말로 감정을 조종할 수 있는 남자라면 차라리 오세영에게 잘 맞는 짝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바다는 내 머릿속에서 또 다른 생각을 끌어냈다.

오세영이 작은 개인의 욕망이라면, 이건 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큰 욕망의 덩어리였다.

최근 미디어를 통해 알게 된 태상의 이야기.

장영복 회장의 유언에 따라 태상의 총수 자리를 당분간 공석으로 비워둔다는 보도였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정확히 밝혀진 게 없어 왈가왈부 추측들이 많았지만, 그 자리를 두고 장씨 성을 가진 자식 간에 한바탕 전쟁이 벌어질 것이라는 데는 모두가 동의했다.

조용히, 그리고 총알 대신 돈이 흩날리며 벌어질 전쟁.

한 언론사에서는 ‘형제들의 혈전(血戰)’이라는 다소 과격한 표현을 쓰기도 했다.

죽은 제갈량이 산 사마의를 잡는다던가.

도대체 이 장영복 회장이라는 사람의 영향력은 얼마나 크단 말인가?

그의 죽음으로 인생을 바뀐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태상 그룹은 아직 장 회장의 공백을 수습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태상의 이름을 단 기업들의 주가는 기사 몇 줄에도 요동을 쳤다.

어디 그뿐이랴, 이미 수조 원의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리 하나를 놓고 치열한 암투를 벌일 장 씨들의 이야기는 사람들의 상상력이 더해져 한 편의 드라마가 될 지경이었다.

세상이 욕망으로 가득 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나는 눈앞에 평화로운 밤바다처럼 욕망의 소용돌이 안에서 중심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

돈이라는 놈의 마력에서 흔들리지 않고 균형을 잘 잡을 수 있을까.

나는 오랜 세월 파도에 깍여 반질반질해진 조약돌 하나를 집어 푸른 바다를 향해 던졌다.

*

“오빠, 또 보네.”

호텔 입구에서 차 키를 주차요원에게 맡기고 인사를 할 때였다.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아니나 다를까 오세영이 서 있었다.

“하루에 세 번이라니, 참 웃기다. 그렇지?”

마치 우연이 거듭된다는 듯이 말을 거는 오세영.

하지만 그녀의 모습을 본 나는 이번만은 우연이 아님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오늘 처음 로비에서 만났을 때와는 달리 화장부터 옷차림까지 신경 쓴 기색이 역력했다.

명백히 목적이 보이는 복장이었다.

그리고 그 목적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언제부터 나와 있었는지 모르지만, 오세영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네 남편은?”

“아까 식당에서 혼자 술 잔뜩 마시더니 취해서 자고 있어. 미안해 오빠, 아까는.”

“아니야. 신경 쓸 거 없어. 그럼 좋은 밤 돼라.”

내가 등을 돌려 로비로 들어가려고 하자, 오세영은 나를 다급하게 불러세웠다.

“오빠, 잠깐만 나랑 이야기 좀 하면 안 돼?”

“너 술 마셨어?”

“조금··· 많이는 아니고.”

그녀는 호텔 로비, 아니 여차하면 내 객실 앞까지 쫓아올 기세였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뱉곤 손가락으로 호텔 입구에서 몇 발자국 떨어진 벤치를 가리켰다.

“오빠는 여전히 멋있네? 오빠 잘된 것 같아서 보는 내가 기분이 다 좋다.”

벤치에 나란히 앉자 꺼낸 오세영의 첫마디였다.

“그래. 너도 대학 때랑 똑같네.”

오랜만에 보는 사람에게 흔히 하는 말이자, 나로서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담은 메시지였다.

하지만 오세영은 그 말을 제멋대로 해석했다.

“다행이네. 나이 먹어 보였을까 봐 걱정했는데···”

한 번 말문을 트이자 오세영이 쉬지 않고 입을 열었다.

“오빠는 결혼했어? 나 소식 못 들은 것 같은데.”

“아직이야.”

“정말? 그렇구나. 오늘 이렇게 오빠를 만나니까 기분이 정말 이상했어. 옛날 생각이 참 많이 나지 뭐야.”

옛날 생각이 많이 난다고.

오세영은 옛날 생각에는 좋은 기억만 들어차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나를 좋아한다고 졸졸 따라다니던 20살 시절의 얼굴로 돌아가 있었다.

“지난 일은 가슴에 묻어두고 사는 거지. 너나 나나 지금을 충실히 살면 되는 거고.”

나는 고개를 앞으로 돌려 그녀로부터 풍겨오는 기운을 외면했다.

“있잖아, 오빠. 생각해보면 나 학교 다닐 때 오빠를 좋아했던 것처럼 누굴 순수하게 좋아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나를 그렇게 좋게 기억해준다니 고맙다. 그런데 굳이 그런 말을 하자고 사람 잡은 거니?”

“오빠는 아직도 내가 밉지? 그때 내가 오빠에게 상처 줬던 건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그래도 내가 헤어지고 나서 몇 번 오빠한테 연락했었던 거 알지? 나 정말 오빠 많이 좋아했었다고.”

자기감정에 완전히 취해있군.

내가 자신과의 이별 때문에 상처를 입고 힘들어했을 거란 생각은 오직 그녀만의 착각이다.

사실 홀가분하기까지 했다.

내 상황과 환경 때문에 더 이상 옆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차가운 시선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게.

“그래도 아까 내 편 들어준다고 우리 남편한테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말해준 거 고마워.”

“날 춥다. 이만 들어가자.”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오세영은 마음이 급해지기라도 한 모양이다.

본인의 처지에서 해서는 안 될, 무리수를 던졌다.

“오빠,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시간 있으면 나랑 근처에서 술이라도 한잔 마시자. 우리 남편 한번 잠들면 해 뜰 때까지 못 일어나는 사람이니까···”

하.

절로 입에서 탄식이 나왔다.

“부부가 정말 똑같네.”

“어? 오빠, 뭐라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를 두 손으로 툭툭 털었다.

“착각하는 모습이 둘이 똑같다는 말을 하는 거야. 내가 아까 우리가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한 건 네 편을 들어주고 싶어서가 아니라 정말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야.”

“...”

“널 미워하냐고? 사실 별 감정 없지만, 굳이 말하자면 오히려 고마워. 네가 나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 덕분에 주변 사람들이 나로 인해 행복해지는 걸 보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알게 되었으니까. 요즘 나는 그렇게 살고 있거든.”

오세영은 고개를 툭 떨궜다.

자기가 뱉은 말에 뒤늦게 부끄러움이 올라오기라도 한 걸까.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세영아. 내 감정과 별개로 네가 그 시절을 정말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이런 식으로 더럽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오세영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잘 살아라. 살면서 또 볼일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굳이 서로 인사는 하지 말자.”

제주도에서 (3) - 무료 마지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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