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0억을 상속받았다-38화 (38/200)

38. 제주도에서 (1)

“와···”

온수를 받아놓은 욕조에 몸을 기대자 내 입에서 만족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장시간의 등반으로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던 몸이 노곤하게 풀어졌다.

여기는 제주시에 있는 그랜드 메리엇 호텔.

하루 숙박에 무려 30만 원이나 하는 이곳을 베이스캠프로 잡은 이유는 딱 하나.

호텔 내에 부대시설로 훌륭한 피트니스 센터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등산을 가기 전에 몸을 푼다는 핑계로 새벽부터 한 시간 동안 운동을 했었다.

진짜 넌 어쩔 수 없는 진성 헬창이구나. 한영수.

피식 웃음이 나왔다.

사실 소박한 사치는 호텔 룸 말고도 하나 더 있었다.

공항 근처에서 픽업한 렌터카.

혼자 타고 다닐 것이니 사실 차종이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큰마음을 먹고 벤*를, 그것도 그 브랜드에서 고급 차종에 속하는 G*겐을 빌렸다.

그렇지 않아도 이제 오랜 세월 나의 발이 되어준 애마를 조금 쉬게 해주고 새 차를 뽑아볼까 고민 중이었다.

30대 남자라면 누구나 하는 말. 로또 맞으면 차부터 바꿔야지.

나야 뭐, 평소 드림카같은 건 없으니 차를 찾아보는 것도 일이었다.

그러다 내 눈에 들어온 것이 G*겐.

2억에 가까운 고가의 차량이라는 걸 고려하면 주행 성능도 연비도 썩 매력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육중하고 고풍스러운 바디라인이 지름신을 불러일으켰다.

이 기회에 시승 한 번 해본다고 생각하고 렌트한 것.

여행을 떠나겠다는 건 어느 정도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시간과 돈이 있는데, 가고자 하면 어디든 못 갈까.

그래도 너무 일상적인 풍경은 싫었고 그렇다고 외국을 나가보자니 언어의 장벽 때문에 쩔쩔매며 다니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결정한 곳이 제주도.

깊은 생각을 하지 않고 훌쩍 떠나온 곳이었지만, 제주공항에 내리기가 무섭게 나는 이곳이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따사로운 날씨와 야자수가 길게 자라있는 이국적인 풍경.

해안도로는 아무 곳에나 차를 세우고 어떻게 사진을 찍어도 멋진 그림이 나왔다.

구름 한 점 없는 쾌청한 하늘 아래 벤* 로고가 멋들어지게 박힌 핸들을 잡고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은 채 액셀을 밟으니, 이대로 영원히 드라이브하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좋다. 모든 게 완벽하다고 느껴질 만큼.

그때, 욕조 옆에 올려둔 휴대전화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승우의 전화였다.

“어, 승우.”

“새끼야. 어디야? 오늘 너희 헬스장 올라갔었는데 자리에 없더라?”

“응. 나 앞으로 센터는 돈 관리만 하려고. 사람 쓰면 굳이 내가 앉아있을 필요가 없더라고.”

“이야, 역시 건물주는 클래스가 다르시네.”

막상 한 건물에서 일하면 매일같이 승우를 만날 수 있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나와 이승우는 메일은커녕 일주일에 한두 번도 만나기 어려웠다.

나도 나대로 바빴지만 정말 정신이 없는 쪽은 이승우였다.

나와 신부님이 응원했던 것 이상으로 승우의 가게 ‘만리향’은 장사가 잘되었다.

점심시간부터 저녁 시간까지 꽉꽉 들어차는 손님들 덕에 재료가 소진되어 일찍 가게 문을 내린 것도 몇 번이었다.

알게 모르게 주변 중식당에서 견제하는 걸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오전에는 하루치 장사 준비로 정신없이 바쁘고 영업이 끝나고는 가게 정리 때문에 쉴 틈이 없는 이승우.

혹여라도 내가 얼쩡대면 괜히 방해하는 꼴이 될까 봐 일부러 찾아가지 않은 이유도 있다.

어쨌든 친구의 노력이 보상받는 모습을 본다는 건 상상 이상으로 기쁜 일이었다.

“나 지금 제주도야.”

“제주도? 놀러 간 거야?”

“응.”

“팔자 좋으시구만. 야, 그건 그렇고 네 통장에 돈 좀 보냈다.”

“뭐? 무슨 돈.”

“얼굴 보고 주고 싶었는데 자리에 없어서··· 어차피 제주도 갔으면 통장으로 보내길 잘했네. 아무리 그래도 맨입으로 장사하는 건 내가 맘이 안 편해.”

이 쓸데없이 착한 녀석···

“괜한 짓을! 앞으로는 그러지 마.”

“돈 주겠다고 해도 난리네. 내가 알아서 해, 우리 가게 장사 잘되는 거 못 봤냐. 다 먹고 살 만하니까 챙기는 거야.”

“참 너도 고집이다.”

“그나저나 너 소개팅 진짜 안 할래? 내가 저번에 말한 은주 친구. 강남인가 어디서 회사에 다니는 앤데 나도 몇 번 봤었거든? 사람 진짜 괜찮아.”

“됐어. 생각 없다.”

“이건 뭐, 다 됐데. 야, 아무튼 알겠고 잘 쉬고 와라. 올라오면 가게 한번 들리고.”

“그래. 알겠어.”

이승우와 전화를 끊고 욕조 안으로 온몸을 담갔다.

물속에서 바깥세상은 모든 것이 부서진 것처럼 보였다.

여자라.

몇 번의 연애가 나에게 남긴 것이 무엇이었던가.

좋은 이별이란 건 없다는 가르침만을 남겼다.

달콤한 연애의 시작은 항상 상처라는 씁쓸한 뒷맛으로 끝나곤 했다.

과연 세상에 나를 온전히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500억이라는 돈과 육체라는 껍데기가 아닌 내 내면을 바라봐줄 여자가 있을까?

이런 것을 바라는 게 순진하고 또 이기적인 생각인 걸까?

숨이 점점 차오르기 시작했다.

“푸하!”

욕조 안에서 몸을 일으킨 나는 수건으로 몸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고 욕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호텔 로비로 나왔다.

흑돼지구이, 갈치 조림, 고기국수, 심지어는 사기당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다금바리까지···

제주도에 왔으면 꼭 먹어야 한다는 음식이 너무나 많았다.

이러니 오히려 뭘 먹어야 할지 고민이 될 지경이었다.

다양한 리뷰를 검색해본 끝에 오늘 내가 선택한 저녁은 미슐랭 가이드에 이름을 올렸다는 한 퓨전 한식 파인다이닝이었다.

시그니처 메뉴가 무려 1인에 15만 원이라는 곳.

우습게 볼 가격은 아니었지만, 오늘만큼은 호사를 누려보고 싶었다.

“여기서 차로 40분 정도는 가야 하네.”

데스크에서 차 키를 받고, 미리 호텔 입구 쪽에 발렛 해 놓은 차를 타려고 로비를 가로질러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오빠! 영수 오빠··· 맞지?”

누군가가 나를 불러세웠다.

귀에 익은 목소리.

몸을 돌려보자 발목까지 내려오는 회색 원피스를 입고 있는 내가 잘 알고 있는 여자가 서 있었다.

“너··· 세영이구나.”

가끔은 현실에서도 드라마보다 더 기막힌 우연이 벌어지고는 한다.

이 시간, 이 낯선 곳에서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하지만 아쉽게도 이 우연한 만남은 나에게 있어 기분 좋은 사건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신기하다. 오빠를 어떻게 여기서 다 만나지? 놀러 온 거야?”

“몇 년 전에 결혼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어. 못 가봐서 미안하다.”

“뭘, 오빠가 오는 것도 좀··· 그렇잖아.”

오세영.

대학 시절 내 후배였고, 몇 개월 정도 교제를 한 사이.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연애 경험 중 한 손가락이 바로 그녀다.

오세영은 신입생 때부터 근 2년간을 나를 졸졸 따라다녔다.

어린 나이에 걸맞지 않게 그때부터 화려한 것만을 좋아했던 그녀다.

당연히 나와는 결이 맞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계속 고백을 거절했었다.

어느 날인가 오세영이 술에 취해 울면서 내 자취방 앞까지 찾아온 적이 있었다.

나를 이렇게 좋아하는데 왜 자꾸 자기를 비참하게 만드냐는 거였다.

우리는 너무 다른 사람이라 절대 잘 될 수 없을 거라는 내 말에도 그녀는 막무가내였다.

결국 어리석은 선택이 될 줄 알면서도 그녀의 마음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과거에나 지금에나 내 예감은 몹시나 잘 들어맞는 편이었다.

“오빠. 난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 내가 사람을 잘 못 본 것 같네.”

사귀면서 자연스럽게 선후배 사이일 때는 알 수 없었던 내 상황에 대해 알게 된 오세영.

나를 향한 뜨겁던 마음이 어디로 갔는지 그녀는 급속도로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너는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없다는 오세영의 마지막 말.

나는 그 말에서 어떤 모멸감 같은 것을 느꼈었다.

그녀와 헤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대학을 졸업했고, 몇 년이 흘러 그녀가 자기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남자와 결혼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지금도 오세영의 눈은 내 얼굴이 아닌 손목의 로렉*와 손에 들린 벤* 차 키를 향하고 있었다.

“와, 오빠 성공했나 보네. 지금은 무슨 일하고 있어?”

“뭐, 이래저래.”

“혼자 온 거야?”

“그래. 아무튼 만나서 반가웠다. 난 가볼게.”

당연한 소리지만 그녀와 오래 말을 섞을 생각이 없었다.

나는 쓸데없이 이것저것 물어오는 오세영의 말을 잘라냈다.

그때,

“여보, 이분은 누구야?”

한 남성이 나와 오세영, 두 사람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작은 키에 푹 퍼진 몸매. 불안하고 조악해 보이는 인상.

그가 오세영의 남편이라는 건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그는 대뜸 짧은 팔을 들어 오세영의 어깨를 꽉 잡았다.

마치 자기 것을 누가 뺏어가기라도 한다는 양.

“아, 자기야. 이쪽은 나 대학교 때 선배야. 오빠, 여기는 우리 남편.”

“안녕하세요. 한영수라고 합니다.”

“··· 인물 정말 좋으시네. 저는 박용호라고 합니다. 중고차 사업하고 있어요.”

박용호는 묻지도 않은 자신의 직업을 밝히며 내게 명함을 건넸다.

“우리 와이프 대학교 선배시라니, 차 바꾸실 일 있으면 연락주세요. 내가 잘 해드릴 테니까.”

그는 호탕한 척 크게 하하 웃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아이가 어른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한 웃음이었다.

인상부터 남자다움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자다.

“예. 그럼 저는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좋은 시간 되세요.”

이런 어색하고 불편한 상황을 내가 굳이 참고 격식을 차려야 할 이유가 없다.

나는 오세영과 그녀의 남편에게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자리를 벗어났다.

*

“김부각 안에 한우 불고기와 송로버섯이 들어가 있는 저희 식당의 시그니처 김밥입니다.”

이 식당의 시그니쳐 메뉴는 코스 요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종업원은 고급스러운 식기에 담은 음식들을 하나씩 가져다주며 친절하게 재료와 조리법에 대해 일일이 설명해 주었다.

지금 나온 메뉴는 김밥.

누군가 들으면 고작 김밥이냐 싶겠지만, 단품으로 주문한다면 한 줄에 무려 만육천 원.

혀를 내두를 가격이다.

돈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전체적으로 만족스럽고 훌륭한 식사였다.

육지와 바다의 맛을 고르게 느낄 수 있는 구성이었다.

유명 쉐프가 운영한다는 식당답게 플레이팅도 훌륭해 눈으로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다.

여기에 화룡점정은 마지막으로 나온 돌하르방 모양의 디저트 케이크였다.

“뭐야, 이거 너무 귀엽잖아.”

그렇게 차마 바로 먹기가 아쉬워 휴대전화를 들어 디저트의 사진을 찍고 있을 때.

“아니, 여기서 또 보네요. 아까 성함이··· 영수 씨라고 했나?”

하아,

목소리를 듣자마자 훌륭한 식사에 좋아졌던 기분이 뭉개지기 시작했다.

한 번이면 족하지, 두 번이나 불쾌한 우연이 일어난단 말인가.

고개를 들자 내 앞에 빙글빙글 웃고 있는 박용호와 잔뜩 굳어있는 얼굴의 오세영이 서 있었다.

제주도에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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