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태상의 회장들 (2)
통칭 재벌계의 이단아로 불리는 장은호.
짧은 유학 생활 후 태상 그룹의 현장에 바로 진출했던 장은수, 장은우 두 남매와는 다른 성장 환경을 겪은 그다.
장은호는 10대 시절부터 30살 초반이 되기까지 미국에서 계속 생활했었다.
젊은 시절 장발에 할리 데이비드슨을 몰며 미 국토를 여행 다니던 자유분방함이 장은호의 상징적인 이미지기도 했다.
특히나 세간에 회자가 되었던 건 장은호의 결혼.
그의 아내는 유학 시절에 만난 평범한 가정의 딸이었다.
언론은 신데렐라 스토리라며 장은호의 연애에서 결혼까지 이르는 사연을 연일 대서특필했었다.
장영복 회장은 아들이 선택한 배우자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입을 다물었다.
많은 사람의 관심과 우려에도 불구하고 장은호는 자기 아내와 행복한 가정생활을 계속 이어갔다.
그 점은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의 위자료를 걸고 이혼 소송을 진행했던 그의 형 장은수와 무척이나 대비되는 것이었다.
한국에 귀국한 뒤에도 조용히 잠룡의 행보를 걷던 장은호가 태상에 이름을 새긴 것은 38살이 되었을 때였다.
본사의 전략본부장이라는 직함을 달게 된 장은호는 몇 년간 태상의 글로벌 마케팅에 큰 공을 세우고, 태상 자동차의 회장 자리에 앉게 되었다.
“형이 태상을 자신의 왕국으로 만들려는 모습을 보면 그거야말로 무덤에 있던 아버지가 벌떡 일어날 일 아닐까?”
“발인 이후로 처음 보는 거지? 오랜만에 보는 형에게 그게 할 말인가?”
“오늘은 형, 동생 사이가 아니라 회장단의 일원으로 만난 거니까.”
“넌 미국에서 한량처럼 살았으니 잘 모르겠지. 이 나라, 그리고 태상은 원래 그런 곳이야. 이 거대한 기업을 통솔하기 위해선 강력한 리더가 필요해. 마치 아버지처럼. 넌 아버지를 잘 모르잖아.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았고.”
“인간으로서 아버지에 대해선 난 할 말 없어. 어머니 돌아가시고 미국 생활 시작한 뒤론 1년에 얼굴 2, 3번 볼까 말까였으니까. 그런데 그건 형도 마찬가지 아니야? 오히려 나보다 아버지를 더 싫어했던 건 형인 것 같은데··· 나는 최소한 기업인으로서 아버지는 존경하고 있다고.”
자리에 그대로 앉은 채 서로를 마주 보는 형제.
둘 사이엔 살풍경한 긴장감이 돌고 있었다.
“회장단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누구나 태상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하다니··· 지금 네 위치를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거 아니야? 입을 무겁게 해라. 태상의 총수는 오로지 피로서 자격이 있는 사람만 앉을 수 있어. 장씨의 가업이라고.”
“가업이 아니라 형의 개인 소유물이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야? 아버지의 색깔 지우기에만 몰두하는 형이 진심으로 걱정되어서 하는 말이야.”
쾅━
장은수는 회의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나한테 비토(Veto)만 던지는 늙은이들 갈아치운 것뿐이야. 지휘자 주변에는 오직 그 지휘를 따라올 수 있는 훌륭한 연주자들만이 필요해. 지휘자의 지휘를 따르지 않는 공연은 그저 소음에 지나지 않지.”
장은수의 말에 웃는 얼굴로 여유를 잃지 않던 장은호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
“그게 무슨 파시스트 같은 소리야. 태상을 여기까지 오게 만든 건 아버지도, 사장이니 회장이니 불리는 회사의 높은 사람들도··· 더더욱 형도 아니야. 묵묵히 제 몫을 하는 평범한 직원들이 모여서 만든 거라고.”
하하하하━
회의실에 장은수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명백한 조소였다.
“가소롭고 순진한 말이구나. 회장이 아니라 노조 위원장을 해야겠는걸? 헛소리하지 말고 진짜 원하는 걸 말해봐. 넌 뭘 원하는데?”
“형이 날 뭐라고 생각해도 좋아. 하지만 형의 생각보다 난 태상을 훨씬 아끼고 있어. 그래. 그 뜻에 전부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형 말대로 이건 가업이니까. 내가 원하는 건 하나뿐이야. 태상이 세계 시장에서 최고가 되는 것.”
“그렇다면 우린 같은 그림을 그리고 있군.”
“하지만 서로 다른 물감을 쓰는 것 같고.”
장은호는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의실을 나가려는 장은호의 뒤통수에 대고 장은수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잊지 마. 살아생전에 날 태상 건설 회장 자리에 앉힌 건 바로 아버지니까.”
회의실 문고리를 잡고 있던 장은호가 등을 돌렸다.
“그래. 그리고 그 자리에서 다시 끌어내리려던 것도 아버지였지. 살아생전에 말이야. 아버지가 한 달만 더 살아계셨더라도 어떻게 되었을까? 참 묘한 시기에 작고하셨어.”
“미친 소리를 하는구나.”
“··· 다음 달에 우리 딸 연극제가 있어. 바쁘겠지만 시간 되면 한 번 와줘. 적어도 아이들에겐 우리가 가족이 있다는 걸 상기시켜줘야지.”
*
“황 실장 들어오라고 해.”
장은수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자신의 비서실장을 호출했다.
수화기를 내려놓기가 무섭게 집무실 바깥쪽에서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들어와.”
“회장님. 부르셨습니까.”
무표정한 얼굴의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와 허리를 깊게 숙였다.
톡톡━
장은수는 자신의 비서실장의 인사에 별다른 반응 없이 한동안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들겼다.
“감사실은 작업 다 끝나있지?”
“예. 회장님. 말씀하신 대로 전부 조치해 놓았습니다.”
“태상 중공업부터 뒤집어엎어. 회계장부 숫자 하나하나 전부 모두.”
“회장님.”
황 실장은 장은수의 말이 끝나자 두 손을 앞으로 모은 공손한 자세로 대답했다.
“속도를 좀 늦추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직도 태상 곳곳에는 선대의 영향력이 남아있습니다.”
황 실장의 말을 듣곤 장은수는 긴 팔 와이셔츠의 소매를 걷어붙였다.
그의 마른 팔뚝에는 푸른 핏줄이 돋아나 있었다.
안락한 집무실 의자에서 일어난 장은수는 황 실장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장은수의 구두 굽 소리가 조용한 집무실 안에 울려 퍼졌다.
짝━
장은수는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손바닥으로 황 실장의 뺨을 올려 쳤다.
엉겁결에 뺨을 얻어맞은 황 실장은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니라는 듯 눈조차 깜빡이지 않았다.
“황 실장. 보잘것없는 학력에 배경도 줄도 없는 당신이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지?”
“회장님께서 아껴주신 덕분입니다.”
“내가 왜 황 실장을 아끼고 있지?”
“짖으라면 짖고, 물라면 물기 때문입니다.”
“그래. 나는 황 실장이 자기 분수를 아는 게 참 좋아.”
답변이 마음에 들었는지 장은수는 음산하게 흐흐 웃기 시작했다.
“지금이 아니면 그 아버지의 영향력, 절대 못 잡아. 정신 못 차리고 있을 때 불도저처럼 밀어버리고 새 판을 짜야지. 안 그래?”
“말씀 따르겠습니다.”
장은수는 뺨을 때렸던 그 손으로 황 실장의 목덜미를 두어 번 툭툭 쳤다.
“황 실장, 내 뒤 닦아주느라고 고생 정말 많잖아. 언제까지 음지에서 일할 거야. 이제 어깨 쫙 펴고 큰일을 해야지.”
“감사합니다. 회장님.”
“유산 정리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
“용인과 대치동의 땅을 매각했습니다. 태상 전자와 태상 물산의 주식 일부를 담보로 대출도 진행 중입니다. 전체적으로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장영복 회장이 장은수에게 남긴 유산은 물경 12조.
그 상속세만 해도 한 나라의 곳간을 따뜻하게 채우기에 충분했다.
장은수는 모든 상속 절차가 마무리되면 태상 건설의 지분을 사들이는데 전력을 쏟을 예정이었다.
아무도 함부로 말을 꺼내지 못하도록 힘으로 찍어누를 생각이었다.
“그래. 알겠어.”
“예. 회장님, 내리실 말씀 없으면 나가 보겠습니다.”
“··· 잠깐.”
장은수는 집무실을 나가려는 황 실장을 불러세웠다.
“걔는 뭐 하고 있어?”
“누구 말씀이십니까?”
“철수인지 영수인지 사생아 새끼 말이야.”
“최근에 경기도에 건물을 하나 샀다고 합니다.”
“건물?”
장은수의 입에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벼락횡재를 맞더니 졸부라도 된 기분인가 보군. 그리고?”
“그 건물에 사업자등록을 신청했습니다. 체육시설업인데 헬스장을 차리려는 모양입니다.”
그 말을 들자 썩소를 짓고 있던 장은수의 입이 크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한 편의 부조리극처럼 기이한 장면이었다.
한 남자는 배를 잡고 웃고 있고, 다른 이는 돌이라도 된 듯 잔뜩 굳어 서 있는.
“그거 재밌는 새끼네. 헬스장? 하하하━ 멍청한 놈인 거야, 아니면 엄청나게 똑똑한 놈인 거야.”
“추가로 조치가 필요하겠습니까?”
황 실장의 말에 웃고 있던 장은수의 표정이 급변했다.
“이봐, 황 실장. 뭘 그렇게 천박하게 말해. 누가 들으면 내가 조직폭력배 두목이라도 된 줄 알겠어.”
“죄송합니다.”
“고윤아는? 아직도 그 사생아 옆에 붙어있나?”
“예. 건물 등기 신청도 고윤아 변호사가 함께 한 거로 확인이 되었습니다.”
‘아주 코미디가 따로 없군.’
아버지 옆에 붙어 건방을 떨던 고윤아가 등기소나 들락날락하고 있을 생각을 하니 회장단 회의에서 불쾌했던 기분이 모두 풀어지는 것 같은 장은수였다.
“동향만 가끔 확인해. 괜히 나서서 피곤할 일 만들지 말고. 그깟 변호사 하나 붙어있다고 뭘 하겠냐마는 독한 데가 있는 년이니까 자칫 귀찮아 질 수도 있어.”
“알겠습니다.”
“그래. 나가봐.”
황 실장이 나가고 장은수는 다시 집무실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태상의 총재를 2년 뒤에 결정하라는 첫 번째 유서를 보았을 때 장은수는 참을 수 없이 분노했었다.
그리고,
고윤아가 형제만을 따로 불러 밝힌 두 번째 유서의 내용을 듣고선 그는 일종의 해방감을 느꼈다.
‘숨겨둔 자식이 있었다고?’
기업인으로서 장영복 회장은 결단력과 카리스마를 모두 갖춘 신화 같은 존재였다.
장은수에게 있어 그런 장영복 회장은 경외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장영복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 장은수는 늘 몸을 낮췄어야 했다.
그가 장 회장의 뜻을 어기고 독단적인 행동을 한 것은 단 한 번.
태상 건설의 회장 취임 후 하청 업체들을 전부 다 물갈이했을 때였다.
오랜 거래처들을 일순간에 손절해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장영복 회장은 극대노를 했고, 장은수는 합리적인 선택이었다며 맞받아쳤었다.
어쨌든, 유서의 내용을 알게 된 뒤로 더 이상 장은수에게 아버지는 신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아버지도 결국 인간이었을 뿐이야. 자기 욕정 하나조차 제대로 통제 못 한.’
어느 때도 느껴보지 못한 자유로움이었다.
그리고 그 자유로움은 장은수에게 자신감을 가져다주었다.
장은수는 다시 집무실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들기기 시작했다.
생각에 잠길 때면 나오는 그의 버릇.
‘천억이라. 그래, 사생아 따위에게 개값으로 주기에는 적당한 돈이지. 그래도 입 다물고 조용히 사는 것 보니까 제 분수는 아는 놈이군.’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난 자신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자신하는 장은수였다.
장은우야 지금 하는 백화점 사업에 작은 거 하나 더 끼워주면 만족할 것이고, 태상 내에 지지기반이 없는 장은호는 아무리 까불어봐야 찻잔 속 태풍일 뿐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장은수는 옷걸이에 걸려있는 슈트의 상의를 걸쳐 입었다.
모두 다 내 것이다.
태상도 세상도.
장은수는 집무실 문을 열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마치 왕과 같은 당당한 걸음걸이로.
행복해지거라, 영수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