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오늘이 바로 그날 (2)
다섯 명의 남자아이들이 무언가로부터 달아나고 있었다.
어디서 뒹굴었는지 먼지투성이인 아이들은 귀신이라도 본 듯 잔뜩 하얗게 질린 얼굴이었다.
“새끼들. 다신 까불지 마라.”
12살 이승우는 도망치는 아이들을 향해 소리를 냅다 질렀다.
승우의 오른쪽 코에서는 코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 고아원 깡패 새끼들아. 우리 형 데려올 거니까 너흰 죽은 줄 알아.”
“어. 데리고 와! 아니다. 지금 나랑 같이 너희 집 가자. 가서 너희 형 직접 만나면 되겠네.”
패배를 인정 못 하는 아이 중 한 명의 도발에 이승우는 당장이라도 쫓아갈 기세였다.
그때 이승우의 옷소매를 누군가 잡았다.
“야. 됐어. 나 쟤 알아. 쟤 형 없어. 거짓말하는 거야.”
한영수였다.
한영수도 온몸이 흙먼지투성이였다.
“에이. 집 들어가면 신부님이 옷 보고 혼나겠네. 영수야, 신부님한테 뭐라고 말해야 해?”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면 되지. 신부님이 혼내신대도 우리 잘못한 거 없어.”
그 나이 꼬맹이답지 않게 당찬 자기주장을 말하는 한영수.
그런데 한영수가 이승우를 보더니, 목젖이 보이게 웃기 시작했다.
꼬맹이답지 않다는 말은 취소.
깔깔대며 웃는 천진난만한 모습은 딱 그 나이 그대로였다.
“너 코피 나거든? 저런 물 주먹에 코피가 나냐.”
“어?”
“코피 나면 진 건데. 승우 넌 졌네.”
“새끼야. 지긴 누가 져.”
이승우는 제 코를 손으로 쓱쓱 닦았다.
주룩━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영수의 코에서도 사이좋게 코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이승우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한영수. 지금 너도 코피 난대요.”
무슨 사연으로 두 녀석이 제 머릿수보다 두 배가 넘는 다섯을 상대로 싸운 걸까.
“오빠들. 고마워.”
영수와 승우가 싸우는 동안 미끄럼틀 뒤에 숨어있던 여자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한바탕 다툼이 지나가자, 둘에게 다가왔다.
고맙다고 말하며 아이는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 건넸다.
아이의 이름은 김다희. 영수와 승우처럼 자애 보육원의 원생이었다.
다희는 방금 꽁지 빠지게 도망치는 녀석들에게 운동장에서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
그걸 두 친구가 보게 된 것.
“다희야. 쟤들이 너 평소에도 괴롭혀?”
“응··· 막 내 머리카락 잡아당기고, 고아원 산다고 놀리고···”
“너, 나랑 영수 오빠 몇 반인지 알지? 또 괴롭히면 찾아와 알겠어?”
다희는 작고 둥근 머리를 주억거렸다.
“그런데 오빠들 엄청 멋있었어. 꾸러기 공격대 같아. 영수 오빠는 똘이! 승우 오빠는 호왕!”
“아, 뭐야. 꾸러기 공격대는 똘이가 주인공이잖아! 왜 영수가 주인공인데!”
*
“임 차장님. 그만하시죠.”
“뭐···?”
임 차장은 못 들을 말이라도 들었다는 듯 황당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예리 씨는 이리로 나와.”
최예리는 이틈을 타 얼른 손을 빼선 자리를 피했다.
임 차장의 번들거리는 눈이 나를 잡아먹을 듯 쏘아보았다.
안구에 실핏줄들이 뻘겋게 올라와 있는 그 눈은 마치 먹이를 빼앗긴 짐승 새끼를 보는 것 같았다.
“추잡스럽게 뭐 하는 겁니까.”
“야! 한 대리! 영수야··· 그만하고 우리 나가자. 차장님도 일어나시죠. 예?”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당황한 오 과장이 중재를 나섰다.
하지만 여기서 그만둘 거면 시작도 하지 않았다.
“예전부터 물어보고 싶었는데, 일부러 사람들한테 못되게 구는 겁니까? 미움받으면 어떤 쾌감 같은 게 느껴져요?”
“이런 개새끼가 지금 뭐라는 거야? 미쳤어?”
임 차장이 주먹으로 식탁을 내려치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기세는 사뭇 볼만했다.
허리에 양팔을 올리고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나를 쏘아보는 것이, 꼴에 장판파의 장비라도 빙의한 것 같았다.
가오가 육체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군.
“난 옛날부터 너 눈깔이 맘에 안 들었어. 혼자 고고한 척··· 이 새끼야, 니가 뭐가 그렇게 잘났는데.”
“··· 야, 임홍빈.”
“뭐? 임홍빈? 이 새끼가 완전히 돌았네? 너 내일부터 출근하기 싫지?”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래. 내일부터 출근 안 하려고. 그리고 지금 단단히 착각하나 본데, 난 나만 잘났다고 생각한 적 없어. 너 혼자 그렇게 생각한 거지.”
“허, 이 새끼 봐라, 너 내 성깔 몰라? 그래, 오늘 한번 계급장 떼고 붙을까? 헬스장에서 그깟 철 좀 든다고 내가 겁이라도 먹을 줄 알았냐.”
테이블의 의자를 발로 밀면서 임 차장은 내게 성큼 다가섰다.
“영수야. 오늘 왜 이래. 너 이런 사람 아니잖아.”
오명식 과장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나와 임 차장 사이에 껴서 둘을 갈라놓으려 애를 썼다.
“아, 나와 봐.”
임 차장은 그런 오 과장의 어깨를 잡아채더니 확 밀쳐버렸다.
자기보다 직급만 아래일 뿐이지 나이는 오명식 과장이 세 살 위다.
눈깔이 돌아가더니 이제 그런 것도 안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인간이라고 양심은 있나 보지? 남의 눈을 보고 찔리는 기분이 들었다니 말이야.”
“찔리긴 누가 찔려··· 이 새끼가 오냐오냐했더니 머리통 끝까지 기어오르네?”
“글쎄. 내 기억엔 네가 나한테 엿같이 굴었던 것밖에 안 떠오르는데?”
“이 X만 한 X새끼가!”
누군가의 말처럼 사람들은 할 말이 없으면 욕을 한다.
이제 임 차장은 나를 향해 저속한 욕설을 내뱉을 뿐이었다.
“입 닥쳐. 냄새나니까. 여긴 내가 계산하고 갈 테니까 또 더치페이하자고 주접떨지 말고. 너 여태껏 법인 카드로 계산하면서 동료들한테 엔빵이라고 현금 받아 챙긴 거 다 알아. 임홍빈, 40 넘게 그 모양이니 기대도 안 한다만, 하루라도 제발 인간답게 살아라.”
“X새끼야. 어딜 도망치려고 그래?”
“앞으로는 우연히라도 마주치지 말자고.”
“거기 안 서!”
몸을 돌려 자리를 벗어나려고 할 때, 임 차장이 나에게 달려들며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그는 나를 향해 오른팔을 크게 휘둘렀다.
허, 우습지도 않은 일격이었다.
주먹이 뭐 태평양에서 출발이라도 한 거야?
술 취한 인간이 던지는, 큰 궤적을 그리며 날아오는 붕붕 훅 따위를 못 피할 리가 없다.
슬쩍 한 발짝 뒷걸음질을 쳤다.
임 차장은 어깨가 빠질 듯 헛방을 쳤고, 제힘을 못 이겨 앞으로 휘청거렸다.
쿵━
임홍빈은 그대로 바닥에 뒤통수를 드러낸 채 ‘큰 대’자로 자빠졌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피해? 이 개새끼, 넌 오늘 뒤진 줄 알아.”
최예리의 비명이 들렸다.
“악―”
··· 저 미친 새끼가!
맨몸으로는 안 되겠던지 임홍빈은 무기를 집어 들었다.
그의 손에는 소주병이 쥐어져 있었다.
“시팔 새끼. 그 X 같은 눈, 다시는 못 뜨게 해줄게.”
이제는 짐승이 아니라 악귀로 보였다.
사탄이라도 들린 것처럼 악에 받쳐 지껄여대던 임 차장이 나에게 소주병을 휘둘렀다.
턱━
“시팔··· 놔, 이거 안 놔?”
소주병이 내 몸을 건드리기 전에 먼저 임 차장의 손목을 낚아챘다.
손아귀에 슬슬 힘을 주었다.
이 새끼야. 철을 열심히 들면 악력도 세진단다.
“아··· 아! 놓으라고!”
임 차장이 내 아귀힘에 눌려 꼼짝을 못하고 있는 동안 오 과장이 달려들어 임홍빈으로부터 소주병을 빼앗았다.
“안 놔? 이 애비, 애미도 없는 새끼가!”
··· 하.
“··· 너 지금 나한테 한 말, 평생 후회하게 해줄게.”
껍데기가 벗겨진 인간의 악의란 얼마나 더러운가.
속 시원한 말 몇 마디를 던지고 일어날 생각이었다.
이까짓 인간을 힘으로 어쩌지 못할 건 아니다.
하지만 가뜩이나 생각해야 할 문제들이 많은데 괜한 사고라도 쳐 경찰서를 들락거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젠 생각이 바뀌었다.
머리 안에서 실핏줄 몇 개쯤이 터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이 인간과 같은 공간에서 공기를 마신다는 것 자체가 역겨웠다.
이빨 몇 개쯤 부러트리자. 그냥 거지 동냥한 셈 치고 맷값을 주련다.
그래, 이 새끼는 사람이 아니다.
이 새끼를 사람으로 만들려면 누군가 개처럼 패서 뼛속 깊숙이 공포를 심어줘야 한다.
내가 오늘 너를 사람으로 만들어 주리라.
신부님. 정말 죄송합니다. 더는 못 참겠어요.
하느님도 이건 못 참으실 거예요.
그렇게 꽉 쥔 주먹을 임홍빈의 얼굴을 향해 높이 들었을 때였다.
“그만··· 제발 그만 하세요!”
최예리의 절박한 외침이 식당 안에 울려 퍼졌다.
그녀는 휴대전화 화면을 들어 보이고 있었다.
전화기 액정 다이얼 패드에는 ‘112’라는 숫자가 찍혀 있었다.
“그만 하세요··· 임 차장님, 계속 이러시면 저 추행한 거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 손 함부로 만지고, 아까 술 따라드릴 땐 어깨도 쓰다듬고··· 저기 천장에 CCTV도 달려 있어요.”
휴대전화를 든 최예리의 여린 손이, 아니 온몸이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렇게도 휘청거리는 몸으로 서 있는 게 용할 지경이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용기를 냈을 것이다.
수치심을 참고 자기 입으로 ‘추행’이라는 단어까지 써가며 상황을 정리하려고 애써보는 최예리였다.
큰 용기를 쥐어 짜낸 그녀의 모습을 보자 불에 기름을 부은 것처럼 솟아오르던 분노가 간신히 진정되기 시작했다.
나는 손에 주었던 힘을 풀며 임 차장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대단한 네 친척한테 말해서 다른 데로 꺼져버려. 영업팀에서 이 정도로 분탕을 쳤으면 충분하잖아. 그냥 입 닥치고 조용히 살아. 안 그러면 소주병으로 나 까려고 한 것까지 전부 포함해서 개망신 당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임홍빈, 이거 똑똑히 기억해. 오늘 최예리가 널 살린 줄 알아.”
*
“어, 선배님? 어디 가요?”
식당 밖으로 나가던 차에 통화를 마치고 돌아오던 김영하와 마주쳤다.
“2차로 자리 옮긴대요? 아··· 저요?”
내가 아무 말이 없자, 김영하는 제 휴대전화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풍화 상사요. 아니 이 사람들도 참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전화 걸더니 사람을 놔주질 않더라고요. 근데 선배, 표정이 왜 그래요? 정실 전자 때문에 그래요? 사장님이 많이 속상해하죠? 아까 선배님 갈 때 나도 같이 따라갔어야 했는데···”
“그런 거 아니야. 들어가 보면 알 거다.”
나는 김영하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들겨 주었다.
“··· 어? 선배님 진짜 어디 가세요?”
하나의 시절이 또 이렇게 막을 내리는구나.
애초에 이 회사와 좋은 작별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내가 순진했던 걸지도 모른다.
그래도 일하면서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었는데···
차를 주차해둔 곳에 도착해 가방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부재중 전화가 3통.
발신자는 모두 최예리였다.
그녀는 앞으로 괜찮을까?
혹시라도 회사가 그녀에게 부당한 짓을 한다면 고 변호사의 힘을 빌려서라도 도와주리라.
술이 몇 잔 들어갔으니 대리기사를 부르려고 콜 어플을 찾고 있을 때였다.
“대리님. 가지 마세요! 잠시만요!”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나를 향해 뛰어오는 최예리의 모습이 보였다.
최예리