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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억을 상속받았다-28화 (28/200)

28. 8월의 복숭아

“선생님. 필요한 서류접수는 모두 끝났습니다. 등기신청 교합 완료는 내일 중으로, 등기필증은 3, 4일 안에 수령 받으실 수 있으실 겁니다.”

등기소의 공무원은 다소 심심한 말투로 송림프라자가 나, 한영수의 것이 되었음을 알려주었다.

마침내.

담당 공무원의 사무적인 태도와는 별개로 지금 이 순간 내 기분은 그 어느 때보다 들떠 있었다.

부동산이라면 이미 압구정에 문산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었지만, 송림프라자는 내 두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가며 직접 고른 것이다.

소유에서 비롯된 충만감이 나를 고양시켰다.

더욱이 그 건물은 나와 둘도 없는 친구가 새로운 인생과 사업을 시작하게 될 터전이 아닌가.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아랫배가 사정없이 근질거렸다.

“영수 님. 축하드립니다.”

등기소까지 같이 온 고윤아의 말이었다.

사실 고윤아가 옆에서 모든 절차와 서류를 챙겨주었기에 송림 프라자의 소유권이전 등기 신청은 어려울 것도 없었다.

바쁜 시간을 쪼개 내 일을 도와준 그녀에게 그저 미안하고 또 고마울 뿐.

고윤아와는 오늘 등기 작업을 끝마치고 일전에 약속했던 식사까지 내친김에 다 해결해버리기로 했다.

“오늘 변호사님이 밥을 산다고 하셨지만, 제 양심이 그래서는 안된다고 말하네요. 제가 사겠습니다.”

등기소에서 나와 그녀와 어깨를 나란히 걸으며 말했다.

고윤아는 작은 입을 벌려 뭐라 대답하려 했고,

“안 됩니다.”

그녀가 뭐라 말할지 뻔히 알고 있는 나는 선수를 쳤다.

“··· 알겠습니다. 다음엔 꼭 제가 사겠습니다. 다음이란 말이 나쁘지 않습니다. ··· 영수 님과 식사를 한 번 더 할 수 있겠군요.”

고윤아는 못이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히 드시고 싶은 게 있습니까? 메뉴만 말씀해주시면 이쪽은 제가 아는 동네니까 안내할게요.”

“영수 님. 그럼 오늘은 저와 술 한 잔 어떻습니까?”

술?

고윤아의 입에서 예상치 못했던 말이 나왔다.

“오늘은 축하주를 들어야 하지 않습니까. 기쁜 날이니까요.”

영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고윤아와 헤어지게 되면 집에 가서 혼자만의 작은 파티라도 열까 생각 중이었다.

그래. 편의점에서 맥주사서 혼자 깔짝이는 것보단 둘이 낫지.

“저야 괜찮은데, 변호사님은 술 좋아하세요?”

“술자리를 즐기는 편은 아닙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술이 약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미국 유학 시절에는 독한 버번위스키도 곧잘 마셨습니다.”

고윤아는 술이라면 꽤 자신이 있다는 듯한 말투였다.

“그럼··· 제가 자주 가는 곳이 있는데 거기로 갈까요? 저번 청담 바처럼 고급스러운 곳은 아닙니다만.”

“영수 님이 괜찮다면 저는 어느 곳이든 좋습니다.”

*

“오, 영수!”

동표 포차.

생각해보면 김영하, 최예리와 함께 여기서 술잔을 나눴던 게 시간 속에 낡아버린 역사처럼 아주 오래전 일인 것만 같다.

그 술자리가 있었던 다음날 고윤아를 만났고, 그 이후로 나의 세상은 너무나 많은 것이 변해버렸다.

동표 포차의 털보 사장은 두툼하게 살이 올라와 있는 두 팔을 흔들며 나를 반겼다.

“사장님. 저 왔어요.”

“그래. 우리 가게 VIP께서 영 얼굴을 안 비추시길래, 이제는 진짜 장사 접어야 하나 싶던 판이다.”

“영하는요. 김 주임은 최근에 안 왔었어요?”

“응. 영하도 저번에 너랑 직장 후배라는 아가씨랑 셋이 왔을 때가 마지막이었지?”

그렇구나.

내가 퇴사한 이후로 김영하도 동표 포차를 더 이상 찾지 않은 모양.

녀석. 잘하고 있을까?

언젠가 영하와도 선후배가 아닌 형 동생으로 다시 한번 여기서 볼 날이 있겠지.

털보 사장은 나에게 바짝 다가와선 귀에 대고 속삭였다.

“둘이네? 그런데 이런 누추한 곳에 저런 미인을 데리고 오면 어떡하냐. 어디 분위기 좋은 데나 가지.”

“사장님. 저한테는 여기가 좋은 곳이에요.”

“아이고, 그것 참 감동적이네요. 그나저나 이번엔 맞지? 진짜 여자친구지? 선남선녀가 따로 없네.”

“아니에요. 그런 거.”

“영수 너는 뭐 맨날 아니라고 하냐. 가서 앉아있어.”

내게 귓속말을 한 털보 사장은 내 등을 떠밀곤 고윤아에게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자주 오시는 곳인가 봅니다. 여기오니 대학생 시절이 생각납니다.”

고윤아는 자리에 앉고선 나에게 말했다.

눈빛으로 주변을 더듬는 게 그녀는 정말 자신의 20대 초반 그 시절의 향수를 떠올리는 것 같았다.

“회사 다닐 때 종종 왔던 곳입니다. 개인적으로 여기서 많은 애환을 쏟아냈더랬죠. 일단 시끄러운 사람들의 소음이 없어서 좋기도 하고. 사실 고 변호사님이 우리 집에 오기 전날도 여기서 한잔했었죠.”

“그렇군요. 영수 님에게 의미 있는 곳을 데려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주 한번 보세요. 저 사장님이 생긴 건 우락부락 이어도 음식 솜씨는 기가 막혀요. 술은 뭐가 좋으세요? 아쉽지만 여긴 위스키는 안 팝니다.”

*

고윤아는 내비쳤던 자신감에 비해 술은 영 약골이었다.

소주 예닐곱 잔이나 먹었을까, 겨우 1병을 채 다 못 마셨는데도 그녀는 몸이 슬슬 흔들리기 시작했다.

좌우로 움직이는 몸의 균형을 잡으려 그녀는 두 팔꿈치를 테이블에 대고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 탓에 티셔츠 안에 숨겨져 있던 목걸이가 밖으로 빠져나왔다.

내가 일전에 선물해주었던 바로 그 목걸이.

그래도 잊지 않고 하고 다닌다니 선물해 준 사람으로서 고맙게 느껴졌다.

취기는 우리 두 사람을 인간적으로 좀 더 가깝게 만들어주었다.

하긴,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의 위치에 있던 기업인의 비밀을 공유하는 우리 둘.

그걸 생각하면 고윤아와 나는 생각보다 제법 끈끈한 사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외따로 떨어진 섬에 살고 있던 두 사람.

그 둘 앞에 유언이라는 이름의 물길이 열렸고, 거길 지나 우리는 서로에게 닿게 된 것이다.

“··· 정말로요?”

“예. 모두가 가망 없는 재판이라고 했지만 끈질기게 위법수집증거로 검사를 압박했습니다. 판결은 무죄였습니다. 정말 짜릿한 뒤집기였습니다. 진범은 그 후 두 달 뒤에 경찰에 체포되었고요.”

확실히 술이 올라왔는지 고윤아는 평소보다 퍽 수다스러웠다.

우리의 대화는 일정하게 정해진 방향 없이 흘렀다.

탁구를 하듯 누군가 하나의 화제를 던지면 그걸 맞받아치기를 반복하며 고윤아의 재판 이야기까지 오게 되었다.

“그 피고인은 하마터면 억울하게 옥살이를 할 뻔했군요. 고 변호사님을 안 만났다면 말이에요.”

“예. 구체적인 내막까지 전부 다 말씀드리기 곤란합니다만··· 사실 로펌에서는 꺼렸던 사건입니다. 변호사가 감으로 결론을 내려서는 절대 안 되지만, 그땐 뭔가 확신이 왔었습니다. 이 사람은 죄가 없다고. 부끄럽지만 그 재판 덕에 저도 어느 정도 이름값을 높일 수 있었습니다.”

“재판이라는 건 나한테는 너무나 먼 이야기라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만 봤었는데··· 멋지네요.”

그런데 왜일까.

내 칭찬에 외려 고윤아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이 일을 하면서 보람될 때가 많았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사실 제가 상대하는 고객 대부분은 돈이 아주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 고객 중 몇몇은 제 일에 회의감을 들게 만들곤 합니다.“

그녀는 이 말을 하곤 나를 힐끔 바라보았다.

”아, 그렇다고 해서 절대 제가 부자는 나쁘다고 단정 지어서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명백히 내가 오해라도 하지 않을까 염려하는 목소리였다.

··· 대한민국 최상위권 전문직의 눈에도 이제 난 부자의 범주로 들어가는구나.

고윤아의 말은 계속되었다.

“저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떤 고객들은 종종 돈으로 사려고 해선 안 되는 것들을 본인들이 살 수 있다고 착각을 합니다. 어쩔 수 없이 그런 고객들을 변호해야 할 때는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재판에 이겨도 기분이 마냥 좋지 않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은데요.”

고윤아는 조용히 내 말을 기다렸다.

“예를 들어 어떤 부자가 요트 같은 사치품을 산다고 해서 사람들이 손가락질하진 않을 거예요. 요트는 돈으로 살 수 있는 상품이니까. 하지만, 부자가 돈으로 면죄부를 산다면 사람들은 분명히 분노하겠죠? 법이라는 건 돈의 논리로 움직여서는 안 되는 거잖아요.”

“맞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고윤아는 흥분한 목소리로 말하더니 덥석 내 손을 잡았다.

그녀에게서 보기 드문 격한 반응이었다.

“··· 아 죄송합니다. 영수 님이 제가 평소에 가지고 있던 머릿속의 생각을 너무 이해하기 쉽게 비유해주셔서···”

그녀는 내 손을 꼭 붙들어 잡고 있다는 걸 뒤늦게야 알기라도 했다는 듯, 손을 빼 테이블 아래로 수줍게 감췄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몇 마디만 대화를 해보고 바로 알았습니다. 영수 님은 남다른 혜안을 가지고 계십니다.”

“혜안이라니··· 고 변호사님이 그렇게 말하면 날 놀리는 거 같습니다. 대단치 않은 간판의 대학을 나왔고, 세상에 내세울 만한 스펙 하나 없는 게 전데요.”

“아닙니다. 사물과 사람을 보는 안목은 어느 정도는 타고 태어나는 자질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왕적인 풍모라고 할까요. 장 회장님께서도 그런···”

열기 띤 목소리로 말하던 고윤아는 퍼뜩 자기가 뱉은 말에 놀라더니 내게 고개를 숙였다.

“사과드립니다. 제가 그만 큰 말실수를 했습니다.”

피는 못 속인다는 말이 하고 싶었던 걸까?

그녀의 말에 나쁜 의도가 없다는 건 알고 있다.

아니, 오히려 날 칭찬하고 싶었던 거겠지.

내 감정과 별개로 장영복 회장은 그녀에게 은인이자 존경하는 인물이니까.

썩 유쾌하다고 할 수 없는 이야기지만, 그녀의 정중한 사과를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변호사님, 알딸딸 하죠? 말술이실까봐 혼자 긴장했는데. 소주가 버번 위스키를 이겼네.”

뒷말은 못 들은 척 가벼운 농담으로 화제를 돌렸다.

“저는 재미가 없는 사람입니다. 누구보다도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한창 말을 배워야 할 때, 저는 부모님이 아닌 TV뉴스를 보면서 말을 배웠습니다. 오직 뉴스에만 수화가 나왔었거든요. 그래서 지금까지도 말투가 남들과는 조금 다릅니다. 영수 님이 그럼에도 저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시니 너무 흥분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요? 이상하네. 나는 고 변호사님이 참 재밌던데.”

“제가요?”

고윤아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깊고 검은 눈동자는 나에게 어떤 호소라도 하는 것 같았다.

내 착각일까.

나는 그녀의 눈에서 묘한 기대감을 읽을 수 있었다.

“영 차가운 사람처럼 보이다가도 엉뚱한 모습도 보여주고, 화려한 겉모습 속에 어려웠던 시절의 사연도 있고. 이런 반전이 있는 사람이 어떻게 재미가 없을 수가 있어요.”

“그렇군요.”

고윤아가 옅게 미소 지었다.

“변호사님,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요? 저야 얼마든지 시간이 더 있지만, 변호사님은 또 바쁜 내일을 준비하셔야죠.”

“알겠습니다.”

“잠시만요. 일어나시기 전에 이것 좀 봐주시겠어요?”

고윤아에게 보여줄 것이 있었다.

나는 청담에서 그녀가 나와 헤어지기 전 했던 수화를 그대로 따라 했다.

양 손바닥의 세 손가락을 펴고 가슴 앞에서 교차시키는.

그걸 보자 고윤아의 눈이 토끼처럼 동그래졌다.

“··· 어?”

“찾아봤어요. 나한테 수화로 뭐라고 말한 걸까. 그리고 겨우 뜻을 알아냈죠.”

고윤아는 입을 가리고 환하게 웃었다.

취기로 살짝 붉어진 그녀의 얼굴은 마치 8월의 잘 익은 복숭아 같았다.

“예. 영수 님. 저도요. 저도 오늘 즐거웠습니다.”

헬스장을 차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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