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0억을 상속받았다-24화 (24/200)

24. 최예리

서울의 모처의 카페.

최예리는 오늘 이곳에서 오랜만에 절친들을 만나기로 했다.

“예리야! 여기야, 여기!”

최예리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먼저 도착해 있던 일행들이 손을 흔들었다.

“얘들아, 잘 지냈어?”

대학 시절 팔짱을 끼고 항상 붙어 다녔던 넷이다.

하지만 그 시절도 한 때.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서로의 길이 자연히 갈리고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그래도 최예리 있어서 이들은 언제 만나도 어제 만났던 것처럼 어색하지 않은 친구들이었다.

최예리는 친구들을 쓱 돌아보았다.

새삼 감회에 젖게 되는 그녀였다.

노란 털이 겨우 빠진 중병아리 꼴로 청바지를 입고 캠퍼스를 돌아다니던 시절이 어제 같은데 자신보다 먼저 사회생활을 시작한 친구들이 이젠 어엿한 어른처럼 보였다.

“예리 좀 봐. 너 얼굴 왜 이렇게 예뻐졌어? 뭐, 받았어? 좋은 데 있으면 나도 같이 다니자.”

“받기는. 이제 공부 안 하니까 가만히 있어도 살이 빠지더라. 회사 다니면서 나 6키로나 빠진 거 있지.”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던 2년은 최예리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다.

그땐 고 3 수험생활보다 더 치열하게 공부를 했던 것 같다.

무릎 나온 츄리닝 바지에 티셔츠만 걸치고 하루에 14시간을 꼬박 독서실에 앉아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험이 그렇듯 합격자보다 불합격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게 공무원 시험.

100명을 한 줄로 세워놓으면 고작해야 그중에 8, 9명만 합격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불행하게도 최예리는 그 좁은 문을 통과하지 못했다.

마지막이라고 다짐한 시험에서 드디어 처음으로 필기시험에 합격했던 그녀였다.

기뻐했던 것도 잠시, 최종 면접에서 고배를 마신 그녀는 펜을 쥘 동력을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다.

“예리야. 그러지 말고 일 년만 더 해보자.”

최예리의 부모님은 그녀를 믿고 한 번 더 도전해보라고 격려해주셨다.

하지만 최예리는 더 이상 자신이 없었다.

공시생이라는 신분이 그녀에게 뺏어간 것은 시간만이 아니었다.

태생적으로 밝던 그녀는 점점 웃음을 잃어갔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바닥을 치는 자존감은 빠르게 세상의 질서를 따라가는 친구들과 자신을 비교하게 만들었다.

가장 두려웠던 건 아무리 노력해도 그 어떤 보상도 받을 수 없을지 모른다는 막막함이었다.

최예리는 더 이상 망가지는 자신을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그래. 어차피 접을 거면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접는 게 낫지. 이러다가 서른이 넘어가면 세상 어디서도 날 써주지 않을 거야.’

그렇게 최예리는 이력서를 쓰기 시작했다.

이력서를 계속해서 돌리고 있던 즈음, 그녀는 ‘정식 모터스’라는 이름조차 생소한 회사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구직 사이트의 게시글을 보게 되었다.

“진짜?”

“그러니까, 대박이지? 이거 사려고 백화점 문 열리기가 겁나 뛰었다니깐?”

최예리가 잠깐 생각에 잠긴 동안 친구들의 입에 오르는 화제는 분 단위로 바뀌었다.

남자친구 이야기··· 직장 생활··· 혹은 그렇고 그런 뻔한 뒷담화.

눈을 잠깐 돌리고 있으면 대화를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다.

지금 주제는 한 친구가 새로 산 명품 가방에 관한 이야기였다.

“예리야.”

“··· 응?”

“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회사 생활은 좀 어때. 할만해?”

최예리의 맞은 편에 앉아있던 친구가 그녀의 팔을 잡아 흔들며 말을 걸었다.

“그냥 맨날 실수하고 혼나고 그러지 뭐.”

“나도 신입 사원 때 그랬어. 어휴, 진짜 꼰대들 극혐.”

그때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또 다른 친구가 불쑥 말을 치고 들어왔다.

“예리야. 너 그 회사 계속 다니려고?”

“어우, 야. 너는 이제 회사 들어간 지 이제 일 년 된 애한테 뭐 그런 소리를 하냐.”

“걱정되니까 그러지. 대기업 다니는 사람들도 수틀리면 이직하고 그러는데···”

가방을 연신 자랑하던 그 친구는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대기업에 다니고 있었다.

최예리는 마땅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그냥 웃었다.

한동안 대화는 최예리에게 집중되었다.

“예리. 너 요즘도 소설 많이 읽어?”

“요즘엔 거의 못 읽지. 공시 준비하면서부턴 안 읽었던 것 같아.”

“예전에 너 동호회도 했었잖아. 소설 쓰는 동호회. 그때 네가 썼던 소설 제목이 뭐였더라?”

“야! 생각만 해도 창피하니까 말도 꺼내지 마라!”

“왜, 장기 좀 살려보지. 너 웹소설이라고 들어봤어? 잘 되기만 하면 웬만한 직장인들보다 낫다더라.”

“됐어. 내가 무슨···”

“예리야, 근데 너희 회사 대리 말이야. 그렇게 잘 생겼다는. 나 사진 좀 보여줘.”

너희 회사 대리.

한영수 대리.

한영수의 이름은 투수의 글러브에서 튀어나온 돌직구가 되었다.

그 묵직한 공은 무심하게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던 최예리의 가슴에 정통으로 꽂혔다.

“사진?”

“그래, 어디 그 대단한 얼굴 좀 보자.”

“없어. 사진.”

한영수의 카톡 프로필을 찾아보면 사진 한 장쯤이야 안 나올까 싶었지만, 최예리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왜인지 한영수를 고작 시시콜콜한 잡담의 화제로 올리고 싶지 않은 그녀였다.

“예리야. 근데 얼굴은 왜 그렇게 빨개졌어? 설마··· 너 그 대리 이야기 나왔다고 그러는 거야?”

“미쳤나 봐. 뭔 소리야.”

최예리는 자기가 생각해도 너무 동작이 크다 싶을 만큼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갈색 머리가 머리 움직임을 따라 좌우로 찰랑거렸다.

‘와, 저분은 정말 잘생기셨네. 무슨 배우 같아.’

한영수를 처음 보았을 때 최예리는 그저 그가 참 잘생긴 얼굴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모든 사회초년생에게 선배라는 존재가 그렇듯이 가끔은 무섭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같이 직장 생활을 하면서 일도 잘하고 행동도 당당한 그를 보며 저도 모르게 동경하는 마음이 점점 커졌다.

회사 때문에 속상한 날이 많았지만, 그래도 한영수가 있어 다닐만하다는 생각이 들 때쯤, 그 동경의 감정은 점점 최예리를 헷갈리게 만들었다.

‘심장아, 제발 나대지 마.’

한영수의 작은 호의에도 마음이 설레고 얼굴이 붉어지는 최예리였다.

바쁜 아침 출근길에도 그녀는 구두를 신고 현관 앞 거울에서 5분 동안은 꼭 자신을 비춰보았다.

“그 대리, 여자친구는 있대?”

“몰라··· 근데 아마 없을걸?”

“너어, 진짜 웃겨. 뭘 몰라야. 다 알아봤네. 그러지 말고 회식 같은 거 있을 때 딱 말해. 풀린 눈 뜨고 말이야. 대리님, 끝나고 저랑 한 잔만 더 하시면 안 돼요?”

익살스러운 친구의 말에 모두의 입에서 까르르 웃음이 터졌다.

“아니야. 그런 거··· 그냥 존경하는 선배야. 좋은 분이고. 무엇보다··· 대리님은 날 여자로 생각하지 않으실 거야.”

*

“대리님, 잠시만요.”

나에게 뛰어온 최예리는 무릎을 잡고 몸을 숙인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예리 씨. 무슨 일이야.”

“예··· 저, 대리님···”

금방이라도 울음을 쏟을 것 같은 최예리.

나는 그녀를 달래기 위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 많이 놀랐지?”

“괜찮··· 아요.”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자리의 유일한 여자였던 그녀가 어찌 놀라지 않을 수가 있었을까.

“자리는 어떻게 되었어.”

“임 차장님은 오 과장님이 택시 태워서 보내셨어요. 오 과장님이랑 김 주임님은 두 분이서 한 잔 더 하겠다고 가셨구요.”

“아까 예리 씨가 아니었다면 나도 임 차장처럼 짐승이 되었을지도 몰라. 아니, 분명히 그랬을 거야. 예리 씨는 괜찮아···? 그냥 가볍게 넘어갈 일은 아니야. 저기, 아까 임 차장한테 말했던 거 내가 도와줄 수 있어. 그런 쪽에 능력 있는 사람을 하나 알고있어.”

최예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저는 그냥 임 차장님··· 아니 임 차장이 대리님을 다치게 할까 봐 겁이 났어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그랬어요.”

“내일 그 식당가서 CCTV 영상 파일 좀 잘 저장해서 보관해달라고 말할 참이야. 혹시라도 생각이 바뀌거나 임 차장이 예리 씨 더 괴롭히면 꼭 말해. 그땐 나도 같이 싸워줄 테니까. 물론 어른답게 법으로 말이야.”

나는 최예리를 향해 어설프게 웃었다.

그러자 뜻밖에도 그녀의 눈에서 왕사탕 같은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 대리님. 죄송해요.”

··· 왜?

지금 그녀의 입에서 사과의 말이 나와선 안 된다.

“예리 씨. 뭐가. 예리 씨가 왜 죄송하다고 말해.”

“정말··· 회사 그만두실 거예요?”

“그래. 내일 사직서 쓸 거야.”

“저 때문에··· 저 도와주시다가···”

잔뜩 목이 메 웅얼거리며 그녀는 대충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오해다.

오늘 일은 그저 기름통에 던져진 작은 불씨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미리 정해진 결말처럼 어차피 벌어질 일이었다.

“예리 씨 때문 아니야. 오늘 일이 아니었어도 나 회사 그만두려고 진작에 준비하고 있었어.”

최예리는 쿨쩍쿨쩍 코를 들이마셨다.

“예리 씨. 나 좀 봐봐. 나 예리 씨한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

눈가 주위가 벌게진 최예리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예리 씨가 잘못하지 않은 일에 죄송하다고, 미안하다고 말하지 마. 사과하는 것도 습관 되니까. 모든 사람에게 잘하려고 할 필요도 없어. 예리 씨의 착한 진심을 이용하려는 나쁜 사람들은 어디서든 만나게 되니까···”

마치 임 차장처럼···

“말하다 보니 이거 젊은 꼰대가 따로 없네. 아무튼 말이야. 힘든 일 있으면 꼭 연락해.”

“··· 대리님”

“응?”

“그럼 힘든 일, 회사 일 말고는···”

최예리는 무언가 대단한 선언이라도 하는 것처럼 주먹을 꽉 쥐었다.

어떤 결연함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 대리님한테 연락하면 안 되나요?”

최예리의 젖은 눈동자 안에서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최예리의 눈, 그리고 말에서 느껴지는 진의를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여자로서 마음에 담아본 적이 없으니, 그녀가 원하는 것을 줄 수가 없다.

“예리 씨. 난 예리 씨를 예전부터 좋은 동생으로 생각하고 있었어. 이젠 더 이상 직장동료가 아닐 테니 더더욱 그렇게 생각할 테니까··· 언제라도 좋으니까 연락해.”

이게 내가 지금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말이었다.

“··· 좋은 동생.”

최예리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그 미소가 조금은 쓸쓸해 보이는 건 내 기분 탓일까.

“아, 너무 창피하다.”

눈가를 손가락으로 닦아내며 최예리가 말했다.

“대리님, 저 남자 앞에서 울어본 거 정말 오랜만이거든요.”

“그 오랜만이 내 앞이어서 이거 정말 미안해지는데?”

“잘못하지 않은 일에도 사과하는 거 습관 된다고 하지 말라면서요.”

“역시 예리 씨야. 배우는 게 빠르네.”

우리 둘은 실없이 웃었다.

“나 대리 부르려던 참이야. 괜찮으면 내 차 같이 타고 가. 지하철역에서 내려줄게.”

“아니에요. 저 앞에서 택시 타면 돼요. 역까지 금방이에요.”

“아니야. 어차피 가는 길인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최예리는 손을 흔들며 내게서 멀어져 갔다.

“대리님.”

열 걸음 정도 걸어갔을까, 그녀가 나를 불렀다.

“만약에 이제 회사 밖에서 보게 되면 저한테 예리 씨라고 하지 말아주세요. 그냥 예리라고 해주세요. 아시겠죠?”

저 멀리 사라져가는 최예리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과거와의 작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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