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0억을 상속받았다-26화 (26/200)

26. 건물주 한영수

“상가 취득세가 4.6%에 재산세, 등기 비용. 이거 건물 매수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군.”

결단을 내리고 바로 건물주들의 정보를 공유한다는 인터넷 카페에 가입했다.

책, 유튜브, 그리고 웹상에서 정보를 수집해가며 부동산에 관한 공부를 시작했다.

평생 내가 모르던 세상이니, 쉽지만은 않았다.

다행히 나에게는 시간이 많았고, 그 시간을 현명하게 사용했다.

이윽고 내 머리에는 전문가 수준에는 못 미쳐도, 어디 가서 뒤통수를 맞거나 사기는 당하지 않을 만큼의 기본 틀이 잡히기 시작했다.

건물주.

세상 사람들의 동경과 부러움을 사게 만드는 타이틀.

하지만 그 부러움의 이면에는 세나 받으면서 한량같이 속 편하게 사는 사람들이라는 질시가 어느 정도 섞여 있기 마련이다.

나부터도 그렇게 생각했었고.

하지만 알고보니 아무리 돈을 가지고 있어도 건물주가 된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매수에 들어가는 세금에다 매년 내야 하는 재산세는 만만한 액수가 아니었고, 일단 돈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굉장히 신경 쓸 것이 많았다.

기본적인 시설물 관리는 당연하다.

엘리베이터 유지보수며, 계단 청소, 전기 관리, 소방 관리까지 손이 가는 곳이 엄청나게 많았다.

그뿐인가. 여름에는 누수, 겨울에는 동파 걱정.

무엇보다도 건물주들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 임차인과의 분쟁.

단순히 감정싸움으로 그치면 모를까, 법적인 분쟁까지 가서 서로가 피곤해지는 경우가 왕왕 있다고 한다.

건물주 카페의 게시글들도 대부분 그런 사연들을 하소연하고 있었다.

뭐,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네 갑남을녀들의 시선으로 보면 전부 다 배부른 투정으로 들리긴 하지만.

“빌딩 위탁 관리 업체도 있네.”

관련 정보들을 좀 더 찾아보니, 건물주를 대신해서 골치 아픈 모든 일을 대신해주는 회사도 있었다.

고소득의 전문직 건물주들은 거의 업체들을 끼고 있었는데, 나 역시 건물을 사게 되면 계약을 해야겠구나 싶었다.

“이젠 돈보다는 시간이 소중하지.”

건물들의 가격은 세상 사람들의 키만큼이나 천차만별이었다.

수백억을 훌쩍 넘는 강남의 건물부터, 10억 원에도 못 미치는 꼬마빌딩까지.

누가 들으면 좀 재수 없는 소리이긴 하지만, 어쨌든 내가 못 살 건물은 없었다.

일단은 원칙을 정했다.

생활 동선을 바꿀 계획은 당분간 없다.

그래서 내가 사는 곳 인근에서 매물을 찾아보기로 했다.

가격은 최대 50억까지.

헬스장을 차려야 하니 상가에 적당한 크기의 공실도 하나 있어야 할 것이다.

띠리링━

이제는 새로운 취미의 하나가 된 인터넷 부동산 사이트의 매물 구경.

눈이 뻐근해질 정도로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고윤아였다.

“영수 님. 저, 고윤아입니다.”

“변호사님. 오래간만이네요. 잘 지내셨나요?”

“예. 저는 지금 청담입니다. 영수 님을 만났던 곳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영수 님이 생각이 났습니다.”

내가 생각이 났다고.

한영수 출세했네.

방송 출연까지 하는 미녀 변호사가 길 가다 네 생각을 다 해주고.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했습니다.”

“일로요, 아니면 사적으로요.”

장난기가 생겨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 질문을 던졌다.

“일로 저에게 할 말이 있으시다면, 열에 여덟은 좋은 일은 아닐 겁니다. 별 일없이 잘 지내고 있다는 말이 듣고 싶습니다.”

고윤아는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잘 지냅니다. 일본을 좀 다녀왔어요.”

“일본입니까. 어머님께서··· 거기 계시죠?”

내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고윤아가 말했다.

“맞아요. 가기 전에는 많이 고민했었는데, 다녀오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다행입니다.”

“그리고 직장을 그만뒀어요. 공식적으로 백수입니다. 저.”

“앞으로 계획은 있으십니까?”

“건물을 하나 사려고 합니다.”

“그렇군요.”

고윤아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마치 ‘오늘 저녁에 치킨을 시켜 먹을 생각이다’ 따위의 말을 들은 것 같은 평온함이었다.

“그런데 이게 만만치가 않네요. 챙겨야 하는 서류들도 많고. 법무사를 고용하려고요.”

“그럴 필요 없으십니다.”

“··· 예?”

“제가 하겠습니다.”

“에이, 아닙니다.”

대한민국 최고 로펌의 변호사를 부동산 등기 정도의 일에 쓴다니, 그야말로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쓰는 격이다.

“변호사는 법무사 업무도 할 수 있습니다. 때마침 최근에 유치권 분쟁 관련해서 큰 민사 건이 막 끝난 참입니다. 토지나 건물에 관해서 공부 많이 했습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알아보니까 법무사 고용하는데 생각보다 큰돈은 안 들더라고요.”

“쓸데없이 비용을 쓰실 필요 없습니다. 아니면 혹시 영수 님은 제가 미덥지 않으십니까?”

그럴 리가!

내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히든카드가 다름 아닌 바로 그녀인데.

“그런 거 아니에요. 바쁜 분한테 이런 자잘한 일 맡기기가 미안해서 그러죠.”

“저는···”

고윤아는 잠시 말이 없었다.

쌔근쌔근 숨소리만 들리는 게 무슨 말을 하려는지 꽤 신중하게 단어를 고르는 것 같았다.

“··· 영수 님에게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아아···

이렇게까지 말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더 사양을 할 수 있을까.

“알겠습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그리고 조만간에 영수 님과 또 식사하고 싶습니다.”

묘하게 재미있는 고윤아의 화법.

어느새 꾸밈없이 직설적인 그녀의 말투에 적응이 된 나였다.

“좋죠.”

“저번에 영수 님이 사셨으니, 이번엔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아, 그건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제가 고마워서 산 거니까.”

“안 됩니다.”

그녀의 단호함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알겠습니다. 그럼 정말 비싼 걸로 얻어먹어야겠네요.”

*

“사장님. 어떠세요? 역도 가깝고, 대로변이라 입지 조건이 참 좋죠?”

“이게 지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하셨죠?”

“13년도에 완공했으니까 아직 10년 안 되었죠. 그래도 워낙 건물 관리가 잘 되어 있어서 거의 신축이라고 봐도 무방하다니까요.”

정말 좋은 매물이 나왔다는 공인중개사의 연락을 받고 나온 참이다.

공인중개사는 50대 즈음의 중년 여성이었다.

이 여자는 현장에 서류 가방을 든 2명의 보조인까지 대동했다.

얼마 전 그녀가 이 지역에서 굵직한 부동산 거래는 모두 도맡아 하는 큰 손이라는 소문을 듣고 내 발로 사무실을 찾아갔었다.

뭐, 본인 말로는 중개수수료로만 억대가 넘는 소득을 거뜬히 벌어들이고 있다고.

결과적으로 좋은 선택이었다.

액수는 따지지 않겠다는 내 말에 공인중개사는 눈을 빛냈다.

그녀는 하루가 멀다 하고 매물들을 내게 소개해주었다.

공인중개사의 말처럼 오늘 소개받은 건물은 확실히 여태껏 본 것 중에 가장 목 좋은 곳에 서 있었다.

“그럼, 사장님 건물 내부도 보실까요?”

내부도 마음에 들었다.

대리석으로 마감된 건물 바닥은 윤이 나고 있었고, 관리가 자칫 소홀하기 쉬운 비상계단도 흠 잡을 데 없이 깨끗했다.

주차장으로 쓰는 지하 1층과 지상 5층. 도합 6층짜리 건물.

가격은 38억가량.

내가 잡았던 예산 범위로 감당할 만한 수준이다.

“건물주분은 임대 수익으로 월 970을 받으셨어요. 지금은 1층에 상가 하나, 그리고 통으로 쓰는 5층이 임차인이 빠져있어요. 거기까지 채워지면 수익이 더 늘어나겠네요.”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인중개사는 내 표정에서 뭐라도 읽어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혹시라도 상가가 빠져있다는 말에 내가 흥미를 잃을까 봐 걱정하는 눈치였다.

슬쩍 내 눈치를 살피던 그녀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뭐, 사장님께서 꼭대기 층이 비어있는 건물을 고집하셨으니까 오히려 좋지 뭐예요.”

“네. 건물은 아주 마음에 드네요.”

“더 좋은 게 뭔지 아세요? 여기 상가에 술집도 안 들어와 있어요. 술집 있는 건물들 보면 취객들이 화장실 다 망가트려 놓고, 비상계단에서 담배 피우고. 어휴, 왜들 그러는지 몰라.”

“여기 건물주는 왜 이 건물을 매각하신 답니까?”

“듣기에는 대출금을 많이 끼고 계셨나 봐요. 나머지는 어떻게 끌어 모으셨는지 자기 돈 들어간 거래야 7, 8억이 전부라고 하던데. 시절이 영 안 좋잖아요. 이자가 감당이 안 되었겠죠. 지금 비어있는 상가도 건물주가 계약 끝나기가 무섭게 세를 올리겠다니까 나간 거거든요. 아무튼 건물에는 전혀 문제가 없어요. 급매로 나온 거라 가격도 이 정도면 훌륭하죠.”

“그렇군요.”

“그나저나 우리 사장님은 젊으신 분이 용기가 참 대단하시네. 제 입으로 하긴 좀 그런 이야기지만 요즘 대출받아서 건물 사시면 임대료 수익으로 큰 재미를 보기 힘드실 텐데요. 레버리지 효과가 영 신통찮아서···”

이 여자는 자기 앞의 남자가 이런 건물 10개쯤은 거뜬히 살 수 있다는 현금을 가지고 있다는 걸 꿈에도 모를 것이다.

“혹시 5층은 지금 잠겨있습니까?”

“아니요. 열려있을 거예요. 전에 스크린골프장이 있었죠. 빠진 지 두 달 조금 안 되었나?”

공인중개사는 요즘 경기가 진짜 안 좋다며 혀를 찼다.

“이렇게 목이 좋은 건물에 두 달이나 임대가 안 들어왔다는 게 참 그렇죠? 사장님도 나중에라도 세 받으실 때 고민 좀 해보셔야 될 거예요.”

“네. 그럼 혹시 5층 좀 올라가 볼 수 있을까요.”

“그럼요.”

사람과 물건이 모두 빠져나간 5층은 온몸의 살이 모두 녹아내리고 뼈만 남은 것처럼 휑했다.

나는 외벽 한 면을 통유리로 해놓은 창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건물 아래로 많은 사람과 차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모두 어디를 저리도 바쁘게 움직이는 걸까.

얼마 전까지 나 역시 저 무리 중의 하나였겠지.

그때였다.

지금 이 순간이 어떤 계시처럼 나에게 상징적으로 느껴졌다.

세상의 꼭대기까지는 아니지만, 분명히 남들보다 높은 곳에 깃발을 꽂았다는 확신.

그 확신은 생전 느껴본 적 없는 희열을 내게 주었다.

그렇구나.

저 아래 바닥에서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던 내가 여기에 올라섰구나.

그런데 이거면 충분할까?

여기서 더 높은 곳을 꿈꾼다면 나는 날개를 잃고 추락하는 이카루스처럼 바닥으로 떨어지게 될까?

뒤를 돌아보자 흉하기만 하던 공간이 번쩍이는 기구들로 가득 찬 땀내 나는 공간으로 변할 모습이 보였다.

여기다.

여기가 바로 나의 시작점이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스크린골프장이 5층을 전부 썼거든요. 좀 넓죠? 벽 세우셔서 상가 2개로 쪼개셔도 좋을 거예요.”

“중개사님.”

나는 입과 두 발을 쉼 없이 움직이는 공인중개사를 불러 세웠다.

그녀는 내 눈빛에서 어떤 결심이라도 느꼈는지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예. 사장님, 말씀하세요.”

“여기가 좋습니다. 이 건물로 하겠습니다.”

지금이 빚을 갚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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