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행복해지거라, 영수야 (1)
여행이라도 다니겠다는 한가로운 생각은 나의 순진한 오판이었다.
내 사업을 준비한다는 것은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특히나 경험이 전혀 없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더더욱.
돈이 있다고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미국 현지에서 머신들이 제작되는 동안 나도 무척이나 바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보낼 수밖에 없었다.’
제일 먼저 걸림돌이 된 것은 자격의 문제.
세상의 모든 일이 그렇듯이 헬스장을 창업하는데도 자격이 필요했다.
체육시설업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생활 스포츠지도사 자격증이 있어야 했다.
다니던 센터에서 트레이너 이종탁이 그렇게 나보고 따라고 노래를 부르던 바로 그 자격증.
어쩌랴.
울며 겨자 먹기로 팔자에도 없는 인터넷 강의까지 들어야 했다.
나름 운동경력이 밑거름이 되어 실기는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필기.
필기시험이 불과 2주도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밤잠까지 줄여가며 준비했다.
다행히 결과는 필기와 실기 모두 합격.
그 후로 건물 안전성 검사도 다시 받고, 시청에 서류도 제출하고···
크게는 로커부터 작게는 운동복, 수건 따위의 구매까지 모든 일을 다 나 혼자서 처리했다.
정말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어찌 보면 회사생활을 할 때보다 훨씬 더 바빴지만, 그래도 기뻤다.
오히려 실내장식은 처리하기 쉬운 축에 속했다.
내가 생각한 내부는 바닥과 천장에 콘크리트가 그대로 노출되는 러프한 디자인.
견적을 보러 다니던 중 만난 한 업체의 사장은 나처럼 쇠질 마니아였고, 내 의도를 너무나도 잘 이해해주었다.
사장과 운동 이야기로 대동단결하며 친밀감을 쌓았고, 실험적인 도전정신을 높게 산 업체 사장은 섭섭하지 않은 가격으로 견적을 책정해 주었다.
센터 건물 아래층에는 피시방이 입점해있었다.
다행히 위층에서 소음이 나도 크게 방해받지 않는 업종이지만, 그래도 두꺼운 고무매트로 층간소음을 최대한 줄이려고 노력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사업자등록서류에 상호를 써놓는 순간은 퍽 가슴 벅찬 순간이었다.
내가 선택한 센터의 이름은 ‘자애 GYM’
이름의 연유야 물을 것도 없이 자애 보육원에서 따온 것.
하지만 나의 헬스장은 그 이름과 달리 절대 자애롭지 않은 공간이 되리라.
이승우의 가게 준비는 상대적으로 나보다 빠르게 진행되었다.
내가 미국 현지에서 넘어올 기구들을 기다리는 동안 승우는 이미 간판을 올리고 모든 오픈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와! 탕수육이다!”
“얘들아, 많이 먹어.”
“누나, 짜장면 진짜 맛있어요.”
“그래? 먹고 부족하면 누나한테 말해. 알겠지?”
오픈을 이틀 앞둔 날, 이승우는 특별한 손님들을 초대했다.
그는 버스를 대절해 차호영 신부님과 자애 보육원의 아이들을 가게로 초대했다.
비록 피가 이어진 사이는 아니지만, 가족 같은 사람들에게 새 출발을 축하받고 싶은 승우의 기분은 충분히 이해되었다.
이승우의 손은 주방에서 쉼 없이 움직였고, 승우의 여자친구인 은주는 주방에서 나온 음식들을 바쁘게 날랐다.
입에 짜장을 잔뜩 묻힌 아이들은 오늘이 생일인 듯 하나같이 즐거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도, 신부님도, 승우와 그의 여자친구도, 아이들도.
오늘 이곳 ‘만리향’에 있는 누구 하나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나는 차호영 신부님과 둘이서 따로 자리를 잡고 마주 앉아있었다.
우리 둘은 아이들이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아이들이 너무 좋아하네요.”
“그러게나 말이다. 고놈들 누가 보면 내가 며칠은 굶긴 줄 알겠구나.”
차호영 신부님은 너털웃음을 지으셨다.
이런 게 진짜 성공이고 행복이지.
밤거리를 휘청거리며 수백, 수천만 원을 뿌리고 다녀봐야 뭘 하겠는가.
사치와 향락에서는 결코 이런 충만함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그나저나 영수, 네가 먼저 말하지 않기에 캐묻지 않았지만.”
신부님 앞에 놓여있는 짬뽕 그릇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어쩐 일인지 신부님은 젓가락부터 집지 않으시고 나에게 말을 거셨다.
“승우한테 듣기로는 네가 로또에 당첨되었다고. 그래서 건물을 샀다고.”
나는 그저 어설프게 웃기만 했다.
차마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었다.
“··· 그래. 알겠다.”
신부님은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셨다.
“승우는 네게 동기간이나 다름없지 않니. 제일 먼저 네 친구부터 챙긴 것은 정말 잘한 일이다.”
신부님은 주름진 손을 들어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내 손을 부드럽게 감싸셨다.
품고 계신 마음만큼이나 따듯한 당신의 체온이 그대로 나에게 전해졌다.
“아니, 안 잡수시고 뭐 하세요. 면 다 불어요.”
이승우였다.
승우는 손으로 이마를 훔치며 우리 테이블의 빈자리에 와서 앉았다.
녀석은 새로 맞춘 새하얀 조리복을 입고 있었다. 세상 행복한 얼굴을 하고선.
그 모습을 보자 차호영 신부님의 눈가가 붉어지기 시작했다.
“에? 신부님, 뭐에요. 좋은 날에 왜 우시려고 그래요.”
지는···
가게 앞에서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던 이승우의 모습이 생각나 절로 웃음이 나왔다.
“신부님이 나이를 많이 잡수시더니 눈물이 많아지셨어. 내가 저번에 집에 갔을 때도 그렇게 우시더라고.”
“아이고! 호랑이 신부님이 무슨 일이래?”
“··· 요 녀석들이. 너희도 늙어봐라.”
신부님은 테이블 위에 냅킨을 하나 집어 들곤 눈가를 닦아내셨다.
“승우 네가 좀 내 속을 썩였니. 누가 돈 벌어오라고 시킨 것도 아닌데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어려서부터 일만 하고.”
“그냥 세상을 일찍 배운 거거든요. 공부보단 그게 적성에 더 잘 맞았어요.”
이승우는 툴툴대면서도 젓가락을 들어 신부님의 손에 꼭 쥐어 드렸다.
“너랑 영수 두 녀석이 항상 붙어 다녀도 영수, 저놈이야 똑 부러진 아이지만 승우 너는 혹시라도 학교 밖을 헤매다 나쁜 길에 빠지진 않을까 항상 걱정이었어.”
“이거 봐, 오늘도 영수가 주인공이지.”
“그래요. 신부님, 오늘의 주인공은 승우가 맞죠. 신부님이 모르셔서 그렇지, 승우 쟤가 저보다 훨씬 건실하다니까요.”
신부님은 두 친구의 협공에 속절없이 두 손을 들며 항복 선언을 하셨다.
“암. 그렇고말고. 이 신부님이 눈치 없이 주책이다. 내가 승우가 너무 대견해서 그래.”
“빨리 드셔나 보세요.”
“그래. 어디 한번 맛 좀 보자.”
신부님은 수저로 짬뽕 국물을 한술 뜨곤, 젓가락을 후루룩 면을 건져 드셨다.
이승우는 사뭇 긴장된 얼굴로 신부님을 바라보았다.
공식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걸고하는 가게에서 처음으로 듣는 손님의 평가.
“승우야.”
“예. 어떠세요? 입에 좀 맞으세요?”
차호영 신부님의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하게 잡혔다.
신부님의 역사가 담겨있는 주름은 얼굴을 더욱 온화하게 만들었다.
“세상에 태어나서 먹어본 짬뽕 중에 제일 맛있구나.”
“에이, 거짓말하지 마세요. 저 기분 좋아지라고 괜히 하시는 말씀이죠?”
“아니야. 나도 마냥 맛있다 칭찬할 생각 없었다. 맛은 객관적으로 보려고 했어. 그게 너한테 도움이 될 테니. 예전에 전국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짬뽕집도 가봤지만, 거기보다 승우 네 것이 훨씬 낫구나.”
이승우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마치 세상이라도 다 얻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렇죠? 전 짬뽕다시를 안 쓰고 직접 육수 뽑았거든요. 시간은 훨씬 오래 걸리지만 내 가게가 생기면 꼭 그렇게 해보고 싶었어요. 맛의 깊이가 완전히 다르거든요. 그리고···”
신부님의 칭찬에 의기양양해진 이승우는 짬뽕 맛의 비법에 대해 열강을 시작했다.
그래.
이승우의 노력은 큰 칭찬을 받아 마땅했다.
가게 개점을 며칠 앞에 두고부터는 아예 새벽 네 시에 일어나는 녀석이었다.
은주가 힘들어 죽겠다고 내게 볼멘소리를 할 정도였다.
“그래. 정말 맛있구나··· 우리 승우가 얼마나 노력을 많이 했을까···”
우리의 울보 신부님은 또 감정이 북받치시는지 말끝이 바람 앞의 갈대처럼 흔들렸다.
“야. 너 좀 쉬엄쉬엄해. 너무 맛있게 했다가 센터 회원들 운동 끝나고 너희 가게로 달려갈라.”
나는 일부러 더 쾌활한 목소리로 이승우에게 말했다.
“야, 신부님 앞에서 욕을 할 수도 없고. 내가 건물주님의 걱정까지 해야겠냐. 다 와서 먹고 가라고 해. 너희 회원들 오면 특별히 고단백으로 식사 내보내 줄 테니까.”
핑퐁 치듯 농담을 능숙하게 받은 이승우는 고개를 들더니 아이들이 모여 앉아 먹고 있는 식사 테이블 쪽을 훑었다.
“고놈들 잘도 먹네. 신부님 앉아서 영수랑 천천히 드세요. 애들 먹을 것 좀 더 준비해야겠어요.”
이승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방 쪽으로 잰걸음을 옮겼다.
“승우가 실력이 제법이죠. 잘해요. 쟤.”
“그래. 정말 깜짝 놀랐다. 진작에 승우가 일하는 곳이라도 한번 찾아가 봤어야 하는데. 내가 죄가 이렇게 커.”
바쁘셔서 시간을 낼 수가 없으셨겠지.
아이들을 돌보느라 정작 자기 자신도 돌볼 틈이 없는 신부님을 잘 알고 있다.
“얘들아, 모자란 거 말해! 응? 뭐 달라고?”
신부님은 앞치마를 둘러메고 보육원 아이들의 주문을 받는 은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 아가씨가 승우 여자친구니?”
“예. 참 괜찮은 친구예요.”
“그래. 정말 그래 보이는구나. 씩씩해 보여. 승우에게 큰 힘이 되겠구나.”
식사는 계속 이어졌다.
신부님은 승우가 한 상 가득 차린 음식들을 빠짐없이 맛보셨다.
“요즘 소화도 잘 안 되신다면서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니에요?”
“아니야. 그 어떤 음식보다 감사한 것인데 남겨서는 안 되지. 영수 너도 마저 깨끗하게 먹어라.”
말을 마친 신부님은 잠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셨다.
“왜요? 제 얼굴에 뭐 묻었나요?”
“영수야.”
“네. 말씀하세요.”
신부님의 목소리는 어린 시절 나를 꾸짖으시던 때처럼 무거워져 있었다.
역시나.
아까부터 뭔가 나에게 하실 말씀이 있는 기색이었다.
“··· 최근에 누가 5억이라는 큰돈을 후원했더구나.”
“그래요?”
행동을 꾸며내는 것엔 그다지 소질이 있는 편은 아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양 최대한 눈을 크게 뜨고 놀란 척을 했다.
“처음 보는 엄청난 액수의 돈에 잠시 아찔하더구나. 오직 하느님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이 이 종복의 몫이라고 그렇게 다짐하며 살아왔는데 아직도 미혹에 흔들리는구나 싶었다.”
“아무리 신부님이라고 땅에 발 안 대고 사시나요. 세상 사는 데 돈 필요한 건 당연하지. 그나저나 누군지 몰라도 정말 배포가 큰 후원자네요. 정말 잘됐다. 아이들을 위해 쓰시면 되겠네요. 신부님도 그 돈으로 좀 편안하게 사시고···”
신부님은 짧은 한숨을 내뱉으셨다.
“이 신부님이 이제 눈과 귀가 모두 어두워졌지만, 아직 머리는 살아있다. 내 짐작은 했지만, 이제 확실히 알겠구나.”
신부님의 목소리에는 어떤 망설임이 짙게 묻어있었다.
쉽게 꺼내지 않은 말이었기에 그 울림도 결코 가볍지 않았다.
“··· 영수야 이리 큰돈을 어찌 보냈느냐.”
행복해지거라, 영수야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